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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목] 복음으로 세상 보기: 기업 리더, 갑질과 책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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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08 ㅣ No.1027

[복음으로 세상 보기] “기업 리더, 갑질과 책임 사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광고가 있습니다. 2001년 말 처음 등장한 이 광고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고, 한해에 쏟아지는 수많은 광고를 제치고 2002년 최고의 광고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광고는 화려한 특수효과도 없고, 탄탄한 스토리 라인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광고가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 이유는 바로 광고 카피에 있었습니다. 20년 가까지 지난 광고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광고 카피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며 심지어 우리들 일상의 평범한 인사말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로 이 광고는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유행시킨 한 카드회사의 텔레비전 광고입니다.

 

이 광고의 내용은 정말로 단순합니다. 눈밭을 배경으로 빨간 목도리와 같은 색의 장갑을 낀 유명 여배우가 나와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라고 말한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당시 IMF 이후 어려움을 겪는 모든 서민들의 마음을 파고들며 그들의 욕망을 자극했습니다. 이 광고가 나간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새해의 시작에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하지 않았고,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로 대신했습니다. 술자리 건배사에서도, 아니 졸업이나 취업, 혹은 혼인 등 한 사람의 생에 있어 큰 의미를 갖는 자리라면 모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축하의 인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복을 받는다는 것은 경제적 부유함을 뜻하는 것과 동일하게 인식되었습니다.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지… 부자가 되면 무엇이 좋은지… 어떤 부자가 되어야 하는지… 고민할 자리는 없었고, 그냥 부자가 되는 것이 곧 행복이고 축복이라 여겨졌습니다.

 

실재로 우리는 정말로 부자가 된 사람, 혹은 부자로 살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선망의 대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삶을 동경합니다. 경제적인 부유함만이 곧 성공의 유일한 척도가 되었고 양심을 지킨다거나,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 등의 가치는 뒤로 밀려났습니다. 대신 재산이 얼마인지, 아니면 얼마나 풍족한 소비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에만 관심을 나타냅니다.

 

 

인간존엄성과 공동선 추구하는 기업 리더 돼야

 

그런데 요즘 들어 그러한 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게 바뀐 경우가 종종 등장했습니다. 경제적 부유함이 사회적 힘으로 연결되면서 그 힘에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경우, 혹은 그 힘을 부당하게 사용하는 부자들의 이야기가 터져 나오면서부터입니다. 바로 시쳇말로 ‘갑질’이란 단어가 표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갑질을 검색해보니 “갑을관계에서의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말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회장님 갑질’, ‘대기업 갑질’, ‘프랜차이즈 갑질’ 등의 연관 검색이 소개되었습니다. 모두가 부자를 꿈꾸고 바라지만, 언제부터인가 부자를 존경하지 않고 적대시하는 시선도 공존하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이러한 현상은 기업의 고위직 임원이나 오너의 오만함과 횡포와 관련된 사건이 반복되면서 등장했습니다. 여객기 승무원에게 했던 폭언과 그로 인한 항공기 난동으로 비난을 샀던 항공사 오너 일가의 이야기나,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비인격적인 대우와 막말 논란으로 여론을 악화시켰던 한 제약회사 회장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경제적 강자일지언정 행복한 부자이거나 존경받는 부자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고 기업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소양과 인덕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또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가맹점과 맺는 계약의 불공정 요소나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맺는 관계에서 힘의 우위를 활용한 부당한 처우 역시 갑질로 여겨집니다. 앞선 사례가 기업 리더의 개인적 일탈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불공정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한 개인에 대한 인격적 무시로서의 갑질이 아니라 납품 단가를 부당하게 책정한다든지, 대기업 혹은 본사가 지불해야 할 항목을 중소기업이나 가맹점에 떠넘기며 막대한 수익을 내는 구조 등 공정하지 못한 경제가 갑질이란 말로 표현되며 사회적 비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한 기업의 엄청난 영향력을 실감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기업의 리더가 어떠한 비전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기업 구성원과 그들의 가족 뿐 아니라 협력업체 소속 사람들과 지역사회, 그리고 더 크게는 국가와 사회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래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더욱더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임이라는 것이 단순한 금전적 기부나 보여주기식 봉사활동의 수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유통 및 판매 단계에 얽혀있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가치를 추구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기업은 단순히 제품을 생산,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엄성과 공동선의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반대의 경우라면 구조적인 악을 굳건하게 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기업 리더들은 ‘소명’을 기억해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기업 리더들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 글을 읽는 분 중 사업체를 운영하는 경영리더들도 분명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에서 발간한 ‘기업리더의 소명’이란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루카복음 12장 28절에서 “많이 주신 사람에게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라는 구절을 소개하며, 기업가들에게는 위대한 자원이 맡겨진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위대한 일을 하기를 바라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하느님께서 주신 특별한 ‘소명’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를 위해 기업의 리더들은 신앙과 삶에 있어서 구분된 삶 혹은 분열된 삶을 극복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흔히들 하는 표현으로 “일 따로, 신앙 따로”가 아니라 자신의 소명을 기억하며 이를 자신의 책임과 업무에서 실현한다면, 기업경영은 어떠한 사회에서도 위대한 선을 지향하는 힘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한 기업을 잘 경영하는 것은 분명 큰 부를 이룰 수 있는 일이고, 이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기업 리더라면 단순히 부자가 되는 일에만 관심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나의 선택과 비전에 따라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심지어 공동의 집인 지구의 모든 피조물이 성장을 지속할 수도 있고, 혹은 그들의 존재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모두의 발전을 보장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참된 리더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소명을 기억하는 기업리더가 되는 것이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욱 값지고 소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9월호,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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