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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102: 20세기 (6) 토마스 머튼과 마더 데레사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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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2-03 ㅣ No.1271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02) 20세기 ⑥ 토마스 머튼과 마더 데레사의 영성


타 종교에 대화의 손길 내밀고, 가난한 이들의 손 잡아주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영성가를 선뜻 선택하기란 무척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직 그의 삶이 진행형이거나 평가가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머튼과 마더 데레사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20세기 영성가일 것입니다.

 

- 토마스 머튼.

 


공동선을 추구하며 타 종교와 대화한 머튼

 

프랑스 피레네 산맥 동쪽 프라드(Prades) 출신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던 뉴질랜드 태생의 영국 화가 오원 머튼(Owen Merton, 1887~1931)과 미국 퀘이커(Quaker)교도 예술가 룻 캘버트 젠킨스 머튼(Ruth Calvert Jenkins Merton, 1887~1921) 사이에 태어나 영국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고, 몇 달 후에 외조부가 사는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1933년에 영국 케임브리지(Cambridge)대학교의 클래어(Clare)대학에 입학했다가 1934년 미국 뉴욕 주 컬럼비아(Columbia)대학교에 다시 입학한 머튼은 1938년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접하고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차차 수도 성소에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1941년 켄터키 주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겟세마니 수도원에 입회한 머튼은 1944년 첫서원을 하고 1949년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머튼은 1948년에 출간한 자서전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이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키면서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국제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1965년부터 수도원 근처에 은수처를 마련하고 은수생활을 시작한 머튼은 1968년 태국 방콕에서 수도생활에 대한 회의에 참석해 강연하고, 숙소에서 전기에 감전돼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머튼은 수도생활 초기 10여 년간 세상과 단절하고 속세를 벗어나 하느님과 일치하는 관상생활을 추구했습니다. 이 시기에 머튼은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수덕신학과 신비신학 연구를 통해 수도신학을 소개함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수도생활을 동경하게 하였습니다. 머튼은 수도생활 중기 8여 년간 수도원이 세상과 분리된 거룩한 곳이라는 편견을 깨고 관상과 활동에 조화를 이루는 수도생활을 추구하면서 독창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머튼은 관상생활이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평신도 그리스도인을 비롯하여 비그리스도인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타 종교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머튼은 수도생활 후기 8여 년간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비평하는 활동가로서 비폭력과 평화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머튼은 동양 종교가 추구하는 명상의 삶과 그리스도교 관상생활과의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본질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국, 머튼은 통합적이고 사회 참여적이며 종교 간 대화를 추구하는 관상생활을 강조했습니다.

 

머튼은 2000년 역사 안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교 신비체험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공허함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머튼은 소외된 자아 안에서도 하느님의 모상인 참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체험을 강조했습니다. 신비체험 전통에 바탕을 둔 수도자 머튼의 영성은 차차 평화와 정의를 찾아 활동하는 예언자적 영성으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머튼은 그리스도인의 대사회적 활동을 비폭력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강연과 저술 활동을 했습니다. 타 종교와도 많은 교류를 한 머튼은 동방 종교에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보편성을 지닌 영성을 추구했습니다. 사색보다 직관에 매료된 머튼은 ‘선(禪)불교’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마더 데레사.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 마더 데레사

 

오스만제국이 점령했던 현재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Skopje)의 알바니아계 가톨릭 신자 가정 출신인 마더 데레사(Mother Teresa, 1910~1997)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신앙교육을 충실하게 받았으며, 성인들, 특히 뱅골(Bengal)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전기를 즐겨 읽으며 깊게 감동했습니다. 1928년에 데레사는 기도 중에 선교 활동을 위한 수도 성소에 소명이 있다고 확신하고 본당 신부와 의논한 끝에 인도, 콜카타(Kolkata)에서 선교 활동 중이었던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의 ‘로레토 수녀회(Sisters of Loreto)’로 알려진 ‘복되신 동정 마리아 수도회(Institute of the Blessed Virgin Mary)’에 입회했습니다.

 

1929년 인도, 다르질링(Darjeeling)에서 수련기를 시작해서 1931년 유기서원을 한 데레사는 콜카타로 이동해 로레토 수녀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37년 종신서원을 한 후에도 교사직을 수행하다가 1944년 학교장에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늘 콜카타의 빈민들을 목격하던 데레사는 1946년 대피정을 하러 다르질링으로 가다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을 돕는 새로운 소명을 깨닫는 체험을 했습니다. 결국, 1948년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를 떠나서도 수도자로 살 수 있는 허락을 받은 데레사는 기초 간호 속성 과정을 이수하고 콜카타의 빈민가로 들어갔습니다.

 

1949년 이미 데레사와 함께하겠다는 지원자가 있었으며, 교황청은 1950년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 설립을 승인했습니다. 1953년 사랑의 선교회 본원을 설립한 데레사는 1952년 ‘임종자의 집’을, 1955년 어린이 보호시설인 ‘때의 집’을, 1968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공동체인 ‘평화의 마을’을, 그리고 1975년 회복 가능한 환자들을 위한 장기 요양소 ‘사랑의 선물’을 개설했습니다.

 

한편 1963년 마더 데레사는 안드레아 수사와 논의해 호주에서 ‘사랑의 선교 수사회(Missionaries of Charity Brothers)’를 설립했으며,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PP. VI 재임 1963~1978)는 교구 설립 수도회였던 사랑의 선교회를 세계 모든 나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수도회로 인준했고, 1969년 교황청은 ‘사랑의 선교회 협조자회’ 설립을 승인했습니다. 또한, 1976년 사랑의 선교회의 관상 수녀회가, 1979년에는 관상 수도회가 추가로 설립되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1981년 사제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몸 운동(Corpus Christi Movement)’을 창설했으며, 1984년 랭포드(Joseph Langford) 신부와 함께 ‘사랑의 선교 사제회(Missionaries of Charity Fathers)’를 설립했습니다.

 

마더 데레사의 영성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봉사하려는 정신입니다. 물질적 가난은 의식주에 대한 기본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기에, 물질적 궁핍을 해결해 주는 방식으로 도울 수 있겠으나, 영적 가난은 사랑의 결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해결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방치하게 되면 개인과 가정, 사회가 병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데레사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그들의 영적 가난을 해결한다면 물질적 가난도 함께 해결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마더 데레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 활동은 선교 사명을 실천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되기에 기도생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자신의 고유함을 너무 강조하면서 배타적인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선교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가톨릭교회가 다른 종교와 세상에 과도하게 개방적인 자세로 다가간다면, 믿음을 잃고 이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 가톨릭 영성은 끊임없이 도전받고 평가받을 것입니다. 올바른 영성을 위해 심사숙고하는 자세가 더욱 필요한 시기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2월 2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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