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성경자료

[신약] 예수님 이야기26: 세례자 요한(루카 7,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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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8-12 ㅣ No.3775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26) 세례자 요한(루카 7,18-35)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3)

 

 

- 요한 세례자는 광야에서 살면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하고 묻고는 요한을 당신의 길을 준비한 선구자라고 말씀하신다. 사진은 들꽃이 화려하게 핀 봄철의 유다 광야.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루카복음은 나인에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7,17)고 전하고는 바로 이어 요한 세례자와 관련한 두 이야기를 소개합니다.(7,18-35) 하나는 요한 세례자가 제자들을 통해 제기한 질문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요한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간접적으로 당신 자신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시다(7,18-23)

 

요한 세례자가 제자 두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7,19-20)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질문의 배경과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루카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제자들을 보낼 때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루카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기 전에 헤로데 영주, 곧 갈릴래아와 요르단강 동쪽 페래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고 전하지요.(3,19-20) 요한 세례자는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제자들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들었을 것입니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7,17)는 루카의 보도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감옥에 갇히기 전에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설교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혹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면서, 메시아로 오실 그분은 자신보다 큰 능력을 지니실 뿐 아니라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고 손에 키를 들고는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워 알곡은 곳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루카 3,15-18) 이로 미뤄 보면,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를 심판자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요한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3,7) 하고 질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지요.

 

마침내 예수님이 등장하시자 요한은 예수님을 자신이 선구자 역할을 했던 바로 그 메시아라고 여겼습니다. 루카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요한을 찾아오셨을 때, 요한이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고 사양한 것이 이를 말해 줍니다.(마태 3,13-15) 

 

이랬던 요한 세례자가 제자 두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렇다면 이 물음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대한 요한 세례자의 의구심을 드러내는 질문인 셈입니다. 요한이 볼 때 메시아는 심판자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관련해서 들리는 소문은 심판자 메시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에 제자들을 보내 정말로 메시아인지를 질문한 것이지요. 다른 한편으로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 역할을 하지 않고 있어서 좀 똑바로 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제자들을 통해 질문 형식으로 제기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메시아는 심판자인데, 당신은 메시아이면서도 왜 심판자로 활동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좀 해주십시오’라는 항변이 질문에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지나친 비약일까요? 

 

루카는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바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질문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과 눈먼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고 계셨다는 상황을 먼저 전합니다.(7,21) 그런 다음에 예수님의 답변을 이렇게 소개하지요.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7,22)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요한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행하신 일들을 포함해 당신이 지금까지 해오신 활동을 모두 종합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말씀은 부분적으로는 구약의 이사야 예언서 61장 1절에 나오는 예언으로,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 활동 초기에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선포하신 바로 그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두 가지를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당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아이다. 둘째는 메시아로서 당신의 사명은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구원하는 일이다.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이 사명을 수행하시는 것을 직접 본 목격 증인인 셈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따라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요한에게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정식으로 통보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7,23)

 

 

요한에 관한 말씀(7,24-35)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요한 세례자와 관련하여 군중에게 하신 이 말씀은 내용상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요한 세례자의 신원에 대한 내용입니다.(7,24-28) 예수님께서는 요한 세례자가 ‘예언자’일 뿐 아니라 예언자보다 더 큰 인물, 곧 메시아의 길을 닦은 사자, 선구자라고 확인해 주십니다.(7,26-27) 나아가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까지 단언하십니다.(7,28)

 

둘째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짧은 말씀입니다.(7,28) 요한이 이렇듯이 큰 인물이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7,28)는 말씀으로, 무슨 뜻인지 선뜻 와 닿지 않습니다. 「주석 성경」은 이를 ‘하느님 나라의 근본적 새로움’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위대한 인물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근본적인 새로움은 요한의 위대함이 견줄 바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셋째는 이렇게 근본적으로 새로운 하느님 나라가 예수님과 함께 시작됐는데도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7,29-34)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받아들인 백성(세리 포함)과 반대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물리친 이들입니다. 이들은 기뻐 피리를 불 때 춤을 추지 않고 슬퍼서 곡을 할 때 울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은 요한을 두고서는 마귀가 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또 비난합니다. 한마디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고,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7,2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만 그 주님이 혹시 내가 만들어 놓은 틀은 아닌지요? 그래서 주님께 청하면서 내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의심하지는 않는지요?

 

- 나의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엉뚱하게 심지어 정반대로 해석하고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흥겹게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슬프게 곡을 해도 울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는 어떠한지요?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8월 13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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