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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8) 그리스도 안의 가난과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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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13 ㅣ No.910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8) 그리스도 안의 가난과 겸손


온 세상은 보잘것없는 그를 왜 따랐을까?

 

 

- 프란치스코는 복음 속 그리스도 안에서 가난과 겸손을 즉각적으로 발견한다. 그림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아시시 프란치스코 대성당 벽화.

 

 

프란치스코의 초기 형제 중 한사람인 맛세오 형제는 어느 날 프란치스코에게 이렇게 묻는다. “왜 당신을… 왜 세상은 당신을 따라가며, 또 왜 누구나 다 당신을 보고 싶어 하고,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 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려 합니까? 당신은 미남도 아니고, 학식도 별로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귀족도 아닌데, 왜 온 세상이 당신을 그처럼 따르는 것입니까?”

 

 

부족하기 때문에 주어진 소명

 

실제로 프란치스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실제 모습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당시 사람들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이 맛세오 형제의 평가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분명 미남도 아니었고 학식도 부족했고 고귀한 사람도 아니었다. 물론 외모나 학식, 신분만으로 한 인간을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조건들도 특별히 세상의 존중을 받을 만큼 훌륭한 것이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프란치스코 본인도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글에서는 자신을 “보잘것없고 연약한 사람인 여러분의 작은 종”, “무지하고 배우지 못한 자”, “쓸모없고 주 하느님의 부당한 피조물” 등으로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실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형식적으로 자신을 낮춘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을 그런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 인간이 진정으로 자신을 무능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인식한다면 보통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마련이다. 그런 인식은 자신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가치 없는 존재로 규정하게 하고 모든 책임으로부터 도피하게 하며 결국 영혼의 병까지 얻게 한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달랐다.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형제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인도자로서 책임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제들과 추종자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그 소명에 대한 책임감도 점차로 커지고 확실해졌다. 그는 분명한 지도자의 권위를 가지고 다양한 방식을 통해 형제들과 세상 사람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권고하였으며, 특히 형제회가 당면한 문제들 앞에서 누구보다 단호하고 엄하게 충고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 자신의 인간적 능력이나 탁월함 위에 내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 쓸모없음 위에 주어졌다고 이해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소명이 아니라,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어진 소명이라고 받아들였다.

 

 

겸손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 추구

 

프란치스코의 삶 속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지향점은 ‘복음 속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철저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복음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 인격의 어떠한 측면들이 발견되는가? 프란치스코가 즉각적으로 발견한 인격은 다름 아닌 ‘겸손’이었다.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2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신” 성자께서 이 세상에서 취하신 신분은 바로 “종의 모습”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복음 속 예수의 탄생에서 죽음을 관통하는 지극한 겸손을 발견하며 그 겸손 안에서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자유로이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경탄한다. 그리고 그 겸손은 복음서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교회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몸과 피를 기꺼이 내어주시는 성체성사 안에서 생생하게 목격된다. 사제가 하늘 높이 들어 올리는 성체를 바라보며 프란치스코는 그분의 지극한 겸손을 직관하며 온몸으로 전율한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서 사제의 손 안에서 제대 위에 계실 때, 모든 사람은 두려움에 싸이고 온 세상은 떨며 하늘은 환호할지어다! 오! 탄복하올 위대함이여, 지고의 장엄이여,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기까지 이렇게 겸손하시다니!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성체성사 안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겸손은 프란치스코와 교회를 강력하게 결속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겸손에 있으며, 그 겸손 안에서 인간과 하느님은 하나가 된다.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이 ‘작은 형제들’이라고 불리며 언제나 교회의 발 아래 매여 있기를 원하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의 회개 때부터 지혜롭게 자신과 자신의 집을 하느님 아드님의 지극히 높으신 겸손과 가난이라는 든든한 바위 위에 세웠으며 그래서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라 일렀다. … 그분은 형제회를 지극히 높으신 겸손 위에 세웠다. … 그분은 형제회를 지극히 높으신 가난 위에 세웠다. … 그분은 당신 자신을 엄격한 가난과 겸손 위에 세웠다.”

 

 

가장 작은 이를 택한 하느님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프란치스코가 받은 커다란 은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왜 당신을….” 어쩌면 맛세오 형제의 질문을 받은 순간 프란치스코의 마음속에도 같은 질문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왜 나를….” 하지만 이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 그는 곧바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느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그 놀라운 일을 위하여 그 이상 더 천한 피조물을 찾지 못하셨기에 나를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존귀한 자, 아름다운 자, 강한 자,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그래서 만선만덕(萬善萬德)은 창조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결코 피조물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영광과 존귀를 영원무궁토록 받으실 주님 안에서 자랑할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3월 12일, 최문기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유대철 베드로 수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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