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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철종 시기(교회 성장): 비신자들의 아이를 거두는 성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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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26 ㅣ No.1294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철종 시기(교회 성장)] 비신자들의 아이를 거두는 성영회

 

 

사회복지란 근대에 생긴 개념이다. 따라서 조선 시대 교회가 사회복지 활동을 했느냐고 물을 수는 없다. 신자들은 그저 눈앞에 있는 가난한 이와 가진 것을 나누고, 병구완했으며, 죽어가는 이들을 거두었다. 그리고 교회는 죽음에 임박했거나 버려지는 비신자 자녀들을 교회 차원에서 돌보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보육원은 프랑스 선교사가 1885년 지금의 서울 명동성당 뒤뜰에 설립한 천주교 보육원에서 시작되었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실상 천주교회에서는 이보다 30여 년 전에 체계적인 고아 양육을 시작했다.

 

 

좋은 씨 뿌려지고, 은총은 열매 맺고

 

1849년 철종이 즉위했다. ‘강화 도령’으로 알려진 철종은 사도세자의 삼남인 은언군의 서손자이다. 은언군의 부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는 신유박해 때 순교했고, 은언군은 이로 말미암아 처형되었다. 예까지 오는 동안 교회는 박해 때마다 지도자들을 잃고, 하느님만이 그 이름을 기억하시는 희생자들을 내었다.

 

신자들의 지상 생활은 곤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씨앗으로 복음 전파에 힘찬 비약이 이루어졌다. 대외적으로는 교황청,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중국 천주교회 등과 관계를 맺었고, 대내적으로는 공소 회장, 교회 서적, 신심회, 다양하고 유익한 사업이 늘어났다. 사회에서는 천주교 가르침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신앙의 자유가 오면 자신도 신자가 되겠다고 마음먹는 이들이 생겨났다. 종종 관리들도 밀고자에게, 교인들이 아무에게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그들을 가만두라고 말하기도 했다. 1850년대에는 신자 약 1만 3천명, 주교 두 명과 선교사 다섯 명이 동시에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죽음에 놓인 외교인 아이를 거두고

 

1854년 무렵 메스트르(Maistre, 1808-1857년, 李) 신부는 성영희(또는 영해회, Sainte Enfance)를 시작했다. 성영회는 1843년 프랑스 파리에서 올봉 장송(Holbon Janson)이 창설하였다. 성영회는 죽음에 임박한 비신자 어린이에게 대세를 주고, 버려진 아이들을 한 명씩 독실한 신자 가정에 맡기고 다달이 양육비를 지원하여 키우는 제도이다. 장래에는 그들에게 생업을 가르치고, 혼처와 일자리도 알선해 주었다.

 

성영회 운영 방식은 세세히 규정되어 있다. 젖먹이들을 위해 유모를 구했다. 양육을 위탁받은 이는 아이를 신실한 신자 자녀로 키웠다. 신부는 공소 방문 때마다 이 어린이들을 직접 만났다. 이 사업을 위해 대세 줄 여성들도 임명되었다. 1859년, 외교인 자녀의 임종 때 대세가 908명으로, 교우 자녀로 영세한 어린이 840명보다 많았다. 이 해 성영회의 어린이는 43명이었다.

 

성영회 사업은 병인박해로 중단되었다가 1880년에 계속되었다. 병인박해가 끝날 무렵 조선에 잠입했던 로베르(Robert, 1863-1922년, 金保錄) 신부는 1884년에 성영회를 시작하여 1885년에 이미 어린이 100명을 부양했다. 초기에는 천주교인들이 아이를 죽여서 질병 특효약으로 심장을 꺼내 쓰려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찾아다닌다는 소문이 비신자들 사이에 퍼졌다. 그러나 곧 교회의 자비로운 의도가 알려졌고, 비신자에게 열린 이 사업은 교회가 사회로 뻗어 나가는 큰 동력이 되었다.

 

한 여인 1885년 말 남편을 잃었는데, 남은 재산은 없고, 아이만 둘이었다. 그 중 한 명은 젖먹이였다. 여인은 두 아이를 모두 기를 형편이 안 되어 하나를 물속에 던지기로 작정했다. 그러다가 천주교인들이 버려진 아이를 정성스레 키운다는 말을 들었다. 여인은 젖먹이를 강보에 싸서 길에다 놓고, 그 옆에 세 살짜리 아이를 앉혔다. 여인은 모퉁이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한 시간쯤 지나자 아이들은 추위에 얼어 더는 울 기력도 없어졌다. 많은 사람이 아이들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반쯤 죽어 가는 아이들 곁에 멈춰서 살펴보더니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곳에서 좀 떨어진 작은 오두막으로 데려갔다.

 

생모는 날마다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구걸하러 갔다. 그는 다음날 다시 올 수 있도록 늘 약간의 쌀만을 얻어 갔다. 며칠 뒤, 두 아이 중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집주인은 아이가 간밤에 이질로 죽어서 그날 저녁에 장례 지낸다고 했다. 생모는 길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장례 행렬을 따라갔다. 그는 묘혈이 흙으로 뒤덮일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다음날 생모는 큰아이를 보려고 다시 그 집을 찾아갔다가, 결국 양육을 맡은 과부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착한 일을 하는 이 종교를 배우고 싶다고 청했다. 교회는 성영회 어린이들을 기르면서 갖가지 은혜를 체험했다.

 

성영회 사업은 신앙의 자유가 찾아오면서 전국 주요 도시로 퍼져 나갔고, 이렇게 교육받은 어린이들은 신자 가정으로 입양되거나 일자리를 찾고 혼인하기에 이르렀다. 남자에게는 목공, 약학, 철공 등의 기술을 습득케 하고, 여자에게는 재봉틀 사용법을 가르치는 등 자립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이들은 교회의 헌신적인 ‘저력’으로 성장했다. 르메르(Le Merre, 1858-1928년, 李類斯) 신부는 자신이 고용한 마부의 며느리가 서울 성영회 출신이라고 했다.

 

성영회 어린이들은 수녀원이 생기면서 수녀들의 보호 아래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녀원과 거리가 멀거나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어린이들은 계속해서 각 신부 책임하에 양육되었다. 이후, 본당마다 동정녀 등이 운영하는 고아 양육 사업으로 발전해 나갔다. 예컨대, 1935년 여섯 명의 동정녀로 시작된 삼덕당 공동체의 정녀들은 이듬해부터 고아 두 명과 할머니 한 분을 돌보기 시작했다. 고아 양육은 천주교의 대표적 활동이 되었다.

 

 

모자라는 비용, 넘치는 고아

 

초기 성영회 비용은 프랑스의 성영회에서 지원되었고, 나중에는 선교 보조비에서 지급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늘 이 비용을 걱정해야 했다. 게다가 개화가 되면서부터 물가 상승이 심했고,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는 원조도 줄었다. 물론, 프랑스 성영회도 정부나 대기업이 운영한 조직이 아니다.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변화가 많았던 시절에 신자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선행을 베풀기 시작한 사업이었다. 그 작은 정성은 우리가 자립해 나가는 마중물이 되었다. 더구나 조선에서 이름 감당했던 이들은 남편이 망나니의 칼 밑에 죽은 모습을 본 과부, 부모가 문교의 화관을 받은 이, 자녀를 하늘로 먼저 보낸 어머니들이었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 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경향잡지, 2020년 9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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