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종교철학ㅣ사상

죽음에 관한 성찰: 부고와 장례 무엇을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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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24 ㅣ No.406

[죽음에 관한 성찰] 부고와 장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독일 유학 시절에 본 그곳 신문에는 부고가 꼭 한두 면 전체를 차지했습니다. 보지 않을 재주가 없었지요. 한국 신문에는 보통 한 귀퉁이에 작게 실리니 특별한 계기 없이는 들여다볼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독일 신문 부고와 한국 신문 부고

 

독일 신문에 실리는 부고는 하나의 광고라 일반인들도 크게 부고를 내기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내용은 보통 이랬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마리아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녀는 이러저러한 사람이었으며 몇 월 몇 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딸 아무개, 아들 아무개 …’.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비교가 되어서였는지 한국의 부고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네 부고는 돈을 내고 싣는 광고가 아니라 실어 주는(?) 형태이다 보니 그저 몇 줄의 정보가 다인 때가 많지요. 아주 유명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뭔가 유의미한 차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부고의 목적: 망자는 어디에

 

먼저 굉장히 이상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당시 여러 신문 부고를 보니 돌아가신 분의 성함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컨대 ‘아무개(oo주식회사 상무) 부친상, 발인 …’ 하는 식이었지요. 아는 분은 아니지만 돌아가신 분의 성함도 없는 부고, 이건 좀 아니다 싶었습니다.

 

또 하나 이상했던 것은 아들이 두 명, 사위가 두 명인데 딸이나 며느리 이름은 없거나 한두 명만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겁니다. 압권은 ‘아무개(oo방송 PD) 장모상, 발인 …’. 이런 부고였습니다. 딸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 아마 딸이 전업주부이지 않았을까요? ‘번듯한’ 직장이 있는 딸이나 며느리의 이름은 들어가 있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비교하자면 독일 부고는 ‘망자(亡者)’ 중심으로 보였습니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간단히 설명하면서 애도를 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망자의 이를 아래 ‘주부’라고 명시된 경우도 흔했습니다. 애도를 표하는 유족의 이름은 하단에 작게 적혀 있었습니다. 유족의 직장이나 직책이 명기된 경우를 본 기억은 없습니다. 장례미사나 예배 장소가 적힐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더 작은 글씨로 맨 밑에 쓰였고, 마음으로 조문을 바란다는 내용이 따라왔던 것 같습니다.

 

뭔가 다른 것을 보고 듣게 되면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법. 양국의 부고는 우리네 장례 풍경에 대해 성찰하는 작은 계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부고의 목적: 전업주부인 망자의 딸은 어디에

 

형식적으로 우리의 부고는 광고가 아니나, 내용적으로 독일 부고보다 더 적극적인 광고의 성격을 띠는 듯 보였습니다. 독일의 부고가 이러저러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사실과 애도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느낌이 강하다면, 우리의 경우 어떤 어떤 ‘잘 나가는 이’의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그 장례식이 언제 어디서 열리니 가 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지요.

 

그 목적이 가장 중요하니 한정된 몇 줄의 글 안에 가정주부인 딸의 이름을 쓰기보단 직장에 다니는 사위의 이름을 쓰는 편이 ‘유용’하겠지요. 그렇게 주부인 딸의 이름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 아닐까 짐작합니다. 유용성으로 따지면 당연했겠지만, 관계적 시각에서 보자면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한 신문에 이와 관련한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대부분 신문에 적어도 망자의 이름은 명기가 되는 것 같더군요. 다행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의 부고와 장례에는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한 것인가 질문하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애도와 이별, 그리고 일상으로의 복귀

 

물론 나는 장례가 기본적으로 산 자를 위한 일이라는 의견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장례는 산 자가 죽은 자에 대한 애도를 통해 그와 ‘성공적’으로 이별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는 방식을 규정함으로써 관계를 정의하고 사회적 소통의 규칙을 정돈해 주지요.

 

그러나 현재의 혼례에 그러한 면이 있듯, 장례 또한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허울뿐인 형식만 남지는 않았는지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전통적 형식은 껍데기만 어설프게 남고, 현대적 내용은 채워지지 않아 비어 있는.

 

 

우리의 장례,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사회적 맥락에서 장례는 산 자들을 위한 것일 수 있으나 그 의례의 중심에는 분명 망자가 있는데, 오늘 우리의 장례는 애도와 이별의 의식(儀式)이 아닌 ‘행사’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마음이 쓰입니다. 그 성공 여부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그동안 한 부조가 얼마나 많이 회수되었는지로 평가되는 그런 행사.

 

코로나19 사태로 졸지에 성대한 경조사를 치르지 못하게 된 요즘, 이참에 우리 장례 모습의 민낯을 들여다볼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사회적 관성이 있고 그간의 부조금을 ‘회수’해야 한다는 마음을 접기도 마냥 쉽지는 않을 테니 하루아침에 다른 방법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애도와 이별의 의례로서 장례

 

‘엔딩노트’라는 일본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감독의 딸이 아버지의 마지막 날들을 함께하며 그의 인생을 담담하게 기록한 작품이었지요. 자식이 부모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헌사로 보였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누군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병원 장례식장이라는 무색무취의 공간에 모여 육개장 한 그릇 먹고 ‘헌금’을 내고 돌아서는 자리에 비할 수 없는 대단한 헌사.

 

전통이 사라진 자리, 아직 현재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장례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지 조금은 더 ‘과격하게’ 창의적으로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 천선영 율리아나 -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20년 11월호, 글 천선영 율리아나,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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