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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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노동사목] 창조주의 활동에 참여하는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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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03 ㅣ No.1095

[오늘을 깨우는 외침] 창조주의 활동에 참여하는 노동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는 말했다. “노동하고 사랑하는 법을 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노동하고 나의 노동을 사랑하는 법을 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멋지게 살 수 있다.” 노동은 삶의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피하고만 싶은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노동’에 대한 복음을 우리는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하느님께서 하신 창조 활동이 엿새 동안 하신 ‘일’과 일곱째 날의 ‘휴식’이라 표현되어 있다. 성경의 마지막에도 그분의 창조적인 ‘일’은 묘사되어 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묵시 15, 3).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발표한 「노동하는 인간」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하느님 자신이 당신의 창조 활동을 ‘노동과 휴식’이라는 형태로 표현하시기를 원하셨으므로,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그리고 휴식을 하면서 하느님을 닮아가야 한다”(25항 참조).

 

오늘날 노동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한가? 요즘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준다. 한 방송국에서 조사한바, 고등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 1위로 ‘공무원’을, 2위로 ‘건물주와 임대업자’를 꼽았다고 한다. 열심히 일해봤자 자신의 인생이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른들은 어떠할까? 애타게 사원증을 목에 걸고 싶어 하는 취업준비생들이 있는 반면, 가슴에 사표를 지닌 채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있다.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을 통과해도 화끈하게 일을 그만두는 것이 직장인의 로망이 되어버렸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힘들어진 노동, 우리는 어떤 가치를 되새겨야 할까?

 

 

노동의 새로운 의미

 

교황 레오 13세는 1981년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발표한다. 이는 19세기 산업혁명과 인간 노동의 근본적인 변화로부터 발생한 여러 문제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새로운 사태」의 90주년을 기념하며, 「노동하는 인간」을 발표하였다. 이 회칙은 교회의 가르침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닌 ‘노동’에 관한 문제를 더욱 강조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기 위해서 노력한다. “인간이나 인간의 지상 생활이 옛 것이듯 확실히 노동은 옛 것에 속한다. 그럼에도 지리, 문화, 문명 등의 그 다양한 양상들 속에서 연구 분석된 현대 세계의 전체적인 인간 상황은 인간의 노동에 관한 새로운 의미들을 찾아낼 것을 요구한다”(2항 참조).

 

과연 ‘노동’에 관해 새로울 것이 있을까? 구약에서 나타나는 노동은 신이 내린 벌로써 부정적인 의미를 보인다.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창세 3,17).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인간은 평생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매달리게 된다. 역사가 흐르면서 노동에 대한 정의도 변화되었다. 육체적인 고된 활동에서부터, 소외된 산업노동을 거쳐, 오늘날 ‘지식노동자’에 이르렀다. 자동화가 활발히 진행되자, 곧 다가올지 모르는 노동의 종말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로봇과 컴퓨터가 노동을 하고,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다. 시간제 근무, 파견 노동, 계약직 등 노동의 형태도 다양해졌다. 우리는 ‘노동’의 본질이 뒤바뀌는 과도기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인간이 노동의 주체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하는 인간」을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원칙을 제시한다. “우리가 강조하고 역설해야 할 점은 생산 과정에서 인간의 우위, 곧 사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본이라는 개념에 속하는 모든 것은 다만 사물의 집적일 뿐이다. 인간은 노동의 주체로서 그가 하는 노동에서 독립하여, 인간 홀로 인격체이다”(12항 참조). 그리스도인의 노동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 안에서는 창조주의 활동을 계속 발전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치 · 경제적으로 노동은 자연이 제공해주는 재료를 부로 변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노동은 부의 원천일 뿐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 자신을 형성하기도 한다. 따라서 노동은 단순히 목적을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노동을 단지 도구적으로 보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노동의 가치를 낮게 생각한다. 지난해 한국 청년층(15~29세)실업률은 역대 최고치인 9.9%를 기록했다. 이러한 때에 어떠한 시각으로 노동을 바라보는 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자신을 사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이 있는 반면, 우리를 병들게 하는 노동, 우리에게 심리적 상해를 입히는 노동, 우리의 사회적 관계와 신뢰를 무너뜨리는 노동도 있다. 청년들은 오히려 이러한 노동 안에서 자아의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노동과 인간다운 삶

 

국제노동기구(ILO)는 청년 실업에 대한 최근 보고서에 “위험세대”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오늘날 젊은 세대에서 평생 직업 또는 평생 목표에 대한 계획이나 열정이 없다고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직업을 갖고 싶어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질만한 직업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에게 적합한 노동을 할 권리가 있고, 나아가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인간에게 어떤 실현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것은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종류의 체제에서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을 한다는 자의식을 늘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하는 온갖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만일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경제 과정 전체에 헤아릴 수 없는 폐해가 불가피하게 생기게 되고, 경제적 손실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에 대한 폐해를 가져오게 된다”(「노동하는 인간」, 15항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 17).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함께 역사와 자연 안에서 당신의 창조 사업을 이루고 계신다. 그분의 창조 사업은 인간들의 노동을 통해 계속적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각 개인은 비록 자신을 위해 노동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노동의 이러한 그리스도교 영성은 모두가 나누어 갖는 유산이어야 한다. 특히 현대에서 정신과 마음이 긴장되고 여유가 없기 때문에, 노동의 영성은 성숙을 보여 주어야 한다”(「노동하는 인간」, 25항 참조).

 

[외침, 2018년 4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이지원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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