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자료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성령은 누구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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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8 ㅣ No.3845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성령은 누구이신가?(Wer ist der Heilige Geist?)

 

 

빈자리 하나 없이 꽉 들어찬 비행기를 혼자서 타본 적이 있으신가요? 너무 비좁아 아마 고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고생은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이미 시작되지요. 출입구에서부터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 자체가 이미 힘겨운 일입니다. 기다려야만 하지요. 자신의 자리를 찾고, 짐들을 내려놓고, 앉을 수 있게 되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드디어 자리에 착석해 안전벨트를 맵니다. 왼쪽 오른쪽, 두 사람 사이에! 거기 그렇게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합니다. 자리는 너무 비좁아서 신문 한 장 넘기는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양쪽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건네기도 난감합니다. 둘 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니까요. 다른 낯선 사람들과 붙어 앉아 있는데, 그들과의 거리는 엄청나게 멉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자주 벌어집니다. 대형마트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선 줄에서, 좌석이 매진된 극장 안에서, 그리고 지하철에서! 이때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와 공간적으로 아주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세상 저편에 떨어져 있습니다. 연관성이라곤 전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얼마 동안 떨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수천 킬로 넘는 거리를 두고…! 통신에 장애가 생겨, 그들은 전화를 할 수도 없고 메일을 주고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까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혼자서 생각합니다. 상대방을 바로 눈앞에 그려봅니다. 서로 함께 있음을 느낍니다. 다시 만나서 함께하게 되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적어보기도 합니다. 마음으로 서로 대화를 나눕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에게 가까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 모든 공간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영 안에서’ 사랑하는 이 바로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비슷한 예들을 우리는 모두 잘 압니다. 공간적으로 아주 가까이 있지만 그 거리는 전혀 좁힐 수 없는 경우! 반대로, 공간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바로 곁에 있는 경우! 이 바로 곁에 있음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처럼 깊은 일치를 이루어줄까요? 물리적으로는 측량할 수 없으며, 그 어떤 파동이나 진동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은 그 일치를! 그럼에도 실제로 존재하며, 그래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그 일치를!

 

 

모든 간격을 이어주시는 성령

 

성령이 누구이신지 알기 위해서는 그러한 경험들이 분명 큰 도움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신앙인들을 서로 이어주는 그 ‘사이’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그 어떤 간격도 다 이어주십니다.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든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든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서로 가까이 존재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의 뜻을 지닐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교회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한 하느님 백성이 되게 해주십니다. 교회 공동체들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해주십니다. 성령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이지요. 우리 각자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서로 다르기도 하고, 원래 본성적으로 공통점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성령께서는 하나가 되게 이끌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업적을 계속해서 펼쳐 나가십니다. 바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기 때문이지요. 성령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은 창조주 하느님의 영이시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은 그렇게 세상을 그 목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물론 성령은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작용들을 보고 우리는 성령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작용들을 성령의 열매라고 일컫지요. 그가 손꼽는 성령의 열매들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친절

 

성령의 이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저는 여기서 ‘호의’(아래에서는 ‘친절’로 번역함 - 옮긴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먼저, 친절과 성령 사이에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물론 당연히 관련이 있지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친절은 겉치레에 그치고 마는 그저 순전히 피상적인 친절이 아닙니다. 그런 친절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에만 목적을 두며, 전원을 켜고 끄듯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만 웃음을 짓고 이내 다시 싸늘해집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친절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을 의미합니다. 다른 이를 위해서, 그를 이해할 수 없을 때조차도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친절은 온유하고 선한 마음과 충만한 애정을 지녔습니다. 다른 이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고, 나 역시 그에게 하느님의 친절을 조금이라도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친절은 용서할 줄 아는 친절입니다. 위로를 건넬 줄 알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며,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는 친절, 다른 이가 존재함을 기뻐하는 친절입니다. 바로 이러한 친절이 성령에게서 오는 친절입니다. 이러한 친절은 상투적이고 애매모호한 인본주의(Humanismus)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 친절은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티토 3,4)라는 빛을 반사하기 때문이지요.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의 입당송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님의 영은 온 세상을 채우시고…” 이 말씀은 본래 지혜서 1장 7절에서 따왔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바로 앞에 “지혜는 다정한 영”(지혜 1,6)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다정한 영, 곧 인간에게 친절한 주님의 영이 온 땅을 채우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과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이 성령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들에게 선사하는 친절을 통하지 않고서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성령에게서 오는 친절을 통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다른 이를 선의와 친절이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에게 좋은 것만을 바라는 사람은 이미 그 자체로, 성령께서 계시고 하느님의 이 영이 세상을 변모시킨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는 사람입니다.

 

 

당신께서 오시도록 청하기를 바라시는 성령

 

성령에 대해 이야기할 때,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 위로 성령께서 어떻게 임하셨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그의 묘사는 눈에 그리듯 아주 선명하지요. 하지만 이에 앞서 그가 묘사하는 또 다른 장면이 있습니다. 곧 그에 따르면, 갓 생겨난 공동체는 늘 다시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사도 1,14 참조). 그들은 하느님께 간청하고, 기도 안에서 기다렸으며, 그렇게 기다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충실히 머물렀습니다. 마침내 성령 강림의 날이 오기까지!

 

이 사실이 루카에게 왜 그토록 중요했던 것일까요? 성령 강림 전까지 이처럼 먼저 열흘 동안이나 공동체가 모여 기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열흘 뒤에 성령 강림이 일어난 것으로 전한다 - 옮긴이). 왜 예루살렘 공동체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성령께서 오시기를 청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어찌하여 성령께서는 당신께서 오시도록 청하기를 바라시는 것일까요?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최고의 자유이시기 때문이지요. 이 때문에 성령께서는, 자유 안에서 당신을 갈망하는 이들에게만 오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곧 정말로 성령을 고대하고 성령께 자신의 전부를 열어 보일 수 있는 자유는 기도 안에서만 달성할 수 있습니다.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광기를 대중에게 강요할 수 있습니다. 협박과 폭력, 압제와 강압, 테러를 통해 밀어붙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도 한 마음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치는 그릇된 일치, 말 그대로 전도된 일치일 뿐입니다. 조작과 억압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일치이지요.

 

반면에 성령께서는 순전한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진짜 사랑은 언제나 다른 이의 자유를 바랍니다. 이 때문에 성령께서는 조용하고 부드럽게, 흔히 나지막이 침묵 가운데 오십니다. 우리의 사랑을 기대하시며!

 

믿는 이들이 자유 안에서 당신을 받아들일 때만 성령께서는 임하십니다. 그분 자신이 자유이시기 때문이지요. 그 어떤 강압도, 그 어떤 협박도 모르는 절대적인 자유이시기 때문이지요.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5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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