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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마태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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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491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마태 5,7)

 

 

기도와 영적 투쟁으로 네 번째 단계에 도달한 영적 정화가, 매일 저지르게 되는 죄까지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닙니다. 곧 미사 도입부에서 우리가 고백하듯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짓는 죄까지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죄가 크지는 않지만, 작은 죄가 쌓이면 심각한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기도와 희생이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지만, 가장 효과 있는 치료약은 이웃에 대한 자비입니다.

 

 

남이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기

 

자비는 외적 상황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선한 의지의 보편적 성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비로운 이들은 이웃의 불행 앞에서 마음을 움직여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그들이 불행에서 해방되도록 도와줍니다. 바로 여기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의 연대성이 자리합니다. 이웃의 고통이 마치 내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동일화가 일어납니다.

 

더욱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 자신을 미워하는 이들을 선善으로 대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자비로운 마음이 충만할 때 가능합니다. 큰 악행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치료제가 있습니다. 곧 우리가 용서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용서하는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을 때 도움을 원하는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타인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자비가 마음의 정화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을 행하면 당신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신에게 이루어지도록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하십시오. 사실 당신은 풍요롭고 동시에 부족합니다. 곧 당신은 현세적 재화로 부유하지만 영원한 재화를 필요로 합니다. 당신은 한 걸인의 목소리를 듣지만, 당신 자신도 하느님의 걸인입니다. 그가 당신에게 청한다면, 당신 역시 청하십시오. 당신이 청하는 이에게 행동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자신에게 청하는 이들에게 행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가득 차 있으며 동시에 텅 비어 있습니다. 비어 있는 이를 당신의 충만함으로 채우십시오. 당신의 비어 있음이 하느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지도록 말입니다”(<강론> 53,5,5). 결국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청을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것을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위로의 말이나 위안은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용서하는 것

 

자비로운 이들은 성령칠은 중 ‘의견(라틴어 consilium)’을 받습니다. 이는 우리가 상위의 존재에게서 도움을 받지 않으면 고통의 사슬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상위의 존재에게 도움 받기를 희망하는 이는, 자신이 남보다 강할 때 연약한 이들을 더 도와줄 수 있습니다.

 

아울러 자비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청원과 연결됩니다. 용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에게 잘못한 이가 더는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잘못한 형제를 해방해 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규칙서>에서 용서는 두 가지 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에페 4,26)라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에 따라 빨리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노가 증오로 바뀌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분노는 단순히 어떤 사람에 대해 화가 난 것을 표현하지만, 증오는 다른 차원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기에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할 때, 진실한 마음과 언행일치로 이 기도를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쟁이요 하느님과의 계약을 깨뜨리는 사람이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군가 용서하지 않으면서 이 기도를 바친다면 ‘나는 이 사람을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 나만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되겠지요.

 

사막 교부의 금언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스승님, 기도하는 데 너무 분심이 들어서 힘듭니다.” 스승이 제자를 데리고 나가서 “네 겉옷을 벗어서 바람을 막아 보아라”고 합니다. 못 막는다고 하자 스승이 이렇게 말합니다. “마찬가지다. 기도 중에 오는 분심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분심을 따라가느냐 따라가지 않느냐는 네가 결정할 수 있다.” 결국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거나 내 마음에 상처가 남아 있다면 그때부터는 그 사람이 아니라 나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에 상처가 나면 그 경중에 따라 약을 바르거나 병원에 가서 치료합니다. 그리고 상처가 다 낫고 흉터가 없어질 때까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왜 내 마음에 있는 상처는 외면할까요? 용서라는 단어에는 ‘떠나보내다’, ‘사슬을 끊고 놓아 주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정말 우리를 망치는 것은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준 상처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와 원한과 쓰라림의 독입니다. 이러한 감정이 현재의 행동을 조종하고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용서는 단순히 복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아프게 한 사람에게 선을 기대하는 사랑의 행위이며, 나를 해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용서는 믿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용서를 받아야 하고 용서해야 하며, 내가 나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존재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타인에 대한 사랑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며, 자비로운 사람들은 자비를 베풀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비를 입습니다.

 

* 변종찬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부학과 고대 · 중세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 이 글은 ‘하느님께 오르는 사다리 - 진복팔단’이라는 제목의 강의 내용을 편집부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9월호(통권 462호), 변종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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