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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성교절요 연구: 한국 초대교회 성사생활 지침서(신대원, 안동교회사연구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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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12 ㅣ No.902

《성교절요(聖敎切要) 연구》 - 한국 초대교회 성사생활 지침서

신대원 저, 천주교 안동교회사연구소, 안동교회사 연구총서 4권, 2016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과 그 초대교회의 모습을 추적하는 데 있어서 서학(西學) 특히 한문 서학서(漢文西學書)의 연구는 필수적이며, 바로 거기에서부터 조선교회가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에 수입되어 읽히던 서학서(西學書)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어야 하고, 개별 서학서에 대한 번역과 분석도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교절요》는 한국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전래된 천주교 서적 가운데 하나이고, 그것도 신자들의 전례와 기도의 중심인 성사론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한문 서학서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연구의 부제를 ‘한국 초대교회 성사생활 지침서’라고 붙였다. 이러한 중요한 서적을 발견하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신대원 신부는 석사학위 때 분석대상으로 삼은 이 연구를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 나가면서 새로운 연구총서로 탄생시켰다. 먼저 이 연구서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 후 이 연구의 중요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1. 연구의 구조와 주요 내용

 

본 연구는 《성교절요》(聖敎切要)라는 한문 서학서와 국내에 들어와 번역된 한글본이라는 두 가지 사료에 집중하고 있는데, 본문은 모두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에서는 가장 기초가 되는 서지학적 연구를 진행하였고, 2장에서는 한글 역본을 현대어로 고쳐 역주하였다. 3장에서는 그 내용을 신학 용어 혹은 인용구 등을 중심으로 분석하였고, 4장에서는 《성교절요》(聖敎切要)가 가지고 있는 성사신학적 개념들을 고찰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논문의 구조가 서지적 분석 → 역주 → 내용 분석 → 신학적(성사론적) 해석이라는 순서를 가지고 있으며, 한문 서학서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논점을 모두 활용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서지적 분석과 역주를 통해서 저자, 번역자의 시대 배경 등을 추적하고, 내용 분석과 신학적 해석을 통해 이 서적의 당대의 의미는 물론이고 현대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방향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먼저 1장에서는 서지학적 연구를 진행시켰는데, 기존의 여러 견해들을 분석, 종합하여 결론을 내리는 방식을 택했다. 여기서는 기존의 여러 서지적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한문본 《聖敎切要》가 1705년 아우구스티노회의 오르티즈(Hortis Ortiz, 백다마) 신부에 의해서 초간 되었고, 그 이후 조선에 유입된 것으로 결론지었다. 또한 여러 관련 사료들을 종합하여 《聖敎切要》가 조선 천주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매우 일찍 국내에 유입되었고, 1837년도로 추정되는 한글 필사본도 남아 있다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1장의 “간략한 결론(59~62쪽)”에서 《성교절요》(聖敎切要)는 조선교회가 받아들인 최초의 성사론이 담겨 있으며, 이 외래종교의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문화적 충돌 - 절충 - 이행 - 융합”의 과정을 거쳐 ‘조선의 옷’ 을 입게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2장은 1900년도 한글 역본을 토대로 현대어로 옮겨 역주해 놓은 부분이다. 한글 역본은 한문본에서 기도문과 계명을 제외한 성사론 부분만 발췌되어 형성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역주 부분은 한글본 《성교절요》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3장은 《성교절요》의 구조적 특징을 두 가지 관점으로 논하고 있다. 첫째는 언어 곧 신학적 용어문제이다. 서구의 종교의례인 성사론이 중국의 옷을 갈아입었고 다시 조선의 옷을 갈아입으면서 그 언어는 어떠한 변화를 거쳤는가? 이것은 다시 말해 ‘토착화’ 문제이며, 결국 한글로 옮겨진 《성교절요》는 “한국화된 교리서”, 한국화된 성사론이라 결론지을 수 있다. 이 교리서에 나타나는 다양한 신학 용어는 조선이 받아들인 최초의 신학 개념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다양한 용어들 우리 주 예수, 오주(吾主) 예수, 천주 2위 성자 등이 나타나며, 교화황(敎和皇), 주교, 탁덕(鐸德), 봉교자(奉敎者) 등의 교회론과 관련된 용어, 그 외에 구원론, 은총론, 성사론 등의 주요 신학적 개념이 이 책에 의해 조선의 옷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성교절요》는 그 원본이 이미 로마-희랍적 사유방식을 토대로 하는 그리스도교 교의에 관한 내용이므로 사상적으로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사상(트리엔트 공의회의 신학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중국의 옷, 조선의 옷을 갈아입으면서 자연스럽게 유 · 불 · 선에 입각한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구조적 특징을 분석하는 두 번째 관점은 인용문제이다. 신대원 신부는 이 책에 나타나는 여러 인용구를 분석하고 있는데, 성경, 교부, 예화, 민담 등에 주목하였다. 대부분의 인용구와 예화들은 원저자의 영향으로 서구적 교리 교수법을 원용하고, 그 방식에 따라 기술되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언어 사용이나 개념적인 표상들은 동양적 사고방식과 어울린다고 평가하였는데 특히, 서구의 의식, 곧 “성사지적”(聖事之迹)을 동양의 “례”(禮)로 설명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동양적 영성을 계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단초역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마지막 4장에서는 《성교절요》의 성사 신학적 고찰을 시도하였다. 성사를 지칭하는 당시의 용어인 “성사지적”(聖事之迹)과 “성사지례”(聖事之禮)라는 신학 용어를 다시 한 번 분석하고, 구원론적 고찰에서는 성사를 통한 의화(義化) 개념과 “천주와 의자(義子)=양자(養子)관계”에 주목하였다. 성사를 통해 인간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주의 공동 상속자가 된다는 이 “양자”관념이 동아시아 사회통념과 부합하다고 평가하였다. 성사론과 관련된 마지막 성사 신학적 고찰에서는 성사의 교회법적인 효력을 설명하면서 현대 신학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성사의 설정자, 집행자, 수령자, 칠성사 등의 기본적 해석을 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서구적 신학체계가 동양에서 어떻게 설명되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율곡의 이기론에서 “체, 혹은 본체”라는 개념을 추리하여 《성교절요》에 나타나는 “本體=몸”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즉 오늘날 “실체”라고 번역되는 신학 용어는 《성교절요》에서 한문본의 “體”로 나오고 한글로는 “몸”으로 나온다. 그러나 “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이 “몸”은 단순히 육(肉)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영혼을 포함한 全人的적인 “몸”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176~177쪽). 물론 이 4장에서 고찰하고 있는 《성교절요》에 대한 성사 신학적 해석은 주로 현대의 성사 신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것이다. 《성교절요》가 쓰인 당대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성사 신학이 지배하고 있었고, 이를 받아들였던 중국과 조선 사회의 모습과 지금과는 너무도 다르다. 바로 이 지점이 서학서(西學書)를 연구할 때 놓쳐서는 안되는 부분이다. 개별 서학서를 역주할 때, 항상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당대의 신학과 교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이를 받아들인 중국과 조선의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서학서 연구의 중요성과 더불어 그 난해함을 고백하게 된다.

 

저자는 결론으로 《성교절요》가 번역되어 조선에서 실천되고 있었던 전 과정이 ‘복음의 토착화’ 혹은 ‘문화의 복음화’ 작업이라고 보고, 그 과정의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조선교회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 초보적 토착화 과정이 긴 박해로 인하여 그 기틀이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둘째, 박해로 인한 신앙촌 형성은 대중문화와 차단되는 결과를 가져와 전통사상과의 맥이 단절되었다고 보았다. 셋째, 문화가 다른 선교사들의 입국으로 말미암아 한국 고유의 ‘문화신학’이 개발될 수 없었으며, 서적의 ‘번역’과 ‘필사’를 통해 우리의 ‘문화전통’과 통교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으나 그마저도 유능한 지도자를 잃어버려 신앙의 토착화 작업은 어려웠다. 넷째, 교회 중심의 생활만을 지향함으로써, ‘서구신학의 일변도’에 의지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한국의 문화전통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퇴색되었다. 다섯째, 이러한 서구 일변도 신학은 한국인에 맞는 독자적인 그리스도 신앙의 영성을 개발하지 못하게 했다. 끝으로 한국의 고유사상 이를테면 유(儒), 불(佛), 선(仙) 및 민간신앙을 지나치게 이단시하여 다양한 견해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배척하였다. 저자는 “복음화 한다는 것”은 결국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전통과 환경, 삶의 자리에서 교회의 가치들이 함께 호흡하고 실현되어 질 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성교절요》 등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의 옷을 입은 지난 세기의 교리서들은 세기를 넘어서 우리들에게 일정 정도”(191쪽) 교회의 복음화 사명과 토착화 방식을 미리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2. 연구의 문제점

 

이 연구서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논점은 1장의 서지적 분석 대목이다. 서학서 연구에서 서지적 분석은 매우 중요하다. 서지적 분석이 이루어져야만 ‘사료비판’이 되고, 그 사료의 가치 여부가 결정되며, 그 서적을 통해서 그 시대를 바라보고 역사서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1837년 한글 필사본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분석이 없었던 것이 매우 아쉽다. 현재 한국천주교 순교박물관(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에 보관된 1837년 필사본은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에 나오는 것과 같은 사료라고 판단된다. 실제로 이 필사본의 가장 마지막 면에는 “뎡유 三月二十七日 崔 안더릐”라고 쓰여 있다. 정유(丁酉)년이라 하면 1837년, 1897년 중 하나일 텐데, 쿠랑이 이 책을 발견할 당시가 아마도 1897년 이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필사본이 1837년에 쓰인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필사본은 앵베르 주교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된다. 1838년 12월 앵베르 주교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교회에서 ‘공동 기도문’이 새로 번역되고, 이전의 전승을 발전시켜서 여러 제도가 체계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1837년 필사본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힐 수 있는 사료는 아닐까? 이 필사본과 후에 나오는 목판본을 비교해 봄으로써 전, 후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또한 몇 가지 배경 설명 가운데 내용과 용어에 문제점이 발견된다. 50쪽 내용 가운데 조선의 신자들이 북경에 선교사를 요청할 때, 그라몽 신부에게도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분명히 북경 주교 구베아 주교에게 요청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윤유일 바오로를 밀사로 파견하여 북경주교에게 사목 서한을 받아온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51쪽에 1831년 9월 ‘조선자치교구’로 설정되었다고 했는데,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확하게 “조선대목구”가 설정되었다고 하는 것이 좋겠다. 56쪽에 《주교요지》가 저술되던 당시를 “1791”년으로 보고 있는데, 구베아 주교의 조언과 인준을 받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1795년 이후에 완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세부적인 용어에서 오류가 몇 가지 눈에 뜨인다.

 

58~59쪽 사이에 한글 역본과 한문본의 목차를 비교하여 한글본이 “성사편”만을 별도로 뽑아내어 번역하였고, 당시 신자들에게 칠성사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신앙생활의 지침서로 활용했다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기왕에 두 판본을 비교할 때, 그 번역의 정확성이나 생략 혹은 축약 유무를 검증하며 세밀하게 분석했더라면 좀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차후에 이러한 서지적 검증 작업이 더 이루어지리라 기대해 본다.

 

 

3. 연구의 중요성과 전망

 

이 《성교절요》(聖敎切要) 연구는 이미 1990년에 이루어졌던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5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계속적인 관심 속에서 새롭게 연구총서로 나온 것 하나만으로 매우 가치 있고 귀중한 단일 서학서에 대한 연구라고 생각한다. 앞서 문제점에서 밝혔듯이 좀 더 세밀한 서지적 연구가 더 보충되지 않은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저자는 139쪽에서 《성교절요》에 나오는 다양한 용어들을 분석하면서 조선교회의 초창기 지도자들이 서양의 그리스도 개념에 조선의 문화에 부합하는 새로운 옷을 입힌 것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을 “조선의 교부들”로 지칭하고 있다. 한문 서학서를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한글로 번역하며 조선의 신학을 전개시킨 이들을 “조선의 교부들”로 보고, 이에 대한 관심을 일찍 가지고 있던 것 하나로 저자의 한국교회사 인식에 대한 탁견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사 안에서 한국신학을 이야기 할 때, 혹은 토착화 이야기할 때 정약종의 《주교요지》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가지 신학 사상을 거론한다. 그러나 《주교요지》의 가장 큰 약점은 “성사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약종이 《성교전서》라고 하는 2번째 교리서를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신미년(1811) 서한에서 조선의 신자들은 분명하게 신입 교우들에게 이 《주교요지》가 큰 도움이 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최초의 유럽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 이미 한글로 번역된 복음과 교리서와 기도문에 놀라워했고, 이를 다듬어 체계화시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성사론’이 다듬어졌을 것이고 《성교절요》라는 필사본도 나타났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우리는 다시 “조선의 교부들”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이 남겨 놓은 중요한 업적들을 마치 서양의 교부학 시리즈가 나오듯이 우리도 정확한 원문 비판과 함께 현대어 번역판과 역주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최근에 곳곳에서 개별적인 서학서 번역 작업과 역주 작업이 결과물로 나와서 매우 반갑게 생각한다. 이 《성교절요》 연구는 앞으로의 서학서 연구에 대한 저자의 지속적 관심과 혜안이 들어가 있다고 보이며, 또한 이러한 서학서 연구는 당대의 신자 생활과 사상에 들어가는 관문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향후 이러한 연구가 지속해서 나오고, 좀 더 세밀한 서지적 분석으로 남아 있는 사료들이 밝히 드러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교회사 연구 제49, 2016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한건(한국교회사연구소 부소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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