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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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그륀 신부의 계절 편지: 아름다움을 통하여 오는 구원과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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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06 ㅣ No.1237

[그륀 신부의 계절 편지] 아름다움을 통하여 오는 구원과 치유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말했습니다. “지나간 모든 것이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웠다.” 신학은 진리와 선을 숙고했지만 아름다움은 소홀히 했습니다. 그리스 교부들에게 하느님은 근원적 아름다움입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빛납니다. 시편은 거듭해서 하느님의 영광과 피조물 속에서 빛나는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찬미합니다. 플라톤은 아름다움과 사랑을 결합니다. 아름다움은 우리 안에서 사랑을 이끌어 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우리 안의 사랑을 이끌어 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아름다운 성당에 매혹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존재가 되길 갈망합니다. 성형수술이 점점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모든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저는 다른 이를 사랑으로 바라볼 때 그가 풍기는 아름다움을 알아차립니다. 스스로를 미워하는 사람만이 추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무얼 하든 밉게 보이는 법입니다. 아름다움은 영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을 하느님이 창조하신 유일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사랑스럽게 바라볼 때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치유한다”고 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일상에서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려고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드레스덴 미술관을 찾아 「시스티나 성모」란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우리에게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필요합니다. 조각품, 회화, 성당의 아름다움, 전례의 아름다움 또한 우리에게 이롭습니다. 세속 작가도 아름다움은 영혼의 고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에서 우리의 참 존재와 하느님께서 인간 각자에게 불어넣으신 그분의 의도를 알게 됩니다.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가 형제자매가 될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 안에 아름다움을 심어 놓으셨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서로 이어 줍니다. 아름다움은 또한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을 서로 이어 줍니다. 모든 인간은 아름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름다움에서 하느님에 대한 무언가를 느낍니다. 아름다움은 하느님이 이 세상에 새겨 넣은 자신의 흔적입니다.

 

아름다움을 숙고할 때이면 나는 시몬 베유의 생각에 동감합니다. 시몬 베유는 프랑스인자 유다인이었고 노동 문제에 헌신했으며 가톨릭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교 사상에 침잠했습니다. 시몬 베유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은 신성이 표현된 것이었고 하느님의 강생하심이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에게서 아름다움이 구체화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몇몇 교부들은 시편 45장의 구절을 떠올리며 예수를 ‘어떤 사람보다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시몬 베유는 아름다움을 ‘물질에서 드러나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미소’라 불렀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에서, 피조물의 아름다움에서 우리는 예수의 부드러운 미소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미소 짓고 있습니다. 아름다움 안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사랑스럽고 웃는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몬 베유에게 아름다움의 영성은 강생의 영성, 즉 그리스도교적 영성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은 육체 안에, 물질 안에 이미 하느님이 계시되었음을 가리킵니다. 물질에 하느님의 아름다움이 계시된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은 인간 예수 안에서 응축되고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빛을 발합니다.

 

시몬 베유에게 아름다움의 영성은 선교적 영성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인지한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를 때, 아름다움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 메시지에 관한 내용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한 종교일치 영성입니다. 모든 종교가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모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아름다움에 접촉함으로써 결국 하느님을 만납니다. 아름다움은 하느님과 하느님 체험을 말하는 출발점입니다. 사람들에게 이를 교의적 문장으로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아름다움을 통해 드러내시는 근원적 아름다움인 하느님을 향한 길에 함께 서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 역시 필요합니다.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고 감탄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놓아주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없고 다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독일어 ‘아름다운’(schön)은 ‘소중히 하다’(schonen)에서 왔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소중히 여겨져야 합니다. 주의 깊게 다루고, 그것을 경탄하며 바라볼 때 자아는 사라집니다. 독일의 작가 마르틴 발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이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자기’(selbst)에서 벗어납니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서로 연결합니다. 우리는 음악회의 아름다움, 전례의 아름다움을 함께 보고 즐깁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경탄함으로써 모든 것을 소유하고 독점하고 싶은 자아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우리를 온통 사로잡고 영혼 깊은 곳에서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아름다움에 완전히 빠져 보고 듣고 있을 때 우리는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아름다움은 하느님을 향해 우리를 깨뜨립니다. 아름다움은 또한 우리를 하느님께 이끕니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하느님께 향하게 합니다. 시몬 베유는 “세상의 아름다움보다 하느님을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이 참된 영성의 표현입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름다움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주고 받는 사랑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독자들께서도 여러분의 삶에서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기를 바랍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예술의 아름다움, 음악의 아름다움, 전례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에서 당신을 느끼게 합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가 아름다운 일을 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할 때 근사한 분위기를 만드는 일과 같은 것 말이지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과 다른 이의 삶을 아름답게 하고, 아름다움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8년 여름호(Vol. 42), 글 안셀름 그륀 신부(성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번역 김혜진 클라라(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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