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1일 (일)
(백)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순교자 신심 · 순교자 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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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08 ㅣ No.701

[레지오 영성] 순교자 신심 · 순교자 현양

 

 

제가 사목하고 있는 춘천교구에는 다른 교구에는 없는 특별한 두 기념의 날들이 있습니다. 전임 교구장이신 장익 십자가의 요한 주교님께서 제정하신 두 날입니다. 우리 교구의 초석을 놓은 많은 평신도와 성직자들의 삶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한 평신도와 성직자 추념의 날이 바로 그 날들입니다.

 

1998년부터 10월9일은 춘천교구 성직자 추념의 날로서 매년 교구에서 헌신적인 본당 사목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모든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사목적 열정에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중에는 전쟁 중에 착한 목자로서 끝까지 양들과 함께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으신 착한 목자,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을 비롯한 백응만 다마소, 김교명 베네딕토, 그리고 우리 교구의 초석을 놓으신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순교 선교 사제들 고 안토니오, 라 파트리치오, 진 야고보, 손 프란치스코 신부님뿐만 아니라 순교의 월계관을 쓰지는 않았어도 하느님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한 분들이 있으며 그들은 주교좌 죽림동 성직자, 순교자 묘역에 평안히 잠들어 있습니다.

 

이벽 요한 세례자와 이승훈 베드로 같은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이 한국 교회의 초석을 놓았다면 우리 춘천교구는 교구의 요람인 곰실공소의 산 증인이며 선구자인 엄주언 마르티노를 비롯한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시 1998년부터 마르티노 축일인 11월11일을 평신도 추념의 날로 제정하였고, 신앙 선조들의 모범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복음화를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춘천교구 평신도 사도직협의회에서는 ‘자랑스런 춘천교구 평신도’ 발굴 위원회를 발족하여 계속해서 이런 분들을 발굴하고, 이들의 신앙 모범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 높은 지고지선(至高至善)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일

 

순교자 신심이란 무엇일까요? 몇 년 전에 순교복자회 강석진 신부는 ‘한국 천주교 순교자 신심과 순교자 현양’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 논문에 따르면 순교자 신심은 ‘순교자들이 삶과 신앙을 통해 증거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당대, 즉 현재의 신자들이 본받아 생활 속에서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신심’이고, ‘박해 시기의 순교자들이 하느님과 일치하고,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며, 마침내 죽음까지도 온전히 받아들인 그 모습을 일상 안에서 닮아 가고자 노력하는 신자들의 삶의 자세’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순교자 현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현양(顯揚)’이란, ‘이름 또는 지위를 세상에 높이 드러낸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높이 드러낸다’는 의미를 순교자들에게 붙이는 것은 조금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순교자를 공경하고 현양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영웅적 행위를 한 인물 자체를 드높이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근본적인 이유는 우선 하느님의 은총에 부르심을 받았고, 사랑을 비롯하여 많은 그리스도교적 덕성을 갖추고자 노력했으며,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끊임없는 결합과 일치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 현양은 개인이 죽음을 앞두고 형장 앞에서 보여 준 탁월하고 용맹스러운 행적을 드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순교자 현양의 본래 목적은 개별 순교자가 순교하기 전까지 보여 준 그의 삶과 신앙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고,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을 묵상하며 당대 신자들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순교자 현양은 외적으로 보여주는 요란스러운 행사를 통해 순교자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본받아 우리들 역시 순교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복음을 생활을 증거하기로 촉구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시대부터, 가톨릭 초기 교회 성장의 밑바탕이 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박해받는 종교에서 대제국의 공식종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사랑실천이며, 평등사상이었습니다. 더 높은 지고지선(至高至善)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뜻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선교사가 아니라 서적으로 전해진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과 성장의 밑바탕은 무엇이었는지요? 그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삶의 어려움에 빠진 백성을 위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을 공부했던 유학자들에게 천주 신앙이 제시하였던 평등과 박애 사상은 눈을 번쩍 뜨게 하였습니다. 박해로 인하여 깊은 산속에서 살아갔고, 다른 곳은 흉년이 들어서 굶어 죽는 사람 또한 있었지만, 신앙공동체 안에는 그 어떤 사람도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분들의 삶이 있었으며, 사회 정의를 통한 인류 성숙을 꿈꾸던 70~80년대의 많은 신앙인과 성직자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대두되는 자문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성모님을 공경하는 단원으로서 꼭 한번 이 자문을 진지하게 물어볼 수 있는 순교자 성월이었으면 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9월호, 김주영 시몬 신부(춘천교구 사목국장, 춘천 R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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