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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평: 병인박해와 승정원 일기(고종과 조정대신이 말하는 병인박해, 원재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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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16 ㅣ No.924

산맥을 헤집어 얻은 ‘샘물’ - 고종과 조정대신이 말하는 병인박해

《병인박해와 승정원일기》 1, 2, 3

원재연 편,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2016 

 

 

1. 사료로 보는 박해시기와 박해자들

 

역사서를 쓰는 형식 중에 사료로 보는 역사가 있다. 이는 당시의 언어와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 해당 사실에 가감 없이 접한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사료와 사료 사이를 연결하는 능력이 책으로서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다. 최근 병인박해의 진행과정을 사료들만 편집하여 눈앞에 그려낸 책이 나왔다. 그것은 원사료가 왕의 정치행위를 매일 현장에서 기록하는 생생한 자료였기에 가능했다. 이와 더불어 편저자가 병인박해의 발생, 원인, 경과에 관한 기록뿐 아니라, 당대의 사회 관련 자료들을 망라했기 때문에 개설서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교회의 역사를 한국사의 흐름 안에서 해석하기를 원하는 편저자는 자신이 알고 싶어 하는 내용 전부를 찾아놓았다. 원재연의1) 《병인박해와 승정원일기》 1, 2, 3권이다.

 

이는 《승정원일기》 중에서 고종 즉위 초인 1863년 후반부터 고종 10년인 1873년 말까지 천주교 관련 기사를 뽑은 자료집이다. 병인박해 150주년을 닫는 12월에 출간되었다.

 

병인박해는 조선 유교사회와 천주교를 중심으로 근대정신을 실천한 천주교인들의 마지막 충돌이었다. 이때는 유난히도 서양배가 조선 연안에 많이 드나들었다. 또 백성들도 국경을 넘어 밀무역을 하거나 만주 땅으로 이주하던 때였다. 즉 안팎으로 국경이 흔들리고 있었다. 병인박해는 이 우연찮은 요소까지 천주교 신자에게 책임 지워 엄청난 규모로 확대되었다. 더욱이 조선 조정이 이러한 사태를 파악하고 대처했던 통치행위는 문호개방으로 이어진 급변하는 사회의 방향키가 되었다. 왕조의 이 경험은 교회사 내지는 한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최근에는 한문 역사서들이 영인, 국역되고 있다.2) 학계에서는 이러한 관찬 사료에서 교회사 관련 기록을 선별하여 소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병인박해에 대해서는 김진소 신부가 《고종실록》에서 천주교 관련 기사를 뽑았다.3) 이번에 원재연은 《승정원일기》를 분석했다. 《고종실록》은 왕의 사후에 편찬된 종합연대기인 반면에, 《승정원일기》는 생생한 현장기록이다.4) 원재연은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천주교 관련 기사를 뽑고 제목을 달아 원문과 국역을 제시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를 조선왕조 여타의 관찬 연대기 기록과 비교해 병인박해에 대한 관찬 기록의 정리를 완성하고자 했다.

 

조선은 철학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왕조를 세웠고, 기록으로 그 기강을 유지한 나라이다. 조선 조정은 기록하면서 국정을 반성하여 통치 방향을 찾고자 했다. 그들은 풍부한 기록문화를 통해 단단한 연속성을 굳혀왔다. 조선 시대에는 각 관청별로 업무와 관련된 일지를 작성했다. 그리하여 《동궁일기》 등 규장각도서로 현재까지 전하는 것만 해도 100여 종이 넘는다. 그중에서 《비변사등록》(273책, 국보 152호), 《일성록》(2,327책, 국보 153호)과 《승정원일기》(3,243책, 국보 303호)를 시대를 포괄하는 대표적 관찬 연대기로 꼽는다. 이외에 다른 연대기와는 달리 왕의 사후에 그의 통치기 역사를 종합해서 엮어낸 《조선왕조실록》(1,893권, 국보 151호)도 있다. 이들 자료는 모두 시간을 두고 축적되어온 역사자료이다.

 

역사가라면 누구나 조선 시대 관찬 연대기들의 존재가 고맙지만 동시에 그 엄청난 분량에 부담을 갖는다. 위의 네 관찬 연대기 중 분량상으로 가장 방대한 책이 단연 《승정원일기》다. 조선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조선왕조실록》에 사용된 글자 수가 약 4,768만 자인 데 비해, 조선 후기만을 다룬 《승정원일기》는 약 2억 4,125만 자의 분량이다.5) 그런데 전문가가 사료의 전후 자료를 섭렵하면서 교회사 해당 사료를 뽑아 놓는다면 이는 분명 효과적인 도구의 생산이다.6)

 

원재연은 책머리에 작업 과정, 목적, 방법과 한계점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그는 당대 관찬 연대기를 상호 비교하면서 그 차이점을 짚겠다고 겸손하게 시작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에는 일반적 예상을 뒤엎고 천주교 측 자료가 적다. 이에 원재연은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 배경 기사들을 함께 엮었다. 그리하여 이 책은 당대 핵심 인물과 그들의 활동, 군사조직, 왕의 국정 운영, 백성들의 동태 등을 전해주게 되었다. 한편, 원재연은 이 자료집에는 천주교를 배척한 사람들의 입장만이 전해진다는 점을 염려했다. 사실 《승정원일기》는 국왕을 비롯한 조정의 정책 결정권자들의 입장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만 전하고 있어 《포도청등록》이 수많은 신자들의 문초 및 처형을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대비된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면이 바로 이 책의 장점이다. 우선 이 책은 교회사에 대한 관찬 자료를 논문카드처럼 뽑아 쓸 수 있다. 그것이 이 책의 주요 목적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책은 조선 시대 신자가 아닌 통치자나 일반 백성들이 천주교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시대변화와 천주교 박해가 어떻게 맞물려 가는가를 적나라하게 전한다. 통치권을 가진 비신자들은 국내외적으로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상황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서양세력과 연계되었다고 간주했다. 이 책은 그들이 외국과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천주교회에 대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자료집이면서 동시에 원재연의 창작이다.

 

 

2. 《승정원일기》로 당대 연대기의 박해기록을 일괄

 

《병인박해와 승정원일기》는 국역본 2권, 한문 원본 1권인데, 각각 695쪽, 740쪽, 508쪽에 이르는 방대한 작업이다. 원재연은 《승정원일기》의 관련 기사 각각에 제목을 달았다. 그 제목은 교회사 사건을 위주로 뽑았다. 그 자세함으로 인해 국역본 목차만 각각 50여 쪽, 40여 쪽에 이른다. 색인도 갖추어져 있다.7) 이는 필요한 기사를 신속히 찾도록 하는 편저자의 배려이다. 또한 이 책은 번역문과 원문을 상호대조하여 볼 수 있도록 별책으로 분리했다. 그리고 번역문의 한글 제목을 해당 한문 원문 기사 위에 동일하게 옮겨 넣음으로써, 서로 대조하기 쉽도록 기획했다. 책은 총 6장인데, 각 장은 공통된 사건 위주로 편성했기 때문에 다루는 기간이나 책의 분량은 일정치 않다. 1장 대왕대비의 <척사윤음>과 병인박해의 발생, 전개, 2장, 3장, 4장은 병인양요, 5장 두만강변 조러분쟁과 덕산굴총 미수사건 등, 6장 신미양요 이후로 구성되어 있다.

 

원재연은 《승정원일기》 교회사 기사를 여타의 관찬 사료들과 비교했다. 동일사건을 전하는 각 연대기의 기사들이 대동소이한지, 축약되었는지 등의 여부를 일목요연하게 밝혀 놓았다. 나아가 다른 연대기의 내용이 더 상세할 경우에는 그 원문 자체를 주에 제시하기도 했다. 조선의 4대 관찬 연대기인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일성록》은 동시대 각기 다른 관청의 기록물로서 나름의 특징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같은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보완한다. 그러므로 사건을 파악하는데 이들 사료를 함께 비교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다만 우리는 이 사료들을 활용할 때 각 연대기들의 작성된 목적과 개보수의 현황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사후에 작성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조선 사회 전반에 관한 판단을 담은 종합적 역사서이다. 즉 실록은 해당 사건이 지난 후 쓰이는 책으로서 관찬 연대기 중 가장 늦게 완성되는 기록이다. 《비변사등록》은 군사, 재정, 인사, 외교와 같은 군국의 주요 업무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정조 임금의 개인 일기에서 시작되어 국가의 공식 일기가 된 《일성록》은 왕정 체제하에서 왕과 신하가 참고하는 정치자료 참고서였다. 《승정원일기》는 왕의 비서실 역할을 하는 승정원에서 왕명 출납, 제반 행정 사무, 의례적 사항 등 국정 전반의 현장을 왕의 옆에서 매일 적은 기록이다. 이들 각각의 성격을 염두에 두고 자료들을 일별한다면 이는 분명 효용성 높은 도움닫기이다.

 

또 하나 관찬 연대기의 개보수 여부는 필수적인 검토사항이다. 한마디로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고종 연간의 연대기들은 모두 개보수를 거쳤다. 《승정원일기》는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융희 4)까지 승정원에서 처리한 내용을 기록한 필사본 3,243책이다.8) 그런데 이 책은 임진왜란으로 화를 입어 그 이전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후에도 이괄의 난과 1744년(영조 20)에 화재로 소실되어 개보수정(改補修整)했다. 고종 연간의 《승정원일기》도 개수되었다. 1888년(고종 25)의 화재로 1851년(철종 2)에서 1888년 당해까지의 《승정원일기》 480여 권 중 361권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이때 불탄 부분은 가까운 시대여서 비교적 완벽하게 복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원사료라고 하기는 어렵다.

 

한편, 《일성록》은 1760년(영조 36)부터 1910년(융희 4)까지 150년간의 국정 일기로, 필사본이며, 총 2,329책이다. 그러나 이도 1873년(고종 10) 경복궁의 화재로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다. 총 492책에 대한 개수가 이루어졌으므로, 지금 전하는 책이 모두 당대에 작성된 원본은 아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다른 문제가 있다. 본래 실록은 태조에서부터 철종 연간의 1,893권 888책을 일컫는다. 《고종황제실록》 · 《순종황제실록》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지시를 받으며 편찬되었기 때문에 실록에서 따로 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비변사등록》은 임진왜란 이전 기록은 소실되었고, 1617년(광해군 9)부터 1892년(고종 29)까지 276년 간의9) 등록 필사본 273책이 남아있다. 그런데 비변사는 1865년에 의정부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의정부 안에서 비변사와 같은 조직을 두고 이전과 동일한 체재로 작성되었다. 이 때문에 계속 《비변사등록》으로 총칭한다. 고종 연간의 비변사 기록은 주로 이 변화 안에서 쓰였다.

 

결론적으로 《승정원일기》를 비롯하여 연대기들에 나오는 고종 연간 자료는 개보수 되거나 외세의 영향을 입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사료란 역사가의 능력과 정확한 비판 여부에 따라 어느 사료이든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결과를 얻으려면 자료의 성격은 필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 모두를 감안하고 나면 이 책에서는 여러 가지 정보를 얻게 된다. 일단 박해 정국을 살필 수 있다. 더욱이 선교사들이 현장에 없던 시기나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 전말을 파악하게 된다. 즉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지표를 얻게 된다. 또 교회사 자료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박해자의 이름뿐 아니라 신자들의 이름, 사건 이후 그들의 향방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를 제대로 안다면 병인박해 직후 입국해서 남긴 외국인들의 조선 여행기나 보고서의 내용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게 된다.

 

 

3. 고종과 대신들의 외세에 대한 우려와 대책

 

《병인박해와 승정원일기》에서 다룬 시기는 고종(1852~1919) 원년부터 10년까지이다. 병인박해는 이 시기 10여 년간 똑같은 죄목의 처형이 잇따라 그 희생된 숫자가 많게는 2만여 명이라고 전해진다. 고종은 1863년 12살(만 11세) 나이에 조대비의 양자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즉위하고부터 1866년 (음)2월 13일 병인박해 초기까지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했고, 이후 1873년까지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했다. 국가의 정점이 두 곳으로 나뉘기 쉬운 불안정한 정국이었다.

 

한편, 당시 국내에는 조선 전통윤리와는 다른 천주교의 가르침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다. 연안에는 이양선이 자주 나타났고, 백성들은 밀수, 이주 등으로 국경을 넘는 일이 증가했다. 이른바 조선 국경이 소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프랑스 함선의 강화도 점령(병인양요), 제너럴 셔먼호의 대동강 입항, 덕산굴총사건(오페르트 도굴사건), 미국 함선의 강화도 침공(신미양요)을 겪었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조선 조정의 대응을 천주교 신자들의 눈으로 보면 어떠할까? 이 책은 바로 그 모습을 보여준다.

 

이양선과의 접촉이 일어날 때마다 조선 전체에 커다란 파장이 일었다. 고종 즉위 이듬해인 1864년 봄부터 러시아인들이 두만강변에 나타났다. 이로써 감사와 북병사에게 모두 월봉(감봉)하는 벌을 시행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했다. 그리고 같은 날 동학의 교조 최제우를 효수했다. 김좌근은 이를 계기로 대왕대비에게 정조 때처럼 ‘정학’(正學)을 부양하여 ‘사설’(邪說)을 종식시키고 오가작통법을 시행하기를 건의했다. 대왕대비는 전국의 서원, 사우 등의 실태를 조사했다.

 

1866년 (음)1월 왕은 남종삼의 체포를 명했다. 이어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고 홍봉주와 이선이가 함께 잡혔다. 주교를 비롯하여 선교사와 주요 신자들이 차례로 처형되었다. 조정에서는 선교사들이 조선까지 나온 데에는 조선인의 도움이 있었다고 판단했고, 그것이 천주교인들이라 생각했다. 조정에서는 감사와 수령들에게 해상 연락 통로인 해서와 호서의 연안을 철저히 단속하도록 지시했다. 천주교 서적을 수납하여 모두 불사르기도 했다. 또 조대비는 천주교 신자들을 고발하면 보상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이때 조정에서는 신유박해 등 초기 박해와는 달리 선교사를 처형하면서 프랑스나 중국의 반응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있음이 주목된다.

 

병인년 (음)7월, 영국 배가 해미에 정박하여 교역을 요청했는데, 탑승한 사람들은 영국과 청나라 사람을 합하여 약 30여 명이었다. 그중에 오페르트가 있었다. 같은 달, 청에서 프랑스 함대가 선교사 및 천주교 신자들의 살해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아직 해미에 영국 배가 있는 동안에 이번에는 대동강에 또 다른 배가 출몰했다. 미국선 제너럴 셔먼호였다. 조정에서는 거듭 통상을 요청하는 영국 상선을 엄한 말로 물러나게 하려고 했고, 평양에 정박한 이양선을 무찔렀다.

 

이양선이 연이어 조선 연안에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해안 방어를 강화하고 현장에서 붙잡힌 자는 공초를 받은 후에 그 자리에서 효수했다. 강화부 이양선과 잠통한 안춘득을 효수경중 했다. 또한 인삼 등을 밀무역하다가 효수당한 사람들도 속출했다. 선참후계는 이미 이들에게 행해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들 모두를 외국세력과 결탁했다고 보았다.

 

1866년 (음)8월 천주교인 김면호, 김문원, 이연식을 효수경중 했다. 이때 왕은 천주교를 배척하는 <척사윤음>을 반포했다. 또 부평에 이양선이 들어왔으므로 새로 제수된 통진 부사를 내려보냈다. 경기감사 유치선 등이 제대로 막지도 못해서 죄를 지었다는 장계를 올렸는데, 왕은 그들에게 죄를 진 채로 방어에 더욱 힘쓰라고 했다. 이후부터 이양선이 들어오면 해당 지역 관리들이 스스로를 질책하는 비슷한 장계를 올렸고 왕은 매번 같은 명을 내렸다. 이양선과의 충돌이 끝나고 나면 대신들은 해당 지역 관리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곤 했으나 왕은 이도 허락하지 않았다. 왕은 예정되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라서 해당 지역 관리들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드디어 9월 프랑스 군함과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배는 두 번 출몰했다. 프랑스 선박은 음력 9월에 인천 쪽으로 와서 양화진까지 진출하며 지형을 정찰했다. 조정에서는 이에 응할 군대를 파견했고, 영의정 김병학은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돌아갔다. 이 무렵 천주교 신자 이의송, 이붕익, 김여어뿐을 모두 총융진으로 내보내어 군민을 모아 놓고 효수하여 대중을 경책했다. 그리고 1866년 9월 24일에는 봄 3월 21일(음) 대혼을 치른 민치록의 딸에 대한 국왕비 책봉 칙서를 받고 이를 축하하는 대대적인 사면이 베풀어졌다. 여기에 천주교 신자들도 포함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다음 달 프랑스군이 재침하여 강화도를 점령하고 한 달 후에야 물러갔다.10) 즉 9월 조정에서는 서양 오랑캐가 나타나자 강화중군에 이용희를 임명하는 등 많은 장수들을 교체했다. 또 왕은 ‘화포과’ 등의 무과나 별시를 치러 새로운 인물 발탁에도 힘썼다. 그러나 임명을 받고 사양하는 관리도 나오고, 또 명을 받고도 기간 내 부임하지 않는 신하들도 잇따랐다.

 

사회에서는 점점 당시 상황을 전시 때로 인식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돈의문 등 도성 각문과 4도(都)에 군사들을 증강했다. 그리고 군비강화를 위한 대책을 모색했다. 이때 박규수는 급수문에 관방 설치를 주장했고, 박주운은 산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축성론’을 대비책으로 올렸다. 왕은 또한 내탕전 5만 냥을 내려 연해 각 고을의 군사적 대비를 갖추게 했다. 전선(戰船)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내탕금으로 각 도의 전선을 수리했다.11) 조정에서는 군포를 다시 추징하고, 이양선으로 피해보는 지역의 군량미를 탕감하는 등의 세금정책을 실시했다. 왕은 여러 날 노숙한 군사들을 호궤(잘 먹임)하여 위로하고, 교대시켰다. 각 진에서는 매일 별탈 없이 밤을 지냈음을 보고했다.

 

강화도가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프랑스 배가 갑곶진에 정박하자 왕은 이에 대비하여 총융 중군에 이원희를 임명하는 등 무신들을 추천받았다. 왕은 새로 임명된 관리에게 무기를 내렸는데, 이경하에게는 상방검을 내렸다. 이 혼란 속에서 강화도의 장녕전에 있는 어진을 옮겨 봉안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고, 나중에 이 공로로 여러 명이 포상을 받았다.

 

왕은 또 각지에 소모사를 임명하여 의병을 규합했다. 일반 백성들까지 이에 호응하여 의병으로 자원했고, 상황에 따라 각 진에 보내졌다. 예를 들어 성균관 부근에 백성 200명이 군진에 자원했다. 의병 모집과 군대 증강에 대한 기사가 상당히 많다. 또한 사람들은 의병으로 자원하기도 하지만 군수(軍需)를 보태는 이가 많았다. ‘통진유학 이중윤이 황소 3마리를 순무영 군진에 바치다’와 같이 각계각층에서 군수에 소용이 될 물품들을 헌납했다. 종친이나 전 · 현직 관리, 아전, 서리, 향반, 백성 등 참여자도 다양하고 또 그 물품 내용도 황소, 소금, 땔감, 돈 등 여러 가지였다. 물론 이들 모두는 서양배가 물러가고 난 뒤 각각 해당 행위에 대해 벼슬이나 상금 등의 포상을 받았다.

 

조정에서는 프랑스 군함에 대해 청 예부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이때 이항로가 오랑캐의 침공 대비책을 올렸는데, 나라 사람을 나라와 적으로 양분하고 있어 이후 일어날 일들을 짐작게 한다. 점점 더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한성근 등 정부군은 문수산성에서 프랑스 군대에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미 뱃길이 막혀 생선을 잡을 수 없으므로 산 닭으로 대봉하게 된 때였다. 병인년 세제를 10월 안에 상납하도록 미리 분부할 정도로 비상사태였다. 이항로는 다시 왕이 사용하는 물건 중에 서양 기물이 있으면 모두 대궐 뜰에서 불태우라고 상소했다. 조선은 점점 서양 배척으로 기울어갔다.

 

프랑스군은 한성근과 양헌수 등에게 타격을 받고 사기가 꺾였고, 드디어 철수했다. 프랑스군이 물러가자 각종 포상이 내려졌다. 전사, 사상자나 의병자원자, 군수를 바친 자 등에게 많은 상을 내렸고, 관리로 임명된 이도 다수였다. 강화도가 점령되자 자결한 이시원과 그 동생 이지원에게도 증직했다. 이때 관비가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로 나아가기도 했다. 사회에서는 이처럼 새로 부상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자리 잡이를 해야 했다.

 

한편, 병인양요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당 지역 책임자들을 처벌하자는 상소가 다시 빗발쳤다. 고종은 벌을 엄하게 하지 않는 편이었으며, 관리의 잘못과 결과적 실패를 구별했다. 그래도 신하들은 줄기차게 연좌, 능지처참, 부관참시 등의 방법으로 이미 처벌된 사람을 가중처벌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이런 혼란 속에 그해 초겨울에는 천재지변까지 일어났다. 조선왕조가 선택한 해결책은 왕이 경연에 매일 나가 열심히 공부하고, 정학을 세워서 사학을 물리친다는 방책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부를 상대하는 외세의 공격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변화가 일고 있었다. 동래부를 통해 들어오는 서양문물이 있었고, 러시아인들이 계속 국경을 넘어왔다. 또한 인삼 등의 밀수를 하러 외국에 오가는 사람도 많았다. 그뿐 아니라 당백전을 주조하여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동전을 사적으로 주조하는 사람이 생겼다. 무기를 훔쳐서 팔아먹는 자, 화약과 총기류를 함부로 제조하는 자들도 속출했다. 조정에서는 죄인들을 공개처형했고, 선참후계의 엄벌에 처했다.

 

병인양요는 프랑스 함대가 두 번 조선 해안에 와서, 두 번째는 강화도를 점령한 뒤 한 달여 만에 돌아간 사건이다. 조선에서는 이를 프랑스군을 격퇴한 승전으로 인정했다. 실제로 이 상황은 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쟁으로 이해할 만큼 국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은 전국적으로 군비를 강화하고 무기를 제조했다. 조선이 동전을 사들여 무기를 만드는 것은 청나라에 피신해 있던 선교사들도 간파했다.12) 그리고 수많은 관리가 교체되고 새로 선발되었으며, 화포과와 같은 별과가 설치되었다. 또한 전국적으로 의병과 군수를 지원받았으니 이 불안은 전 국민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조정은 예산이 부족했다.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대처는 덕산굴총사건이나 신미양요 때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이 모든 소요가 천주교 신자와 연계되었다고 간주되면서 교회는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을 천주교 신자들이 뒤집어쓰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덕산굴총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조정에서는 조철증, 이승훈의 후손인 이신규, 이재의, 이재겸, 권철신의 증손자 권복 등이 다시 체포했다. 그리고 1856년 사면된 이승훈의 죄명을 다시 환원했다. 국경을 넘어 나갔던 천주교 신자 장치선과 최영준을 강화도 진무영에 압송하여 군민을 모아놓고 공개 처형했다. 오페르트 일당이 내포의 물길을 따라와 구만포에 내렸을 때 도움을 주거나 환영한 신자 손경로, 김양길 등도 공주 수영에 군중을 모아 놓고 공개 처형을 했다. 천주교인을 비호한 문경현의 아전 임경책을 공개 처형하기도 했다.

 

더욱이 오페르트 도굴사건에 대해 왕은 전과는 달리 매우 엄격했다. 사건 3년 후 고종 8년(1871)에 덕산굴총사건에 연루된 천주교 신자 이여강, 김창실 등이 잡혔다. 왕은 이때 삼군부에 나아가 친국했다. 그리고 이들의 연좌 죄인들에 대해서도 철저히 조사했다. 왕은 모반부도 죄인 이여강의 출신 고을인 공주의 읍격을 낮추어 공산이라고 했고, 이여강의 아들 이응구를 연좌율로 교수형에 처하는 것도 윤허했다.

 

그러나 이 처형이 집행되고 있는 동안 이번에는 미국 배가 충청도와 경기도 근해에 머물고 있었다. 신미양요의 시작이었다. 음력 4월 24일 미국 군함이 초지진에 쳐들어왔다. 조선은 병인양요 때와 거의 같은 방법으로 대응했다. 결국 음력 5월 25일 왕은 포도청에 천주교 신자들을 철저히 색출 처단할 것을 지시했다. 사실 미국 배는 천주교 신자들하고는 별다른 관계가 없었는데, 이제 조정에서는 이를 구분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요컨대, 조선에서는 두 차례의 프랑스 함대와의 교전, 제너럴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 등은 시간적 격차가 있는 사건이었는데도 똑같은 동요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양선이 출현 할 때마다 나라 전체가 소요하고 동시에 천주교 신자에 대해 탄압이 강해졌다. 그 방향은 점점 쇄국으로 치달았다.

 

 

4. 《승정원일기》가 전하는 고종 임금의 변화

 

1895년 8월 28일 고종 임금과 뮈텔 주교가 만났다. 이 자리에서 왕은 자신의 즉위 초기에 일어난 일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13) 그런데 《병인박해와 승정원일기》는 박해기 당시의 최종결정권자였던 고종 임금을 새롭게 보게 한다. 이 책에 의하면 그는 매우 어린 나이였음에도 매사에 사려가 깊고 너그러웠다.

 

우선, 1866년 8월 왕은 천주교를 배척하는 <척사윤음>을 반포했다. 그런데 이를 보면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많이 알고 있음이 드러난다.

 

“… 대체로 그들은 옳지 못한 책들을 전해가며 익히고 은밀히 서로 가르쳐 주면서 외구(外寇)의 무리들을 불러들여 마치 신처럼 받들고 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결탁해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유인하여 깊이 물들게 하여 그들의 교리로서 온 나라는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 그들은 말하기를 ‘천주학이라는 것은 하늘을 위로 하는 학문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늘이 스스로 하늘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만물이 스스로 만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이를 만들어 주는 것이 있은 다음에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주는 만물의 시초이다’라고 하고 있다. 또 말하기를 ‘천당을 만들어 천주를 잘 섬긴 자들의 영혼을 복되게 하고 지옥을 만들어 천주를 잘 섬기지 않은 자들의 영혼을 고통스럽게 한다. 죄를 지어 응당 지옥에 들어가야 할 사람이 야소의 앞에 자기의 잘못을 슬프게 뉘우치고 아울러 야소의 어미에게 기도를 드려 천주에게 전달되도록 하면 곧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고 영혼도 천당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된다’라고 한다….”14)

 

조정에서는 천주교인들의 믿는 교리와 신앙생활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영세와 견진, 교리서의 활용 등도 알고 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당시의 천주교도는 신유년, 기해년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고종은 이양선이 침몰해 비상시국이 되었을 때도 도성 내 치안, 백성의 안위 등 상당히 여러 곳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동시에 왕은 지방에서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토색질하는 악습을 크게 경계했다. 왕은 질서를 잡기 위해 공금을 횡령한 관리는 군사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효수하여 경계했다. 1866년 9월 프랑스 선박이 양화진에 정박해서 조정이 단호한 대책을 세울 때 15살 어린 왕은 혼란을 틈타 도성 내외에 무뢰배들이 약탈이나 절도를 하는 등 날뛰지 않도록 좌우변 포도청에 지시했다. 또 왕은 적을 막으면서 민간의 농사를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귀국한 주청 사신 등과 서양 오랑캐에 대해서 논하는 자리에서 왕은 “우리나라의 농사는 어떠하던가?”라며 사신에게 오가는 길에 본 백성의 상황을 물었다.

 

왕은 신하들보다는 확실히 관대했다. 조정에서는 강화부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자, 이미 죽은 남상교의 삭직과 남종삼, 홍봉주의 처와 자녀들에 대한 연좌 처벌 상소가 잇따랐다. 왕은 매번 그들의 청을 윤허하지 않았다. 20여 차례의 상소 끝에 남종삼의 처자식을 유배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적에게 빼앗겼던 지역의 책임자들을 유배하라는 상소도 모두 물리쳤다. 그는 형세가 급변하여 맞닥뜨리게 된 상황과 관리의 실책을 구분했다. 덕산굴총사건 이후 조철증, 이승훈과 권철신의 후손을 체포해서 처형하고 난 뒤에도 왕은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의 친인척 관리들에게 안심하고 근무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죄도 세밀히 분석하여 조유선과 이재겸은 천주교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며 유배로 결정했다. 이를 반대하는 상소도 끊임없이 올라왔지만 왕은 꿋꿋했다.

 

한편, 조선왕조의 상소제도는 재고할 여지가 있다. 조선에서는 한번 상소가 시작되면 목적한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반복되었다. 같은 내용의 상소를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관리들이 번갈아 가며 왕에게 올렸다. 심지어 20여 회씩 되풀이되었다. 더욱이 예전에 죽은 죄인을 덧붙여가며 긴 처벌을 주장하였다. 즉 사건이 일단락되었어도 끝내지 않고 계속 끌고나가는 제도이다. 그 사이 사회불안은 증폭되고 있다.

 

이 자료집에서 우리는 흔들리지 않으며, 공사를 구별하는 신중한 젊은 왕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의 눈으로 병인박해를 접하게 된다. 자료집 전체에 등장하는 천주교인의 이름은 병인박해 처형자까지 합해도 30여 명 정도이다. 그러나 이 책은 천주교가 사회에서 인지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다만, 조선왕조는 은원(恩怨)도 없는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하느냐고 질문하면서도, 내왕한 이양선을 쫓아내는 데만 주력하고 그 나라 자체와 세력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점이 아쉽다. 그리고는 왕이 경연을 자주 해서 덕을 닦고 정학(正學)을 세워야 한다는 대책을 세웠다. 이점이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 과오로 작용했을 수 있다.

 

 

5. 제언

 

유학시절에 필자는 색인이 만들어져 있는 나라와 어떻게 논문 편수를 경쟁할 수 있느냐고 자문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도 타인의 시간을 절약시켜 주기 위한 작업들을 하고 있다. 이는 천주교회사 분야에서 더욱 활발하다. 교회사 연구는 역사를 알아야 하고, 동서양 언어를 익혀야 하며, 또 신학을 알면 더욱 바람직하다는 등의 요구되는 조건이 많다. 이 때문에 연구자의 시간을 줄여주는 자료집, 색인집이 크게 활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병인박해와 관련해서는 《고종실록 교회사 자료모음》, 《추안급국안》 등이 이미 출간되었다. 이번에는 《승정원일기》 자료가 출간되었다. 한 자료만 있을 때보다 이런 작업이 거듭될수록 그 시너지 효과는 몇 배수로 상승하게 된다. 특히 이번 작업은 다른 관찬 기록까지 비교하여 관련기사 모음에 완성을 꾀했다. 실록자료집의 표지가 이 책의 장을 나누는 속표지로 들어가 있는 점도 상징적 연계이다.

 

발간사에서 이 책을 통해 교회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인식을 형성시키기를 소망했는데 이 책은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책은 필요한 기사만을 뽑을 때도 유용하고, 한 권의 책으로 읽어도 좋다. 이 책의 일차적 의의는 자료카드 역할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한 권의 단행본으로서 당대 사회를 진솔하게 만나게 한다. 무엇보다도 책을 통독하면서 얻게 되는 큰 이익은 박해자를 미워하지 않고 그들의 안목으로 교회사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전환적인 연구 방향을 창출할 것이다. 편자나 의뢰자인 수도회, 또는 기획자인 영성연구소 관계자들이 의도하지 못했던 의외의 수확일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편자 원재연이 산맥 속에서 찾아낸 교회사 연구의 새로운 샘물을 나눌 수 있다.

 

다만 앞으로 2쇄를 찍게 될 때는 몇 가지가 보완되었으면 한다. 우선 책이 다루는 시기를 확대해야 한다. 이 책은 고종이 등극한 해부터 대원군이 물러나는 때까지의 10년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대원군이 천주교를 대변하는 기준이 되기 어렵다. 따라서 대원군의 치적을 보는 게 아니라면 취급하는 시기는 병인박해 자체에 맞추어야 한다. 1873년 이후에도 요동 지역에 조선 선교부가 설치되어 병인박해로부터 피신한 선교사들이 재입국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새로운 선교사가 임명되고 있었고, 조선 신자들이 오가며 그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박해기간은 선교사들이 새로 입국해서 활동할 때까지로 연장해야 한다.15) 원재연도 고종 친정기에 천주교 기사는 계속된다고 하면서 이를 후속작업으로 미루었다. 그러나 이는 후대 작업이 아니고, 병인박해를 이해하기 위한 완결 작업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임을 지적하고 싶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병인박해와 승정원일기》의 분량이 현재만 해도 만만치 않다는 문제가 있긴 하다. 그런데 《승정원일기》에는 천주교 관련 기사가 많지 않다. 그리고 이 책의 자료 분리를 일괄화하면 분량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이 책은 처음 시작할 때에는 같은 날짜의 동일한 주제의 기사도 분리했다. 그런데 5장, 6장에 가면 같은 날짜의 동일한 주제들은 하나로 묶여 있다. 심지어는 같은 날짜의 다른 주제가 섞여 있기도 하다. 따라서 같은 날짜의 동일주제를 묶는 형식으로 하면 지면은 조절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비전공자나 입문자도 쉽게 읽도록 하기 위해서는 역사용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사알, 체하, 차임, 단부 등 요즘 잘 사용되지 않는 언어들은 적어도 제목에서만은 우리말로 바꾸는 등의 배려가 요구된다. 또 하나 각 기사 앞에 있는 해설에서 선정된 기사의 앞뒤 흐름을 요약해 주면 한층 완성된 ‘사료 병인박해사’가 될 것이다. 나아가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그의 행적, 생몰년 등도 달아주면 좋겠다. 작은 문제이기는 하나 편저자는 제공된 국역본을 수정했다고 하는데, 본인이 수정한 부분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밝혀주면 연구자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몇몇 주는 수정할 필요가 있다. 본서에는 1866년 11월 29일에 문경에서 잡힌 이제현(李齊賢) 등을 효수하도록 허락한 기사와 1867년 10월 28일 홍주에서 체포된 신자 이제현(李濟鉉)의 효수를 명한 기사가 있다. 그런데 두 인물은 이름자도 틀리고 치명일도 달라 동일 인물일 수가 없다. 앞의 이제현이 대구의 이윤일 성인이다. 따라서 두 사람을 전부 대구의 이윤일 성인으로 해설함은 오류이다.

 

지금까지 교회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방대한 사료에서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기록만을 검색하여 활용한 편이다. 필수적이지만 전체 사료를 종합적으로 보는 일이 적었다. 그러므로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사회 전체를, 그것도 우리가 아닌 타자의 눈으로 보는 일은 연구의 또 다른 창이다. 더욱이 이 책은 자료집이므로 정확한 자료를 찾는 사람에게는 마치 논문카드처럼 필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그리고 책 전체를 읽는 사람에게는 박해자들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이 책은 단연 병인박해에 대한 관찬 기록의 사료집이면서 또한 사료를 통해 보는 역사서이다. 《병인박해와 승정원일기》는 자료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공이 들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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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재연은 서울대학교에서 한국교회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서울대 BK21 법학연구소 및 수원교회사연구소, 덕성여대 등의 연구직을 거쳐 현재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연구교수이다. 저서로 《조선왕조의 법과 그리스도》, 《서세동점과 조선왕조의 대응》 등 다수가 있으며 많은 논문이 있다.

 

2)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 http://db.itkc.or.kr ; 여기서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중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은 아직 국역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한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bb는 《비변사등록》을 제공한다.

 

3) 김진소 편, 《한국순교자연구 2 - 고종실록 천주교사 자료 모음》,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1997. 그리고 서종태가 역주한 《추안급국안 推案及鞫案》 85, 86, 87(전주대학교 고전국역 총서 2, 흐름, 2014)은 천주교회사료 편집은 아니지만 병인박해를 다루는 중요한 작업이다.

 

4) 《승정원일기》는 군신 간의 수작을 빠짐없이 정확하게 기록해야 했다. 그러나 연설(筵說)이나 수작(酬酌)을 받아 적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주서들은 본초책(本草冊)이라는 일종의 속기록 장부와 비망록을 겸한 치부책을 지참했다. 그래서 어느 때라도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필체로 재빨리 기록하거나, 말이 길어 미처 다 받아 적기 어려우면 대강만 적어 놓고 어전에서 물러난 뒤에 기억을 되살리거나, 같이 입시하여 기록하던 사관의 본초책과 대비하여 보완 수정해 초책을 작성했다. 《승정원일기》는 이처럼 현장감 있는 원사료였다(정만조, 《승정원일기》 국역 해제).

 

5) 정만조, 위의 주.

 

6) 《승정원일기》 중 다행히도 고종 연간은 번역되어 있다. 현재까지 인조 · 고종 · 순종 연간의 일기는 국역이 완료되었으며, 영조 연간의 일기를 국역하고 있는 중이다.

 

7) 현재 색인은 각 책의 해당 내용만 다루고 있는데, 색인은 1, 2권을 함께 통괄해서 제시하면 보다 활용도가 높으리라 생각된다.

 

8) 승정원은 1894년 갑오경장 때 기구가 변경되었다. 이후 개칭에 따라 《승선원일기》, 《궁내부일기》, 《비서감일기》, 《비서원일기》, 《규장각일기》 등으로 불리는 198책이 있다. 이런 다양한 명칭의 일기가 《승정원일기》의 형태를 계승해 작성되었다 해도, 이미 기구의 기능이 달라지고, 일본이 내정을 간섭하던 때라 예전과 같다고는 하기 어렵다. 이를 통틀어 《승정원일기》라 통칭한다.

 

9) 등록은 이 기간 276년 중 54년간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10)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 함대의 원정을 1, 2차로 나누기도 한다. 1차는 1866년 9월 로즈 제독이 프랑스 함대 3척을 거느리고 리델 신부와 조선인 세 명을 안내로 삼아 영종도에서 양화진을 거쳐 한강유역을 정찰하고 돌아간 것을 말한다. 그들은 9월 11일 인천 앞바다에 다다랐고, 9월 18일 양화진 · 서강 일대에 진출했다가 지형만 정찰하고 9월 25일 물러갔다(리델 신부의 1866년 12월자 형 루이에게 쓴 편지 참조). 2차는 프랑스군의 본격적인 공격인데, 그들은 다음 달 10월 11일 7척의 군함과 1,230여 명 가량의 해병대를 동원해 강화도 근처에 정박했다. 10월 14일에는 강화도의 갑곶진을 점령한 뒤 한강의 수로를 봉쇄했다. 그리고 10월 16일 강화성을 점령했다. 그달 26일에는 프랑스군이 문수산성을 정찰하다가 매복 중이던 한성근 등 조선군의 공격으로 퇴각했다. 그들은 11월 7일 정족산성의 공략을 시도하다가 양헌수 등의 공격을 받았다. 결국 그들은 11월 11일 장녕전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다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청나라로 철군했다.

 

11) 칼레 신부의 1868년 9월 17일 자 가족에게 보낸 편지. 대원군은 서양배를 보고 큰 배를 제조했지만 증기의 원리는 모르고 외형만 본떴기 때문에 배를 물에 띄울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12) 칼레 신부가 1868년 1월 1일 파리 외방전교회 지도신부들에게 쓴 편지에는 조선인들이 중국의 동전까지 구해서 무기를 만들고 있음을 전한다.

 

13) 《뮈텔 주교 일기(1890~1895)》 I,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1895년 8월 28일자와 조광, <고종 임금과 뮈텔 주교>, 《경향잡지》, 2004년 3월호 참조.

 

14) 본 책 국역본 1, 150~151쪽.

 

15) 김정숙, <병인박해 전후 조선 선교사들의 조선이해>, 《병인사옥 병인양요 병인박해》(병인순교 150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2016.

 

[교회사 연구 제50집, 2017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정숙(영남대학교 문과대학 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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