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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천주교와 한글: 한글로 피워 낸 그리스도교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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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0-30 ㅣ No.1061

[경향 돋보기 – 한국 천주교와 한글] 한글로 피워 낸 그리스도교 신앙

 

 

“한문의 음에 한글 토를 달아 외우는 기도문이 주문과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도 알아들을 수 있는 한글 기도문이 필요합니다.” 

 

1787년 어느 기록에 나타나는 이 장면은 때때로 나의 경험이 되곤 한다. 외국 여행 중에 현지 성당 미사에 참례할 때 그렇다. 미사 통상문에 따라 한글로 미사를 드리며 무슨 내용인지를 짐작하지만, 온통 주문을 외우는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 든다. 이 연장선에 서면, 초기부터 한국 천주교회가 한글로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키워 냈는지 궁금해진다.

 

 

신앙의 물길을 연 한글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의 직접적인 활동 없이 평신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조선인을 신앙으로 초대한 문은 선교사들이 저술한 한문 서학서였다. 신앙이 조선 사회에 확산됨에 따라, 한문을 모르는 대다수 신자를 위한 번역의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대두되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재빠르고 효과적인 번역과 편집 활동으로 신자들의 기도와 영성 생활을 도왔다. 

 

1784년 한국 교회가 시작된 뒤 한글로 작성된 기도서와 교리서 등이 1787년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여럿 발견되었다. 1787년 4월에 작성된 「일성록」과 1788년 1월 10일자 「벽위편」에 실린 홍낙안의 상소문에는, 여신자들이 한글로 작성된 책자를 귀중히 여긴다는 기록이 있다. 책의 종류와 확산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들도 있다. 박종악이 정조에게 올린 1791년 12월 11일자 편지에는 한글로 쓰인 「십계」를 태웠다는 내용이 있고, 1792년 1월 3일자 편지에는 홍낙민이 서학서를 번역했음을 알려 주는 대목이 있다. 번역 정도를 알려 주는 자료는 신자들의 집에서 압수된 책의 목록과 권수를 기록한 「사학징의」에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신유박해(1801년) 즈음에 조선으로 유입된 120종의 한문 천주교 서적 가운데 65퍼센트 이상이 번역되었다.

 

천주교와 한글은 서로의 확산 촉매였다. 먼저, 한글은 신앙을 전파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박종악의 편지에는 교우촌의 생활을 전해 듣고 천주교에 관심을 표하는 사람들에게 한글로 작성된 책을 전해 주며 선교하였다는 대목이 나타난다. 또한 천주교는 한글을 확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 신자들이 능하게 하는 세 가지 일 가운데 첫째로 한글 사용을 꼽았다. 이는 한글 사용이 천주교를 통해 확산되었음을 보여 준다. 한글은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였기에 선교사들은 전교 회장들에게 신자들의 한글 교육을 권고하였다. 조선대목구 최초 사목 교서인 ‘장주교윤시제우서’(1851년)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언문이나 진서를 가르치면, 도리를 밝히기에 긴요할 것이요, 영육에 큰 이익을 받을 것이니, 이를 위하여 간절히 권하노라.”

 

한편, 한글은 시대와 문화를 아울러 신앙 안의 일치를 이루어 낸 견인차였다. 사회 계층과 출신 지역을 불문하고 신자들은 교우촌에서 한글로 신앙을 키우며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한글의 장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주저함 없이 한글을 교회 공식 언어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선교사들과 함께 박해로 망실된 서적을 새로 번역하거나 기존의 한글 교리서들의 오류를 시정했다. 또한 새로운 책을 번역하여 신자들이 사용할 교리서와 기도문 등을 제공했다. 교회 내의 평신도 지식인들이 헌신적으로 동참했다. 이 서적들을 통해 신앙생활의 활력소를 제공받은 신자들의 모습은 달레 신부의 「조선교회사」를 번역한 「한국 천주교회사」의 다음 구절에서 확인된다. “조선 말로 된 장례식 기도문과 예절을 공포한 뒤로 많은 신자가 외교인을 상관하지 않고 그것을 공공연히 행하기 시작했습니다”(상권, 348면).

 

 

그리스도 신앙 체험의 창을 열어 준 한글

 

뜬금없는 상상이지만 “한글에 한울님이 없었더라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수용이 조금 더디지 않았을까?” 하고 묻곤 한다. 모든 경험은 역사 안에서 경험되며 동시에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종교 심성이 깊은 조선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처럼 신속하게 흡수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실천할 수 있는 창은 분명히 한글이 제공했다. 한글은 우리 역사 안으로 다가오신 하느님을 알아보고 자신을 봉헌하며 구원에 다다르는 창을 열어 주었다.

 

조선 천주교회는 번역 작업에 그치지 않고 신앙 서적을 저술했다. 그중 「주교요지」와 「상재상서」는 신학사의 큰 획을 그은 저서로 꼽힌다. 이와 더불어 「성찰기략」이나 「회죄직지」와 같이 프랑스 선교사들이 평신도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저술한 여러 서적이 있다. 이 책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가 자신의 감성과 행동을 성찰하며 완덕을 향해 매진한 신앙 여정의 종점임을 알려 준다. 한글이 아니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과 멀어지는 습성과 감성 등을 그토록 세밀하고 예민하게 잡아낼 수 있었을까 물으며 새삼 한글 서적의 힘을 실감한다. 

 

한글은 한국 교회를 통해 아름답고 훌륭하게 실현된 신학 토착화의 작업을 보여 준다. 한글 교리서의 저술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한글의 옷을 입는 사건을 뛰어넘는다. 긴 역사 동안 초월의 신비를 향해 방황하던 한민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고백하며 안착했다. 조선 신자들은 이전에도 한민족의 역사 안에 활동하셨던 하느님을 비로소 아빠·아버지로 부르며 지극한 충효로 자녀의 길을 걸었다. 그 열매로 순교자들이 탄생했다. 순교자들의 삶은 신앙과 따름이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고통과 어둠의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하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로써 전체 교회는 하느님의 신비와 역사의 완성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한편, 한글로 고백하는 신앙의 전환적 의미는 「주교요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주교요지」는 신자들 사이에서 ‘걸어 다니는 교리서’로 알려졌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1798년경에 저술했다. 그는 한문 서학서를 연구하며 동시에 교리를 쉽게 알려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고민했다. 그 노력으로 탄생한 「주교요지」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표현으로 삼위일체론을 포함한 신학 논제들을 설명했다. 이로써 형이상학과 윤리학, 종교학을 담아내는 한글의 숨겨진 가치가 드러났다. 이 때문에 세종대왕이 한글을 ‘발명’했다면, 정약종은 한글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 천주교회의 첫 사제였던 주문모 신부는 「주교요지」를 교회 내 공식 교리서로 채택했고, 이후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도 「상재상서」와 함께 「주교요지」를 교리서로 활용했다. 그런데 한문으로 작성된 「상재상서」가 중국 교회에서 중국인을 위한 보조 교리서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의 신앙 체험이 한문 문화권의 공명을 이끌어 선교를 확장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인의 신앙은 예루살렘과 조선 사이에 놓인 엄청난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문화와 역사의 간극을 넘어서면서 세계 교회에 밝은 빛을 던졌다. 

 

 

복음화의 길을 열어 준 한글 

 

조선 사회에 그리스도교가 유입된 계기는 유학의 이상향인 대동 사회를 실현하려는 열망이었다. 젊은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원초 유학 안에서 새로운 사회 철학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인격신을 설명하려고 원초 유학에 기댔던 한문 서학서를 만나게 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 사회 하층민들 또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정감록이나 미륵 신앙에 기대던 갈망이 유학자들의 열정과 공명을 이루었다. 한글은 신자들이 신분과 성별을 떠나 같은 희망을 신앙 안에 품으며 ‘함께 걸어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한글은 인간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귀하며 윤리적 실천의 주체임을 알려 주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진리와 윤리, 감성, 인간 간의 상호 관계를 식별하는 기준 자가 되었다. 신자들은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를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거부했다. 여성들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 주는 존재를 벗어나 완덕의 길로 부름받은 귀한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했다. 그들은 하느님 사랑과 형제 사랑을 동등하게 보았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서 진정한 위로와 희망을 발견했다. 또한 그들은 교우촌에 모여 서로를 섬기며 동등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앙 여정을 걸어갔다.

 

신앙 안에서 행한 이러한 선택과 결정은 당대 유교 사회의 가치관과 충돌했고 그들은 사회 저항 세력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도 신앙의 불씨를 끌 수 없었다. 조선 후기를 사로잡았던 ‘새로운 세상’의 꿈은 이 빛 안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었다. 사랑과 섬김, 나눔을 증언한 교우촌의 삶은 조선 사회의 어두움을 서서히 몰아냈다. 온갖 차별과 가난으로 고통받던 이들에게 교우촌의 삶은 천국 그 자체였다. 정약종의 머슴이었지만 교우촌에서 그와 형제로 살아간 백정 황일광이 증언한 두 개의 천국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룰 때 열리는 천국의 문을 말해 준다. 이로써 그리스도교의 미래적 희망은 현재화되었고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펼쳐졌다. 바오로 6세 교황은 교회가 실천해야 할 ‘복음화’를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상반되는 모든 것을 복음의 힘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가르친 바 있다(「현대의 복음 선교」, 19항). 이 복음화가 이미 2백 년 전 동아시아의 고요한 나라에서 실천되고 있었음이 사뭇 놀랍다.

 

자생적으로 세워진 한국 천주교회는 역사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한글로 ‘하나’된 평신도와 사제의 협력에서 ‘함께 가는 신앙’을 발견한다. 한글은 사목자들에게 평신도의 신앙 감각을 투명하게 전해 주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한글을 통해 사도행전에 그려진 공동체를 조선 사회 한 편에 재현시켰다. 한글로 피어난 복음화의 꽃은 순교의 열매를 맺었다.

 

* 권영파 베아트리체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10월호, 권영파 베아트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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