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17: 백성에게 희망을 보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25 ㅣ No.1595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17) 백성에게 희망을 보다


부조리한 현실 개탄, 복음 선포 더욱 매진

 

 

청주교구 배티순교성지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 성당의 유리화에 새겨진 최양업 신부 활동상. 가톨릭 굿뉴스 제공.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방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종류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얽히고설켜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비참한 곤경에 빠져도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습니다”(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는 관리와 양반들의 착취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백성들의 궁핍한 삶에 늘 가슴 아파했다. 그는 법을 하찮게 여기는 정치인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그러면서 이런 못난 사람들에게 통치를 받고 있는 불쌍한 백성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대신이라는 사람들은 질투심으로 서로서로 함정을 파는 일만 계속하고, 또 속임수와 교활한 술책으로 임금까지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조선의 현 정세 아래서는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하고 이런 한심한 부조리를 바로잡을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백성은 각종 세금과 수탈과 착취에 짓밟혀 극도의 불행에 빠져 있습니다. 관장이나 관원들이나 포졸들이나 양반들이나 모두 하나같이 가렴주구에 눈이 먼 약탈자들입니다. 가난한 백성은 1년 내내 고달프게 일하지만, 조정 관리들의 탐욕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고작입니다”(같은 편지에서).

 

- 최양업 신부는 외척 세력에 의해 임금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철종을 못마땅해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자료사진.

 

 

최 신부는 임금인 철종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이러한 말이 전국에 떠돌았다. “실제 조선 왕국을 통치하고 있는 이는 죽은 헌종의 조모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이다.” “순원왕후에 의해 보위에 오른 철종은 아무 권한도 권위도 없다.” 실제로 당시 철종은 대신들이 저마다 제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당파 싸움을 하고 있는데도 권위가 없어 어떻게 하지 못하고 손 놓고 있었다. 최 신부는 철종을 “자기 친척 집의 종노릇을 하는 사냥꾼”이라 했다. 

 

1850년대는 지금의 우리 사회와 쏙 빼닮았다. 임금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외척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꼴이 예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는 듯하다. 최양업 신부는 이러한 현실을 “끔찍하다”고 표현했다.

 

“온 나라가 온갖 재앙 때문에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부자, 천주교인, 외교인, 양반, 상민, 강자, 약자 할 것 없이 누구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약자는 강자에게 먹히고, 강자와 약자는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조정의 신하들은 늘 ‘평화, 평화’를 외치고 있지만 계속 노름과 폭음, 추잡한 연회로 자신과 백성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왕은 이름뿐이고 아무 실권도 없습니다. 관리들은 대신들에게 더 많은 돈을 바쳐야 출세합니다. 그래서 바친 돈을 보충하고, 자기 재산을 불리고, 은인들에게 사례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을 수탈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우리 형편이 얼마나 끔찍합니까!”(최양업 신부가 1853년 10월 23일 마카오의 스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 신부는 또 철종이 지관들의 말을 듣고 조상 묘 8기를 이장하면서 백성들을 삶 터에서 쫓아낸 것에 분개했다. 철종은 1855년부터 부친 전계군의 묘와 순조의 묘인 인릉, 익종의 묘인 수릉, 순조의 모친 수비 박씨의 묘인 휘경원 등을 이장했다. 지관들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철종의 조상 묏자리들이 불길해 그 후손들이 번창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명당으로 선정된 한 읍내 주민들이 송두리째 쫓겨나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 철종은 묫자리가 나빠 왕실이 번성하지 못한다는 지관들의 말을 듣고 백성들을 내쫓고 묘를 세웠다. 사진은 오늘날 경기 파주에서 서울 내곡동으로 이장한 인릉.

 

 

최 신부는 그러나 임금이 무능하고 미신에 빠져 있어도, 위정자들이 백성을 위하지 않고 당리당략과 사리사욕만을 챙겨도 좌절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최 신부는 그들을 위해 복음 선포에 더 매진했다. 그리고 조선도 모든 백성이 신분 차별 없이 존중받고 평등한 사회가 되어 재능과 인격만으로 평가받는 나라로 만들 수 있다고 낙관했다.  

 

“조선 사람들은 합리적인 순리에 쉽사리 수긍하고 이성과 정의의 바른길을 잘 파악합니다. 만일 한마음 한뜻으로 백성에게 동일한 이론을 가르치고 계몽한다면 백성들은 쉽게 동의할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계몽을 받아 이에 정통한 자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외교인 양반 중에서도 정신이 건전한 사람들은 양반의 특권이 전적으로 나쁘다고 시인합니다. 이러한 양반 제도가 계속되는 한 조선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질적인 신분 차별은 쉽게 시정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높은 벼슬에 사람을 등용할 때 그 사람의 출생 성분을 따지지 않고, 재능과 인격만 평가해 등용한다면 양반 제도는 강제적인 노력이 없더라도 저절로 쉽게 무너지리라고 생각합니다”(최양업 신부가 1857년 9월 15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 신부는 가는 곳마다 병든 백성들을 만났다. 실성하거나 간질에 걸린 사람, 피 섞인 가래를 토하는 사람, 힘이 빠져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 등 각종 병에 시달리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을 봤다. 최 신부는 병의 원인을 비위생적인 물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물을 정화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최양업 신부는 신자들에게 영원불멸의 내세만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우리 민족이 각자 삶의 자리에서 현실적으로 하느님 말씀을 믿고 구원받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의 사회 구조 안에서 정의와 자유, 평화가 실현돼 백성들이 구조적 악으로부터 해방되길 바랐다. 최 신부는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정수 방법까지 배우려 할 만큼 자애로운 목자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25일, 리길재 기자]



2,77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