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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이주사목] 편견 없이 감싸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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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2-11 ㅣ No.1185

[알아볼까요] ‘편견’ 없이 감싸주기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입니다. 이주사목을 하면서 늘 머릿속에 되뇌는 시입니다. 그냥 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안고 오는 사람. 자신의 전 일생을 지고 오는 방문객. 그 일생이라는 시간 속에서 수없이 깨지고 부서졌을 마음을 가지고 오는 사람. 그런 그를 진심으로 맞이하는 것이 바로 ‘환대’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참 어렵습니다. 진정한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그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 정말로 그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를 도와주기 위해 기꺼이 나를 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로막는 큰 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편견’입니다.

 

부임한 첫해 여름, 아이들과 함께 여름 행사를 치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에게 아이들은 참 낯선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때 함께 했던 아이들 중에 고1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름 행사를 마친 후, 그 아이가 미사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엄마와 함께 미사에 꾸준히 나왔던 아이라서 더 궁금했습니다. 그해 겨울 무렵, 갑자기 엄마와 함께 다시 미사에 나왔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그 이유도 궁금해서 물었지요. “이 녀석아! 그동안 왜 미사에 안 나왔어? 신부님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잘 나올게요.”라는 대답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대답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왜 미사에 와야 하는데요? 저 영어할 줄 모르는데 꼭 엄마 따라서 영어 미사에 나와야 하나요?”

 

 

이주민에 대한 ‘편견’의 큰 형태는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착각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는 그동안 제가 신부라는 이유로, 그 아이가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그 아이를 제가 원하는 신앙인으로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 ‘편견’이었습니다. 그동안 그 아이에게 영어 미사는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요. 그리고 빠지지 말고 나오라는 제 말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요. 신부이기에 신앙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를 전해야하는 제가 오히려 그 아이에게 짐을 지운 꼴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며칠을 고민한 끝에 아이들을 위한 한국어 미사를 만들었습니다. 비록 한 달에 한번이지만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이런저런 프로그램도 진행하면서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재미를 찾아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나고 싶은 하느님을 찾아주는 일 말입니다. 그 아이도 다행히 미사에 잘 나오고, 고3이 되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신앙인으로도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주민들을 대하면서 선주민인 우리가 가지는 가장 큰 실수가 바로 ‘편견’이 아닌가 합니다. “이곳에 살러 왔으면 이렇게 해야지”, “여기서 일하려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 “한국에 시집왔으면 한국 사람으로 살아야지.” 물론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맞는 말입니다. 이곳에 와서 돈을 벌려면, 또 결혼해서 살려면 한국법을 따라야 하고 이곳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국말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흔히, 우리가 이주민들에 대해 가지는 ‘편견’의 가장 큰 형태는 바로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착각입니다.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조건을 상대방이 맞춰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주민인 그가 이곳에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태어난 곳이 다르고, 배운 언어가 다릅니다. 살아온 사회가 다르고, 자라난 문화가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곳에 온 순간부터 이주노동자가, 결혼이주여성이 한국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아니, 강요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나라에 돈을 벌기 위해 혹은 결혼해서 살기 위해 갔는데 그곳 사람들이 여러분을 그렇게 바라보고 대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주민이 이곳에 와서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주민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주민인 우리에게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언제든지 한국말이 어려운 그들의 이야기를 인내로 들어주고,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몇 번이고 가르쳐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기에 그들을 사랑할 의무 있어

 

지난 9월 29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제105차 세계 이민의 날 미사를 봉헌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현대 세계에서는 엘리트 의식이 점점 더 높아지면서 배척받는 이들을 향한 잔인함도 연일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특권을 누리는 극소수 시장들의 이익을 위하여 개발도상국들의 뛰어난 천연 자원과 인적 자원은 지속적으로 고갈되고 있습니다. 전쟁은 세계 일부 지역에만 해당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지역들은 전쟁을 일으키는 무기를 제작 판매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분쟁으로 양산된 난민들을 받아들이기 꺼려합니다.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은 늘 작은 이들, 가난한 이들, 가장 힘없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식탁에 앉지 못하고, 잔치 식탁의 ‘부스러기’만 차지할 뿐입니다(루카 16,19-21 참조).”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민족과 언어, 문화와 얼굴색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고귀함은 그 사람의 출신이나 언어, 피부색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많은 이주민을 그들의 출신, 언어, 피부색으로 판단하고 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무서운 ‘편견’인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 편견이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엘리트 의식에서 나오는 인간의 잔인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안위를 지나치게 지키려고 함으로써, 어려움 중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더 정의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지상의 재화를 누릴 수 있는 세상, 모두가 인간으로서 그리고 가족으로서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세상, 모두에게 기본 권리와 존엄이 보장되는 세상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이주민은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우리가 사는 이곳으로 온 어려움 중에 있는 형제, 자매입니다. 그들도 여러분과 똑같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내가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기에 그들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으며, 내가 사랑받고 있기에 그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여러분의 ‘편견’을 지워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에서 살기 위해 자신의 인생이라는 시간 속에서 수없이 부서졌을 그들의 아픔을 연민으로 감싸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그 마음이 ‘환대’가 되어 그들에게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12월호, 황규진 세례자 요한 신부(전주교구 이주사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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