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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흐름과 과제 종합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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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1 ㅣ No.856

[2013년도 심포지엄]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흐름과 과제 종합토론

 

 

사회자 : 노길명 명예교수 · 고려대학교

 

토론자

조광 교수 · 연세대학교

김정숙 교수 · 영남대학교

박정우 신부 · 가톨릭대학교

손희송 신부 ·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노길명 : 한국 천주교회는 불과 2백 년을 넘을 정도의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몇 가지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이루어온 독특한 특성들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한국 천주교회는 서구 선교사들의 개입이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내재적 요구와 자발적 노력에 의해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세계 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발생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로, 한국 천주교회는 오랫동안 정치권력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왔다는 점이다. 영국의 개신교 교회역사가인 로빈슨(C.H. Robinson)이 “고대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19세기에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의 시련과 형고(刑苦)를 겪었다고는 잘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한국의 초기 신자들이 받았던 박해는 극심한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한국 천주교회는 놀랄만한 성장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후 신자의 수효가 1백만 명에 이르기까지는 정확히 190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러나 1백만 명에 다시 1백만 명이 늘어 2백만 명에 이르기까지는 불과 12년밖에 걸리지 않았고, 이후 7년마다 1백만씩 늘어 현재는 5백30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는 활발한 사회복지 활동, 인권 운동, 사회정의 운동, 민주화 운동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만큼 성장하여 왔다는 것은 건전한 신앙과 영성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양적 성장에 비해 과연 질적으로도 성숙한 신앙과 종교문화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에서 비판적 시각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다원적이고 세속적이며 쾌락주의적인 삶의 문화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해치고 있으며, 교회 내에서도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흐름과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그리스도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 전임 교황이신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작년 10월에 ‘신앙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선조들로부터 이어받은 신앙의 유산을 되새기고 그것을 오늘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오늘의 사회와 역사 그리고 문화 속에서 어떻게 구현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오늘의 심포지엄 주제를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흐름과 과제’로 설정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발표자들의 발표 내용을 중심으로 종합토론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발표자들의 발표 내용에 대한 지정토론자들의 논평과 질의를 들은 다음, 발표자의 답변을 듣고, 이어 자유로운 토론을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자리를 함께해 주신 청중들께서도 좋은 질문과 논평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제1 주제인 “천주교 수용과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에 대한 논평과 질문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이시고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이신 조광 교수님으로부터 듣도록 하겠습니다.

 

 

조광 : 여진천 신부님의 논문을 아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 논문은 초기 교회사를 이끌어 가던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을 집중적으로 분석했습니다. 그리하여 초기 교회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좋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논문으로 생각됩니다. 이 논문을 통해서 평신도 지도자들의 특성과 신앙 특성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논문의 완성도를 강화시키기 위해 몇 가지 문제들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먼저 연구방법론과 관련된 의견입니다. 서론 첫 부분에서 교황 문헌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 장마다 시작 부분에 교리서 등을 근거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역사 연구 방법은 연역법이 아니라 귀납적 방법을 우선시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서술은 역사학 계통의 논문으로서는 지나친 연역적 연구 방법이 아니냐는 지적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각종 칭호가 많이 등장합니다. 역사학 논문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를 객관화시켜야 합니다. 모든 칭호는 빼고 명망을 쓰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 수원가톨릭대학교의 《신앙과 이성》(2005년)에 초기 교회 신자들의 신앙과 삶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셨는데, 오늘 발표와 관련해서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연구사적인 차원에서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다음은 내용에 대한 의견을 몇 가지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우선 자료집 5쪽에서, “이들은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으면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학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당시 성호학은 상당히 널리 알려진 학문 경향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자료집 6쪽(본지 11쪽), “이벽의 집에서 이벽, 권일신, 최창현, 정약용, 김범우 형제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라는 부분에서는 권일신, 최창현, 정약용, 김범우 등이 세례를 받은 장소가 명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료집 11쪽, “그의 집에서 형성된 신앙공동체는 얼마 안 되어 명례방 역관 출신 김범우의 집으로 이전되었다”라는 부분에서 명례방으로 이전되었다고 단정하기보다는 동시적으로 집회처가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따져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가성직 제도에서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두건을 썼으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해괴하고 이상스러웠다고 하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점도 설명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이벽의 저술이라고 단정하는 《만천유고》(蔓川遺稿)에 대한 부분입니다. 《만천유고》는 이승훈의 저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천은 만초천의 준말이고 이승훈이 만초천 부근에 살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만천이란 호가 유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성직제도’라는 용어에 대해서 ‘가’(假)라는 글자는 가짜라는 의미와 임시라는 의미도 있을 텐데, 요즘에는 가짜라는 의미로 많이 통용되는 것 같습니다. 이미 1930년대 나왔던 용어보다는 다른 용어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합니다. 혹시 이 용어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료집 15쪽(본지 22~23쪽), “그는 예산으로 귀양을 가서 거기서”와 “그는…1795년 박해에 귀양가서”라는 부분에서 ‘보외’(補外)라는 용어에 대해 다시 살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벽이 페스트에 걸려서 죽었다고 했는데, 조선에 페스트가 유행한 기록은 없습니다.

 

이 부분은 재검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척사론자인 심유(沈?)라고 했는데, 심유는 이승훈의 사돈이 되는 사람으로, 척사론자이며 혼척(婚戚)이라는 표현도 넣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표현에 대한 의견 몇 가지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감호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감호는 권철신의 별호라고 보기보다는 권철신이 거주하던 곳의 지명입니다. 참고로 ‘호’(湖)는 호수의 개념이 아니라 강물이 흐르다가 그 흐름이 멈추듯 잔잔한 부분을 지칭하는 전통 지리학 용어입니다. 감호는 양수리 부근의 한강 가운데 특정 부분을 지칭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친절하게 ‘감호가 입교하면’으로 번역하기보다는 ‘감호에 사는 그가 입교하면’ 정도로 번역하면 좋을 듯합니다. 다음에 강완숙을 여회장으로 표현하셨는데, 당시 상당수의 기록을 보자면 그냥 회장으로 나옵니다. 그렇다면 여회장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좀 더 생각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노길명 : 네. 감사합니다. 조광 교수님께서 지적하신 내용들에 대해서 발표자이신 여진천 신부님께서 답변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진천 신부님 : 조광 교수님께서 지적해 주신 연구방법론상의 문제에 있어서, 논문 주제를 받고 발표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조선 시대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이 갖고 있었던 신앙과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은 어떨까를 늘 생각하면서 이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교수님께서 교회 문서들을 인용한 것에 대해 역사학적 입장에서 정확하게 지적을 잘 해주셨습니다. 완성될 논문에 수정 · 보완토록 할 것이고, 앞으로 연구하는 데에도 좋은 지침을 주셨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내용에 있어서는 첫째, 권일신, 최창현, 정약용, 김범우 등이 세례를 받은 장소는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서, 최창현과 이승훈의 대질 심문에서 최창현이 “이벽의 집에서 갑진년에 어찌 너는 나를 위하여 영세하고 나를 위하여 신부가 되지 않았다고 하느냐?”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2월 13일에 이승훈은 “갑진년에 정약용과 더불어서 이벽의 집에서 회합하고 정약용은 이 술에 유혹되었습니다. 그가 저에게 영세받기를 청했던 까닭에 저는 이것을 한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2월 18일에 “이벽의 집에서 책을 모방해서 대세 등의 일을 하였다”는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둘째, 신앙공동체 모임에서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두건을 썼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는 것에서, 당시 참여한 분들에게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다만 박해자의 기록입니다. ‘손가락을 움직였다’라는 것은 성호경을 긋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 외의 행동은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연구해보겠습니다.

 

셋째, ‘가성직제도’라는 용어에 대해서, 당시 황사영은 <백서>에서 망행성사(妄行聖事)라는 표현을 썼고, 연구자들은 ‘교계제도’, ‘신자교계제도’, ‘모방성직제도’, ‘가성무집행제도’ 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적해 주신 것처럼 좀 더 바람직한 용어를 연구해보겠습니다.

 

넷째, ‘이승훈이 예산으로 귀양을 갔다’라기보다는 보외되었다라고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분명히 “그를 예산현으로 정배(定配)하라”(《정조실록》, 정조 19년 7월 26일)고 하였습니다.

 

다섯째, 이벽이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고 했는데, 당시 페스트가 유행했다는 기록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블뤼 주교와 달레 신부는 그가 페스트(중국에서 역병이라 부르던 티푸스의 일종)에 걸렸다는 용어를 썼습니다. 그리고 리델 주교의 《불한자전》에 페스트는 염병(染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표현을 인용했는데, 좀 더 연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섯째, 내용과 표현, 방법론에 있어서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족한 점들을 교수님께서 꼼꼼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기존 연구 성과를 인용하면서도 좀 더 치밀하게 고민하고 연구했어야 했는데, 저의 불찰이기도 합니다. 완성될 논문에서 교수님께서 지적해 주신 부분들을 수정하고 보완토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길명 : 네. 감사합니다. 제2 주제 “첨례표를 통해 본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영남대학교 사학과 교수인 김정숙 교수님께서 논평과 질의를 해 주시겠습니다.

 

 

김정숙 : 안녕하십니까. 소개받은 김정숙입니다. 오늘 방상근 선생님이 애써서 작성하시고 연구하신 첨례표에 대한 것을 자세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논문을 읽고 신선하다는 느낌으로 탄복할 때는, 중요한 주제를 찾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자료를 찾은 경우입니다. 지금의 이 논문은 두 가지를 다 충족하고 있으므로 매우 배움이 많은 논문입니다.

 

달력이란 시간을 다스리는 것이며, 인간의 사고를 연속적으로 파악해내는 방법입니다. 일종의 표준화 작업인데, 특히 시간의 표준화는 사람들의 모든 일상생활을 지배할 수 있는 중요한 일입니다. 게다가 천주교는 일 년을 큰 단위로 하고 한 주간을 소단위로 삼아 전례 생활을 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전례를 익히는 일은 우리가 일상의 생활을 신앙화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박해 시대 신자들의 신앙생활 지침표였던 첨례표를 제대로 읽어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본 논문에서 교회 초창기 신자들이 첨례표를 어떻게 만들었겠는가 하는 고민, 첨례표를 통해서 그 일상생활이 어떻게 흘러왔는가를 짚는 것은 박해 시대 신자들의 일상생활을 알기 위한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연구자는 당시의 성인 공경, 대소재, 현존 단체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습니다.

 

다만 논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몇 가지 제언 겸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첨례표를 파면 팔수록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더 나오겠지만, 여기서는 이 논문에서 언급한 부분에만 한정하여 토론하고자 합니다.

 

먼저 첨례표에 대한 선행 연구에 관한 정리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동일 주제를 읽는데, 시간과 노력을 적게 들이고 정확한 정보에 도달하도록 해 주는 것은 연구자의 배려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지난 8월에 구술 발표되었던 김정환 신부의 <1916~1970년 첨례표 연구>도 언급이 되면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너무 방대한 작업이 되겠지만, 앞으로 박해시대 이후 첨례표 변화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둘째로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을축년 첨례표와 병인년 첨례표에 대해 설명을 하면 좋을 듯합니다. 현재 한희동 신부가 기증한 <을축년 첨례표>가 약현 성당 내 서소문순교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절두산의 <병인년 첨례표>가 제일 오래된 첨례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지적해 주면 타인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모리스 쿠랑의 《조선서지》에는 <기축년 첨례표>(1889년)가 실려 있습니다. 이들을 함께 언급해 주면 박해 시대 첨례표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되지 싶습니다.

 

세 번째로,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첨례표는 일 년을 주기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고에서도 1년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실제 첨례표를 보면 보통 이듬해 삼사월까지를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이유를 생각해보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네 번째로 몇 가지 사례를 덧붙이면 논문을 보다 더 잘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들이 있습니다. 가령, 자료집 39쪽(본지 60쪽) “매년 첨례표를 가져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원본 한 부만 있으면 필사하던 당시의 보급 방법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이점은 초창기 교회에서 첨례표가 얼마나 보급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열쇠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의회는 프랑스에서 발간된 다블뤼 전기에 그가 당시 최근 보급된 성의회에 열심이었던 점을 보충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보충 사례들이 더 있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첨례표를 통한 신자들 의식의 변화를 짚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첨례일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자들에게 다른 세계가 있다는 의식, 그 충격과 받아들이는 각오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천주강생’, 서력기원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시간 측정법의 전개는 사회와 시대에 따라 다릅니다. 당시 신자들이 살았던 전 근대 사회에서는 간지(干支)를 사용하여 60년을 하나의 주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중국 연호를 사용하던 시기입니다. 한국에서 햇수를 세는데 본격적으로 서기를 쓴 것은 5.16 이후입니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들은 한국에서 200년가량 앞서 서력기원인 ‘천주강생’을 기점으로 해를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혀 낯선 달력을 사용한 그들의 의식에는 새로운 긴장과 타인과는 다르다는 또 다른 각오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첨례표에서 읽어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발표를 들으면서 저희가 혹시 착각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1960년대 초까지 주일보다는 ‘첫첨례 몇 일’ 이런 식의 표현이 굉장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발표를 하실 때 요일, 주일이라고 하시니까, 요일이 같이 불렸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한 번 분명히 해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노길명 : 네. 감사합니다. 김정숙 교수님께서 질문을 해 주신 내용에 대해서 발표자인 방상근 선생님께서 답변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상근 : 부족한 글인데, 좋게 읽어봐 주셔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선생님께서는 제언 겸 질문으로 다섯 가지 정도를 말씀하셨는데,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선생님께서는 첨례표에 대한 선행 연구 정리와 박해 시대 이후 첨례표의 변화 문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특히 선행 연구와 관련해서 대전의 김정환 신부님 연구를 언급하셨는데, 말씀대로 김정환 신부님은 일제 시대 이후 즉, ‘1916~1970년까지의 첨례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지난 8월 교회사 연구자 모임에서 발표하였습니다. 그런데 8월의 발표문은 아직 완성된 논문은 아니었고, 완성된 논문은 바로 다음 달 26일에 저희 연구소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공식적인 발표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제 글에는 완성된 논문을 소개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첨례표의 변화 문제를 말씀하셨는데, 이 부분도 8월의 발표 내용으로 보아 김 신부님의 글에 실릴 것입니다. 되도록이면 김 신부님의 연구 내용과 겹치지 않으려고 하는데, 꼭 필요하다면 간략한 흐름 정도는 언급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첨례표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다루는 을축년과 병인년 첨례표에 대해서는 각주에서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박해 시대 첨례표에는 보통 이듬해 삼사월까지를 함께 다루고 있는데, 이 이유를 생각해 보았느냐는 질문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1865년 첨례표에는 1866년 3월까지, 1866년 첨례표에는 1867년 4월까지의 내용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다음 해의 첨례표 일부를 신자들에게 미리 알려준다는 의미가 큰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부활 신앙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1865년 첨례표에 실린 1866년 첨례표나, 1866년 첨례표에 실린 1867년 첨례표는 모두 예수 승천까지만 수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활 시기까지만 수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당해 연도의 첨례표가 만들어질 때, 다음 해의 부활 시기까지 신자들이 기억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 첨례표에는 두 번의 부활 시기가 수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신자들에게 부활의 중요성과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취된 부활 신앙은 다시 순교 신심으로 이어져서 한국 교회에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제가 “매년 첨례표를 가져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쓴 것은, 신부님도 안 계시고 첨례표를 만들 줄 모른다면 중국으로부터 가져와야 하는데, 그렇다면 누군가가 밀사로 파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의 입국 전에 조선 신자들이 중국을 왕래한 것은 10년 동안 세 번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중국으로부터 매년 첨례표를 가져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첨례표 한 장만 있으면 필사해서 배포할 수 있지만, 그 한 장을 구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의회 관련 이야기는, 샤를 살몽의 <다블뤼 주교 전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거기서 언급되는 성의회는 각주 55번(본지 81쪽)에서 언급되는 내용과 같습니다. 즉 두 자료 모두 다블뤼 주교의 서한 내용을 언급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첨례표를 통해 신자들의 의식 변화를 짚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특히 서력기원인 ‘천주강생’ 등 전혀 낯선 달력을 사용한 그들의 의식에는 새로운 긴장과 타인과는 다르다는 또 다른 각오가 있었을 것인데, 그러한 마음을 첨례표에서 읽어내야 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지당한 말씀인데, 솔직히 이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발표에서 말씀드렸듯이, 첨례표는 어느 날에 주일과 첨례를 지켜라, 언제 대소재를 지키고 파공해라, 언제 기도하면 전대사를 얻는다 등 신자들의 신앙생활 지침서입니다. 따라서 첨례표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천주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또 내가 비신자와 다르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첨례표 안에서 이 이상 어떤 구체적인 의식의 변화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으로 천주강생 등 시간에 대한 것도, 신자들이 낯선 달력을 사용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첨례표의 경우 연도는 ‘천주강생 몇 년’이라고 되어있지만, 구체적인 주일과 축일의 날짜는 모두 음력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자들은 음력이라는 기존의 시간 개념 속에서 신앙생활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앙의 일상생활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당시 신자들이 시간 때문에 새로운 긴장을 하고 타인과 다르다는 인식을 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은 파공이나 대소재 등 신앙의 내용, 그리고 실천 문제와 관련이 있지, 전례력이 음력으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신자들이 시간과 관련해서 의식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료상으로도 그러한 것들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노길명 : 감사합니다. 그러면 세 번째 주제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이라는 발표문에 대한 논평을 박정우 신부님께서 해 주시겠습니다.

 

 

박정우 신부 :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단어는 뚜렷하게 합의되어 보편적으로 쓰이는 정의는 찾기 어렵지만, 그리스도교 안에서 영성이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내적 태도나 가치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표자가 ‘사회영성’의 정의를 프랜시스 미헌의 표현에 따라 “구조적 차원,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가치가 드러나거나 실현되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신앙, 혹은 이 신앙에서 비롯된 일관된 삶의 자세”, 혹은 “사회(세상) 영역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자세”라고 정의한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영성에 이미 사회적 역사적 차원이 들어있는 까닭”에 “사회영성이 따로 있진 않다”는 지적도 옳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기에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이 인간의 구원과 무관하지 않고,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는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간추린 사회 교리》 60항 참조). 발표자의 지적대로 한국 교회사 안에서 “과도하다 싶을 만큼 덜 강조되어 왔고, 무엇보다 현 단계 한국 교회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까닭에 내면주의적 영성과 균형을 맞춘다는 차원에서” 따로 ‘사회영성’을 지적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영성’이라는 표현은 사실 2011년 가톨릭대학교 김수환 추기경 연구소에서 ‘하느님을 닮은 인간 사랑 -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영성’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 때 쓰였던 것 이외에 한국 교회 안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었습니다. ‘영성’을 찾는 목소리가 많아지는 현대에서 ‘사회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 있도록 이 용어가 자주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발표자는 사회영성의 평가 기준으로 혹은 지표로써 사회 교리의 네 가지 중심 원리와 여덟 가지 주요 가르침을 적용하였습니다. 발표자의 지적대로 계량화된 지표가 아니라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자료로써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특정 시대에서 교회가 민족사의 구체적인 흐름 속에서 이 세상 안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해 왔는가를 전체적으로 평가하는 지표로써 사용하는 데 어느 정도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여덟 가지 가르침 중 세 번째 ‘사랑과 정의의 일치’는 그 개념도 모호하고, 구체적인 역사 시기에 이 가르침을 기준으로 평가한 내용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안에서 어떤 사업을 했는데, 그 사업이 과연 ‘정의’를 전제했는지 아니면 ‘정의 없는 사랑’인지 여부를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입니다. 사실 ‘이웃 사랑’의 개념 안에는 당연히 ‘정의’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정의’는 주어야 할 몫을 정당하게 주는 것을 의미하고 ‘사랑’은 정당하게 주어야 할 것 이상을 더 내어주는 것이라고 그 개념을 구별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의롭지 못한 위선적인 신앙을 경계한다는 의미에서 ‘사랑과 정의의 일치’라는 표현은 사용할 수 있지만, 사회영성의 지표로써 사용하기는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경제 정의’, ‘정의의 열매인 평화’, ‘환경 정의’ 등 발표자가 제시한 다른 가르침들 안에 이미 ‘정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고, 발표자가 강조하는 ‘인권’과 ‘인간 발전’은 ‘인간 존엄성의 원리’, ‘인간의 정치경제적 권리 인정 및 존중’,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에 포함될 수 있으므로 이 셋째 항목은 삭제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사회 교리의 가르침에 ‘문화에 대한 봉사’와 ‘생명의 존엄성 수호’가 평가 지표로써 추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문화에 대한 봉사’는 《간추린 사회 교리》 554항~562항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소비주의와 물질만능주의로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 안에서 신앙과 일상생활이 분리되지 않도록, 또 교회의 가치관과 전통이 현대 사회 안에 현존하며 영향을 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간추린 사회 교리》는 특히 “복음의 영감을 받는 사회 · 정치 · 문화를 건설하는 데에 투신”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사회 정치 참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555항). 또한 오늘날 평신도의 정치 참여는 이들의 참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인권을 침해하는 온갖 차별을 지양하고,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확대하며, 문화적 박탈로 인한 사회적 빈곤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557항).

 

그런데 발표자는 교회가 장면 박사를 지원한 것이 단지 교회의 “생존, 확장, 정치세력화에 대한 관심만 넘쳤을 뿐”이라고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는 듯합니다. ‘문화에 대한 봉사’도 사회영성의 지표로 볼 수 있다면 교회사에서 장면의 정계 진출은 한 평신도 정치인이 자신의 가톨릭 신앙의 이상을 펼침으로써 한국 사회와 정치에 문화적으로 긍정적인 기여를 하려고 했던 측면은 없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생명의 존엄성 수호’ 역시 중요한 사회영성의 지표로서 간주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존엄성 수호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강조해 온 ‘낙태와 산아제한 반대’부터 ‘생명공학의 배아 연구와 조작’, ‘산전 진단과 선별 낙태’, ‘안락사’ 등 인간 생명을 이기적인 도구로 사용하려는 현대의 죽음의 문화에 대응하는 중요한 사회적 활동입니다. 《간추린 사회 교리》 553항은 사회 교리를 바탕으로 활동하는 봉사 영역 중에서 인간에 대한 봉사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임신에서부터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생명에 대한 권리를 확언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의 모든 권리 가운데 으뜸가는 권리이고 다른 모든 권리를 위한 조건”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혼인과 가정을 수호하는 것” 역시 시급한 요구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환자의 줄기세포를 복제하는 연구가 성공했다고 떠들었지만 결국 사기극으로 끝난 2005년 황우석 사태가 우리 사회에 몰고 온 파장은 엄청났고,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던 황우석의 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가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용감하게 지적했던 한국 교회의 목소리는 평가해야 할 중요한 교회사적 사건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후 가톨릭교회가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 참여하여 ‘배아 연구’의 한계를 정하거나, 소위 ‘존엄사’ 입법 시도에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여 관철하는 등 국가의 생명윤리 정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발제문에는 이러한 ‘생명의 존엄성 수호’라는 측면이 단순히 “교리상으로 교회와 국가가 충돌을 일으키는 문제들”(자료집 79쪽)이라고 평가절하하여 다루는 느낌입니다. 생명 문제가 교회가 민족사에 기여하는 사회영성의 지표로써 포함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발표자의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4. 교회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중 “1988년부터 2007년까지” 부분에서 발제자는 교회가 1990년대 들어서 “국가와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을 일상적으로 구사하였다”(자료집 79쪽)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시민사회의 성장”과 함께 “신자들의 중산층화”로 인하여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하여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발제자가 지적했듯이 이 시기는 1987년 민주화 대투쟁을 계기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형식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시기이기 때문에 교회가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내어야 할 사안들이 줄어든 탓이라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교회가 당연히 사회 교리에 따라 행동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중산층화” 때문에 혹은 “국가와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침묵을 지켰다고 본다면, 이 시기에 교회가 적극 대응했어야 하는 구체적인 국가적 의제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특히 발제자는 이 시기에 “교회가 국가의 공적 의제를 거론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면서, “주교회의 산하 정의평화위원회가 1980년까지 쟁점으로 삼았던 민주화와 인권 관련 의제들을 1990년대 들어 거의 다루지 않고… 비교적 온건한 환경 문제 등에 국한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이고, 2001년 대우노조 폭력 진압 사건에서 침묵을 지킨 것도 교회가 “JPIC(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전)로 집약되는 이 시대의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필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 일이 이 시기에 가장 부족한 점”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발제자의 이러한 평가에 본 토론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첫째, 이 시기에는 민주화와 인권보다는 환경 및 농촌 문제와 통일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시기였습니다. 발제자가 사회영성의 한 지표로 지적한 ‘환경 정의’에 있어서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것이 다른 사회 문제에 비해 결코 작은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90년부터 대구의 푸른평화, 서울의 ‘하늘 · 땅 · 물 · 벗’, 인천의 가톨릭환경연대 등 각 교구별로 환경 운동 단체가 생겨났고, 1992년에는 전국환경사제모임, 2001년에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산하 환경소위원회가 창립되었습니다. 또한 1993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타결되면서 우리 농촌 살리기가 사회와 교회의 중요 이슈로 부각되었을 때 각 교구와 주교회의는 가톨릭 농민회와 협조하여 농업 문제 해결을 논의하였고, 1994년 4월 춘계 주교회의 총회에서는 우리 농산물 직매장 설치 운동에 협조하고 전체 교회 차원의 전담기구로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를 결성하기로 결정했습니다(강인철, 《종교권력과 한국천주교회》, 422쪽 참조).

 

둘째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 활동과 관련해서도 정의, 평화, 환경과 관련하여 이 시대의 문제가 필요로 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정평위의 활동 자료를 살펴보면, 매년 12월, 인권 주일 메시지에서 정의, 평화, 인권과 관련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고, 1993년 7월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에 관한 성명서 발표, 1995년에는 ‘지역 갈등’ 관련 세미나 개최, 1997년 대선을 앞둔 시기에는 ‘정치 발전을 위한 호소문’과 신자 교육용 자료집 발표, 1998년에는 IMF구제금융 관련 전국 간담회 개최, 1999년에는 ‘인간 존엄성과 사형 제도 폐지’ 세미나 개최 및 자료집 발간, 2000년 ‘정보화 시대와 인간 존엄성’ 세미나 개최,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한 종단 대표자 모임 시작, 2001년 주교회의 산하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와 환경소위원회 설립,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남북 평화와 화해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개최, 2005년 골프장 건설 붐에 대한 반대 의견 표명 등의 활동을 해왔습니다(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연혁 자료). 주교회의 정평위가 주교들의 자문기구이며, 구체적인 활동을 주도하는 성격의 단체라기보다 각 교구 정평위의 협의체임을 고려할 때 성명서 발표와 세미나, 자료집 발간 등 나름대로 필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봅니다.

 

셋째로, 발표자가 예를 든 2001년 대우노조 폭력 진압 사건과 관련해서도 대우노조원들의 집회 장소와 보호의 장소로 교회가 산곡동 성당과 피정의 집을 제공해 준 것도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교회의 대사회적 활동이고, 폭력 진압이 있었을 때 천주교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강력한 항의를 표시했음에도 교회가 침묵을 지켰다고 표현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 당국이나 정위평화위원회가 모든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고, 정권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사안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 시기에 정의 · 평화 · 인권 ·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필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2008년에서 현재까지”의 부분에서 발표자는 한국 교회가 “4대강 사업, 원자력 발전,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한미 FTA와 같이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쟁점에 대하여 일관되게 진보적 입장을 표명해 왔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지만 진보와 보수의 대립에서 교회가 어느 쪽 편을 든다는 인상을 주는 표현은 바람직하지 않고, 실제로 교회는 그런 측면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2012년 인권 주일 메시지에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이용훈 주교는 “교회는 보수와 진보 중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다만 교회는 보수와 진보를 포함하는 ‘인권’과 ‘사회 교리’에 따라서 그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용훈 주교는 이어서 “교회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 모두가 근본적으로 이러한 복음의 가치를 추구하는 한에서만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고 보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이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거부한다면 그 자체로 허구요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보수와 진보는 대립과 갈등의 구조가 아니라, 서로 보완하고 상생의 길을 찾는 여정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07년 논란이 되었던 사학법 개정과 관련하여 거꾸로 교회는 보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학법 개정을 공개적으로 밝혔고 지금도 그 입장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립학교 교육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국가의 지나친 간섭을 경계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과 혼인의 가치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2008년 이후 소위 보수 정부 정책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하는 것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에서 진보를 지지한다고 말하기보다는 보수 정부의 정책이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 창조질서의 보존(환경)이라는 교회 가르침의 근본 가치를 훼손하고 있고 절차 면에서도 비민주적, 비윤리적이며 폭력적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을 강조하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발표자는 이 시기에 사회영성, 사회사목과 사회복지가 확대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에 동의하면서 이 시기가 전 시기와 구분되는 것은 교회의 리더십의 역할도 있겠지만, 교회 내적인 요인보다는 교회 외적 요소에 의해 교회에 요구되는 일들이 많아졌기 때문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즉 보수 정권이 들어선 이후 4대강 사업, 제주 해군기지 사업, 핵발전소 확대, 용산참사 등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주의와 공동선의 가치를 훼손하고 일방적이고 폭력적으로 밀어붙이는 일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이에 따라 사회 분야에서 불의한 권력에 윤리적 판단을 내리고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교회의 역할도 함께 커졌다는 것입니다. 이 역할을 맡은 주교회의 의장 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주교와 정의 평화, 환경 분야에서 책임을 맡은 교회 지도자들이 현재 그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사회영성의 확장과 교회의 사회참여 확대 현상은 슬픈 일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어둡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발표자의 말대로 “사회영성이 꽃필 때 교회도 민족사 안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한국 교회가 미래를 열어 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정신적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영성 확산의 주체는 교회의 성직자들뿐 아니라 더 많은 일반 신자들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우선적으로 교회의 어느 시기이든 민족사에 참여하는 올바른 사회영성의 확대를 위해서는 교회 지도자인 주교들과 사회사목 혹은 사회복지 분야의 책임을 맡은 성직자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10년 춘계 주교회의에서 주교단 전체가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한 담화문을 발표한 것이 교회 전체의 4대강 사업 반대 운동에 큰 동력을 일으킨 것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교회의 ‘사회 교리’는 복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 등 일관된 도덕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이를 효과적으로 한국의 역사적 현실 안에서 적용하고 그것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들의 리더십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2011년 주교회의에서 대림 제2주일부터 한 주간을 ‘사회 교리 주간’으로 제정함으로써 각 교구에서 ‘사회교리학교’가 확대되고 일반 신자들의 사회 교리에 대한 인식과 교육 열기가 높아졌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가톨릭교회의 사회영성 확산은 제도적으로 사회 교리를 얼마나 신자들에게 효과적으로 교육하고, 사회사목과 사회복지 현장에서 얼마나 실천하고 있느냐, 그리고 실제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한국의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고 사회영성에 따라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회 교리를 통한 사회영성보다는 개인의 기복과 마음의 평화를 위한 ‘내면주의적 영성’이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여러 예비자 교리서가 1992년 교황청에서 사회 교리를 대폭 강화하여 새로 발간한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구조에 따라 개편된 것이 2004년 이후에 불과합니다. 사회 교리의 기본 원리인 인간 존엄성, 연대성, 공동선, 보조성,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 재화의 보편적 목적, 인권,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 생명 존중, 정의와 평화, 문화의 복음화, 인간의 해방과 발전 등과 같은 사회 교리의 기본 개념들이 제도적으로 모든 세례받는 신자들에게 충실하게 교육될 수 있는 신자 교육 구조가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노길명 : 네. 박정우 신부님의 논평에 대해서 박문수 선생님께서 답변을 해 주시겠습니다.

 

 

박문수 : 박정우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신부님께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하여 세 가지로 요약하여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신부님께서 ‘생명 보호’가 사회 교리의 중요 평가 지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아쉽게도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측면입니다. 사회 교리의 사회 정치적 측면을 더 강조하다 보니 이 모든 가르침의 기초가 되는 생명 보호 차원을 간과하였습니다. 보완토록 하겠습니다.

 

‘사랑과 정의’의 일치 지표에 대하여도 사랑이 모든 원리와 가치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니 따로 선정할 필요가 없다는 지적도 고맙게 받아들입니다. 지적에 감사하고 보완토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시대를 구분하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사건을 특정(特定)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들을 제대로 특정하지 못하면 시대 전체에 대한 평가가 왜곡될 수 있어, 되도록 필자의 주관을 개입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당대를 연구한 논문이나 저서들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사건들을 선택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랬음에도 연구자들이 대부분 사회학자, 정치학자들이다 보니 다른 사건들보다 사회 정치적 사건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지적하신 대로 특정 영역이 과(過) 대표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 분야를 연구하는 분들의 논조가 교회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균형을 잃은 것도 있어 다소 편향적 느낌을 준다고 지적하신 점도 인정합니다. 가능한 대로 이 지적들을 참고하여 논조를 다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수정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일관되게 사회 교리에 입각하여 예언 직무를 수행한 것인데, 여기에 대해 ‘진보적’이라 평가한 것이 자칫 특정 사회 세력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한 답변입니다. 물론 진보적이라는 말이 진보주의자들을 지지한다는 의미와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교회의 주장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을 뿐입니다.

 

사실 교회의 입장은 종말론적 상대주의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준에 비춰 보았을 때 완벽한 체제나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교회는 모든 이데올로기와 체제에 대하여 상대적 입장을 취하고, 또 그에 입각하여 이 모두를 비판합니다. 때로 이러한 태도가 특정 시기와 상황에서 그 사회의 진보적 주장과 일치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경우를 가리켰습니다.

 

전체적으로 신부님은 제가 1990년대 이후의 시기를 평가한 부분에 주로 이견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지적들 대부분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또한 인정합니다. 이 지적들을 전적으로 수용하겠습니다. 제안하신 대로 평가 지표들을 조정하고 나서, 새로 설정한 기준에 입각해 재평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길명 : 그러면 오늘 마지막 주제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이라는 발표문에 대한 손희송 신부님의 논평과 질문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손희송 신부 : 먼저 신학생 양성과 신학 연구로 바쁘신 중에도 훌륭한 논문을 집필해 주신 박준양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논문은 현대 세계에서 우리 신앙을 위협하는 요인들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그 분석을 바탕으로 교회가 신앙의 성장과 활성화를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울대교구에서 ‘신앙의 해’의 세부 실천 계획을 기획한 주무 부서인 사목국의 책임자인 저의 입장에서 이 논문은 참으로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님께서는 ‘신앙의 해’가 시작된 2012년 10월 11일 날짜로 발표하신 사목 교서에서 “오늘날 유럽 교회의 신앙을 위협하는 가장 큰 세력은 과도한 과학적 사고방식과 개인주의”(염수정 대주교, <‘신앙의 해’ 사목교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신앙의 해 안내서》, 2011, 16쪽)라고 진단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유럽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 세계를 ‘지구촌’이라는 말로 표현할 정도로 세계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지역의 문제는 다소 시간차를 두면서 다른 지역의 문제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염 대주교님께서 오늘날 신앙의 위기 요인을 정확하게 짚어주셨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를 좀 더 학문적으로 밑받침할 수 없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박 신부님의 논문이 이러한 아쉬움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저 개인적으로는 더욱 반갑고 고마웠던 것입니다. 논문의 주요 내용을 짚으면서 제 의견을 보태는 방식으로 논평을 진행하겠습니다.

 

비교적 긴 논문이지만, 매우 짜임새 있고 논리적으로 작성되어 있기에 이해하기가 크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이 논문은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두 가지 초점을 두고 전개됩니다. 하나는 전 세계적 맥락에서 오늘날 건전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이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에 대한 교회적 대응과 사명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발제자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서 과학주의, 세속주의(혹은 상대주의) 그리고 신영성 운동을 꼽으면서, 이 세 가지는 각기 독자적이면서도 실제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분석합니다. 발제자가 잘 설명한 대로 과학기술 만능주의에 빠져서 종교와 신앙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이들, 또한 과학적 관점만을 배타적으로 고집하면서 종교와 신앙을 적대시하는 이들은 절대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데, 이런 태도는 세속주의 혹은 상대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절대적 진리나 가치를 부정하게 되면 모든 것을 상대화하게 되고, 결국은 개인의 편안함과 안락함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며, 그 편안함과 안락함을 보장할 수 있는 돈에 집착하는 물신주의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이런 이들은 이른바 신영성 운동의 대표주자 격인 뉴에이지가 표방하는 ‘자기만족 추구의 영성’, 즉 고통 없는 ‘안락한 구원’을 약속하고, 어려운 이웃에게는 무관심한 사이비 영성에 큰 매력을 느낍니다. 한마디로 절대자인 하느님을 거부하고 인간은 자신을 절대자로 삼아서 자기만족 추구에 열중하게 됩니다.

 

사실 이런 흐름이 아주 새로운 현상은 아닙니다.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니체로 대표되는 근대 무신론도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들은 근대의 자연과학, 인문과학에 근거해 신은 인간의 투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인간 소외를 초래한 종교와 신은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는 공격적인 무신론을 주창하였습니다. 또한 니체는, 무신론은 신적 권위에 기반을 둔 기존의 윤리도덕과 가치 체계의 붕괴로 이어져서 허무주의로 귀결될 것을 예고합니다(한스 큉, 성염 옮김, 《신은 존재하는가》 1, 분도출판사, 1994, 511~512쪽). 아울러 신을 잃어버린 인간은 ‘초인’(超人), 곧 육체적 건강과 즐거움, 욕망을 추구하고, 전쟁과 투쟁을 불사하며, 증오, 냉혹함, 복수를 찬양하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한스 큉, 같은 책, 517쪽) 니체가 묘사한 초인은 신을 거부하고 자신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인간, 자기만족 추구에 열중하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놀랍게 닮아있습니다.

 

근대 무신론과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 모두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려는 욕심’(창세 3,5 참조)에 빠져서 하느님의 명을 어깁니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 문명에 무조건적 신뢰를 두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서 ‘하느님처럼 되려는 욕심’에 더 취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교묘하게 부정하고 이 세상의 중심이 되려는 욕망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인간은 (아담이 하와에게 탓을 돌린 것처럼) 서로 분열되고 (카인이 아벨을 죽여 없애듯이) 폭력적 다툼에 빠져서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쫓겨난 것처럼) 불행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에게는 마음 깊은 곳에서 피조물이 아닌 창조자가 되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고, 그러한 욕망을 추종하면 결국 불행의 나락에 떨어진다고 경고하는데, 이 메시지는 역사를 통해서 재현되고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발제자는 오늘날 신앙을 위협하는 다양한 흐름과 운동을 소개한 후에 이것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합니다. 발제자가 제안한 대로 우선 이런 흐름과 운동의 맹점과 폐해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비판해야 하지만, 그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자기반성의 자세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성찰은 교회와 신자 개개인의 쇄신과 정화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런 자기반성적 성찰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길이기도 합니다. 공의회는 <사목헌장>에서 근대 무신론은 인간을 “고귀한 천품에서 추락시키는 위험한 이론과 운동”이라고 규정하면서 단호히 배척하지만, 동시에 “교회는 무신론자들의 마음속에서 신 부정의 숨은 이유를 찾아내려고 노력”(<사목헌장> 21항)해야 한다고 천명합니다. 또한 무신론의 발생 원인 중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 반동, 어떤 지역에서는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발이 보태지기 때문이다”(<사목헌장> 19항)고 설명하면서, 무신론의 극복은 이론과 실천을 병행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즉 “교리의 올바른 제시” 그리고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완전한 삶”,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눈에 보이듯이 제시하고 성령의 인도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쇄신하고 정화하는 것”(<사목헌장> 19항)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대응 방식, 곧 비판적 대응 - 자기 성찰 - 자기 쇄신은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모든 흐름과 운동에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발제자는 이런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교회 자신의 정화와 쇄신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몸이 건강할수록 병에 대한 면역력이 높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건강할수록, 다시 말해서 깊은 믿음에 근거해서 사랑과 친교의 공동체가 되어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 굳건한 희망을 걸고 산다면, 신앙을 저해하는 세력에 대한 면역력도 높아질 것입니다.

 

발제자가 강조한 교회의 자기 쇄신에서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순교 정신의 실현입니다. 순교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가장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여 생명을 바쳐 증거한 분들로서, 그분들의 정신이 오늘날 상대주의와 세속주의로 만연된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신자들은 물론 비신자들까지도 이태석 신부에게 감동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 맞게 순교 정신을 실천하여 오직 복음을 절대적 가치로 인정하고 살다가 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103위 성인 순교자들을 모시고 있고, 또한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시성’, ‘순교자 2차 시복시성 운동’,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시성 운동’이 진행 중입니다. 이 모든 것은 교회와 신자들 각자의 순교 정신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세상과 똑같이 외적인 숫자나 규모에 연연하기보다는 정신과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서, 구체적으로 일상의 삶 속에서 순교 정신을 실천해나가는 방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순교 정신을 삶에서 구현하기 위해서는 순교자들처럼 깊고 굳건한 신앙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에 이르기 위해서 한국 교회가 가야할 길은 아직 먼 것 같습니다. 신앙을 기르고 다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발제자가 지적한 대로 한국인의 종교 심성에는 뉴에이지와 같은 사이비 영성 운동에 쉽게 빠질 정도로 감성 위주의 비이성적 신비주의 경향이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앙에는 감성적 요소가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만, 그것은 이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저는 이 관계를 돛단배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받아서 배를 움직이는 돛처럼 감성은 신앙에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반면에 배의 방향을 잡아주는 키처럼, 이성은 신앙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약간 도식적으로 말하면, 서구 교회는 인간의 합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신앙이 식어버렸고, 반면 한국의 신자들은 감성적 차원에 너무 쉽게 끌려서 불안정한 신앙, 미신적이며 광신적인 신앙에 빠질 위험이 다분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발제자가 주장하였듯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안정성과 이성적 합리성의 기반을 다시금 공고히 하는 것”이 시급하고,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도 교리 교육이나 신자 재교육 등이 지금보다는 좀 더 강화되고 다양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한국 교회의 신앙 성숙을 위해 이성적 합리성의 강화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구 교회처럼 이성적 합리성을 과도하게 중시하여 신앙을 식게 만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발제자가 그리스도교 신비사상, 특히 부정신학의 재발견을 강조한 것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많은 현대인이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 문명의 성과를 누리면서도 그 폐해로 인해 영적 갈증을 심하게 느끼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고려할 때 가톨릭교회의 오랜 전통인 신비사상을 새롭게 조명하여 참된 영성 운동이 활성화되도록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참된 영성을 살아가는 이들, 곧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여 ‘우리 마음보다 크신 하느님’(1요한 3, 20)을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마르 12,30) 섬기는 이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참된 영성을 사는 이들이 많아질 때 사이비 영성 운동이 내놓은 ‘불량 영성 상품’에 현혹되어 피해를 입는 이들이 적어질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노길명 : 네, 감사합니다. 신부님께서는 논평이나 질문보다는 보완해주신 의미로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박준양 신부님, 답변 부탁드립니다.

 

 

박준양 신부 : 부족한 후배의 논문을 꼼꼼히 읽으시고 날카롭게 지적해 주셔서 손희송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말씀드릴 것은 없고, 제가 논문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를 정확히 짚어서 논평을 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노길명 : 지금까지 발표자의 발표 내용에 대한 지정토론자들의 질의와 논평, 그리고 그에 대한 발표자들의 답변 내용을 들었습니다.

 

오늘 발표자들께서는 한국 천주교회가 짧은 역사에도 급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은 초기부터 쌓아온 ‘순교영성’과 ‘사회영성’이었다는 점에 동의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순교영성을 바탕으로 민족사에 적극 투신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사회영성을 키워왔습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천주교회는 한국 사회가 나타내는 다종교 상황에서 높은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친화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주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왔습니다.

 

순교영성과 사회영성은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이고 자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최근 그리스도 신앙을 저해하는 흐름이 세차게 밀려오고 있습니다. 과학주의와 세속주의 그리고 개인주의적 영성을 추구하는 흐름과 운동들이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적인 가치와 윤리를 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과 운동들은 교회 안에도 스며들어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선조들로부터 이어받은 신앙을 보존하고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신앙의 순수성을 되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순교영성이란 그리스도 신앙의 바탕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인간의 기본권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투신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참다운 평화가 있게 될 것이고, 세상의 복음화도 촉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흐름과 과제를 검토한 오늘의 학술회의는 나름대로 의미와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됩니다. 좋은 발표와 논평을 해 주신 발표자와 논평자 그리고 끝까지 자리를 함께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면서 오늘의 학술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사 연구 제42집, 2013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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