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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3-4) 평화학을 공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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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3-04 ㅣ No.1482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3) 평화학을 공부하는 이유 I


‘힘에 의한 평화’에 숨겨진 함정 알아차려야

 

 

다음 제시된 예문 가운데 참인 명제는?

 

①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이다. 

②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③ 평화는 힘에서 나온다.

④ 인간 세상에서 전쟁은 없앨 수 없다.

 

이 문제를 앞에 두고 당혹감이 밀려올 이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예시문 가운데 ‘참’이라고 생각되는 항목이 많을수록 왜곡된 정보에 오랫동안 노출돼 왔거나 잘못된 교육을 받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4개의 예시문 가운데 답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평화의 사도’로 불림 받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오랫동안 젖어온, 그래서 너무나도 당연히 ‘참’으로 여겨온 명제들이다. 

 

이 명제대로라면 ‘평화’를 하느님 은총의 선물, 사랑 그 자체로 가르쳐 온 성경의 가르침은 뒤집히고 마는 모양이 된다. 그러함에도 오랜 기간 교회 안에서조차 별다른 의심 없이 가르치고 배워 온 명제들이다. 

 

어떤 것들은 그 연원이 깊어 절대불변의 진리로까지 받아들여지는 모습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는 말이 대표적이다.

 

서기 4세기 고대 로마의 전략가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Flavius Vegetius Renatus)가 자신의 책 <군사학 논고>에서 주장한 말이다.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역설적 논리를 담고 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로 불리는 오랜 평화로 인해 약해진 로마제국의 군대를 재건하기 위해 베게티우스가 당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봉정한 이 책은 서양 군사학의 바이블로 자리 잡았다.

 

‘힘에 의한 평화’라는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이 말은 로마의 힘으로 인해 세상에 평화가 왔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로마의 평화’는 강력한 군사력 덕분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나아가 군사력이 뒷받침된 강력한 로마가 존재함으로써 주위 국가들도 함부로 도전하지 않아 국제정세도 안정돼 많은 이들이 함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외형적으로는 틀린 점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는 진리의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현실의 이면에 숨겨진 권력자들의 욕망이 가려져 있는 것이다. 권력을 지닌 지배계층들은 겉으로는 평화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외부 위협을 과장해 적대감을 부추김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욕심을 채운다. 인류 역사는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이 그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세력임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전쟁으로 인해 이익을 얻는 세력은 극소수이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이들은 절대다수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지배계층의 논리에 빠져, 또는 자신이 놓인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해 평화가 아닌 전쟁의 길을 걸어온 것이 인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북한과 미국 간의 역학관계, 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전쟁 없는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이나 평화를 외치는 이들을 향해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라는 공격이 쏟아지기 일쑤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대다수는 여전히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 행해지는 공격을 수긍하거나 받아들인다.

 

이것이 오랜 역사 속에서 인류를 수없이 넘어지게 한 걸림돌이자 함정이다. 더구나 인류 스스로가 만든 함정이다.

 

모두가, 인류 가족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평화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화학에서 평화의 반대말은 ‘모든 종류의 폭력’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평화학을 배우고 평화를 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위해 불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평화의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18년 3월 4일, 서상덕 기자]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한반도 평화’ 토론회 참석한 미셀 초스도프스키 교수


“한반도 평화의 시대 위해선 시민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

 

 

미셀 초스도프스키는 오타와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로 세계화 연구센터 소장이다. 러시아계 유다인으로 1946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1968년 캐나다로 이주했다. 반세계화 운동가로 명성을 얻던 그는 9·11 테러를 계기로 반전평화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테러와 전쟁을 바라볼 때 증오와 대결의 구조를 떨쳐내지 못한다면 어떠한 물리적 힘으로도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평화란 폭력의 구조를 비폭력적으로 바꿔 나가는 과정입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평화는 남과 북이 대화를 통해 재결합해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오랜 기간 반전평화운동에 앞장서 온 미셀 초스도프스키(Michel Chossudovsky) 교수가 한국을 찾았다. 캐나다 오타와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이자 진보적 입장에서 국제문제를 다루는 세계적 석학 초스도프스키 교수는 2월 21일 열린 ‘전쟁의 세계화와 한반도 평화’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초스도프스키 교수는 9·11 테러 이후 전쟁의 세계화와 폭력의 구조화 문제에 천착해왔다.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폭력의 헤게모니는 그의 주요 연구 분야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로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대한 기대가 높지만 그는 “여전히 핵전쟁의 위험은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북핵’ 그 자체가 아닌 ‘핵무기를 둘러싼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한반도 비핵화를 일관되게 추진해왔지만 정작 아무도 미국이 축적해 온 대규모 핵전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비핵화’의 화살이 오직 북한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스도프스키 교수는 “북한의 핵은 평화를 위협하지만 미국의 핵은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주장이 문제”라고 꼬집는다. “세계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핵 억지력’이 아닌 ‘비핵화’”이며 “핵무기 없는 세상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어떻게 폭력의 구조를 비폭력적으로 바꿔 비핵화와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 초스도프스키 교수는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전협정은 ‘일시적 휴전’ 상태를 뜻하므로 정전협정이 유효한 한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정전협정을 남북의 포괄적인 양자 평화협정으로 무효화시키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초스도프스키 교수는 증오에서 평화로, 정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적이 아닌 평화와 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또한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서는 촛불혁명과 같은 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가 필요합니다.” [가톨릭신문, 2018년 3월 4일, 정다빈 수습기자]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4) 평화학을 공부하는 이유 II


무지 혹은 무관심으로 그리스도인조차 폭력의 길 걷기도

 

 

다음 제시된 예 가운데 ‘폭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①같은 동네에서 알고 지내는 이웃집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 

②여러 사람 앞에서 상대방의 별명을 부르는 행위.

③오래간 만에 만난 지인을 포옹하는 일.

④회식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노래를 부르라고 권하는 행위.

(답은 본문 중에서 찾을 수 있음).

 

평화학의 관점에서 지난 시간을 되짚어보면 인류는 5000년 역사 가운데 대략 92% 기간 동안 어떤 형태로든 간에 사람이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을 해치는 전쟁 상태에 있었다. 역사 속에서 단 8%만이 평화로운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매우 불편한 사실이지만 인류 스스로가 역사 속에 남겨온 부끄러운 발자취다. 

 

하지만 더 부끄러운 점은 이러한 역사의 상당한 부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도 모르고 주님께서 입으신 상처를 더 더럽히는 오욕의 길을 자처해 걸어왔다는 것이다. 1096년 일어난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시작으로 1272년까지 3세기에 걸쳐 8차례 이뤄진 ‘십자군 전쟁’이 대표적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 남기신 말씀(가상칠언)은 지금도 인류 역사 속에서 쓸쓸한 메아리로만 떠돌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무지 내지는 무관심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죄의 구렁텅이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더더욱 평화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몰라도 여태껏 잘 살아왔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명제다. 이 말에는 ‘잘잘못’을 판단하는 기준이 자신에게 있다는 교만이 깔려 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주님께서 봐주시지 않을까.”

 

이러한 목소리 반대편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는지 모른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마르 15,2)

 

이렇듯 평화를 공부하는 평화학은 하느님 말씀에 무뎌진, 주님 정의에서 멀어져 있는 우리의 정신을 뒤흔들어 깨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의 사도’로 거듭나기

 

평화학을 연구하는 이대훈(프란치스코·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연구교수는 평화롭지 않은 세상의 원인을 무엇보다 ‘교육’에서 찾는다. 

 

“역사교육 자체가 전쟁을 불가피한 것처럼 몰아갑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전쟁은 어쩔 수 없다는 잘못된 교육으로 주입돼 있습니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은 결국 ‘평화로운 세상’은 이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한다. 평화를 위한 노력의 첫걸음도 결국 ‘교육’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평화를 둘러싼 다양한 인식과 사상을 평화학으로 정립한 요한 갈퉁(Johan Galtung) 교수가 제시한 ‘구조적 폭력’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갈퉁 교수는 1969년 발표한 논문 「폭력, 평화 그리고 평화 연구」에서 폭력이 사회구조에 내재화된 모습을 ‘구조적 폭력’이라고 밝혔다. 명백한 주체 없이 폭력이 사회구조에 내재화된 것을 지칭한 것이다. 그는 사적이고 직접적인 폭력과 ‘구조적 폭력’의 차이를 이렇게 비교 요약했다. 

 

“한 명의 남편이 자기 아내를 때린다면 그것은 명백히 사적 폭력의 상황이다. 하지만 100만 명의 남편들이 무지한 상태로 각기 100만 명의 자기 아내를 때리고 있다면 거기에는 구조적 폭력이 존재한다.”

 

한 마디로 사회구조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불평등으로 인해 초래되는 억압 등을 ‘구조적 폭력’으로 바라본 것이다.

 

이 같은 시각에 따르면, 적지 않은 세월 인류 역사 속에서 존재해 온 노예제도가 대표적인 구조적 폭력 사례로 꼽힐 수 있다. 가까운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당연한 순리로까지 받아들여지던 반상의 ‘신분차별’을 들 수 있다. 

 

이렇듯 한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행동을 통해 조직적으로 지속되는 관행으로 볼 수 있는 ‘구조적 폭력’으로는 ▲ 가부장제 ▲ 인종주의 ▲ 계급 차별 등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나아가 현대 들어 인류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 제국주의 ▲ 불공정 무역 ▲ 환경 파괴 등도 구조적 폭력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러한 서양의 역사와 담론을 바탕으로 한 평화론 개념을 뛰어넘어 새로운 지평을 연 이론이 ‘문화적 폭력’(Cultural Violence)론이다.

 

갈퉁 교수는 자신이 창간한 「평화연구저널」(the Journal of Peace Research)에 1981년 발표한 「사회적 우주관과 평화 개념」(Social Cosmology and the Concept of Peace)(183∼199쪽)에서 평화 개념의 확대를 꾀한다. 

 

갈퉁 교수는 ‘팍스’(Pax)라는 평화 개념에 서구적인 발상이 강하다고 봤다. 그는 서양에서 전쟁이 없는 ‘소극적 평화’인 ‘팍스’가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팍스 로마나’(Pax Romana)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등 제국주의 형성 논리로 전락했다고 밝혔다. 그는 서구적인 평화 개념의 한계를 지적하며 동양의 평화 개념에서 대안을 모색한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문화적 폭력’(Cultural Violence) 개념이다.

 

문화적 폭력은 인류가 지금껏 역사 속에서 경험해 온 종교와 사상을 비롯해 언어와 예술, 과학과 법, 대중매체와 교육 등의 내부에 상징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폭력은 ‘직접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 결국 인류가 다양한 모습으로 경험하게 되는 폭력은 주로 문화적 폭력으로부터 구조적 폭력을 경유하여 직접적 폭력으로 번지는 것이다. 이처럼 잘 드러나지 않는 비가시적인 모습을 띠는 문화적 폭력은 한 사회에서 각종 이미지를 통해 상징적으로 행해진다. 이 때문에 주로 각 분야 전문가와 지식인 등에 의해 자행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종교와 사상, 예술 등이 지닌 아름다운 가치로 포장하거나 그 이름을 빌려 행해지는 폭력이기에 더욱 심각하게 인간성을 좀먹고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따라서 평화학을 공부하는 것은 불의한 세상에 주님 얼굴을 비춰 정의를 드러내는 일이 된다.

 

 

평화학 공부에 도움되는 책

 

-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요한 갈퉁 지음/강종일 외 4인 옮김/583쪽/1만8000원/들녘): 평화학의 고전. 갈퉁 교수가 평화에 대해 고찰한 연구서.

 

- 「평화 저널리즘」(제이크 린치·요한 갈퉁 지음/김동진 옮김/291쪽/2만 원/선인): 언론인 출신 학자 제이크 린치와 요한 갈퉁 교수가 함께 저술한 책. 평화 활동에 주목하는 새로운 보도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 「평화학 입문」(손주철 지음/296쪽/1만8000원/성광문화사): 21세기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위한 한국평화학회장 손주철 박사의 평화학 입문서. 평화신학을 다루고 있다.

 

- 「평화를 보는 눈」(정주진 지음/248쪽/1만4000원/개마고원): 국내 제1호 평화학 박사인 정주진씨가 들려주는 평화학. 반전(反戰)과 비폭력에만 머물러 있던 평화의 울타리를 크게 넓힌다. 

 

- 「평화학과 평화운동」(서보혁·정욱식 지음/216쪽/1만2000원/모시는사람들): 걸음마 단계에 진입한 한국의 평화학과 평화운동에 대한 총체적인 해설서. 평화학과 평화운동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앞으로의 비전은 무엇인지 꼼꼼하게 살핀다.

 

- 「평화를 향한 열정」(스튜어트 리즈 지음/김동진 옮김/454쪽/2만2000원/삼인): 시드니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세계적인 평화학자인 스튜어트 리즈의 대표작. 평화학의 학문적 이론과 실천가들의 경험을 망라하고 있다. 정의를 동반한 평화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고, 어떻게 이를 성취할 수 있는지 제시한다.

 

- 「평화,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정주진 지음/188쪽/1만1000원/다자인): 청소년을 위한 평화 교과서. 전쟁, 가난, 무책임한 소비, 차별 등 네 가지의 폭력을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들려준다. 

 

- 「숨쉬는 평화학」(이승헌 지음/239쪽/1만 원/한문화): 평화운동가 이승헌 총장이 전하는 건강ㆍ깨달음ㆍ인류 평화로 가는 길. 국제적인 평화운동을 펼치고 있는 저자는 평화의 주체가 나라는 자각을 통해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고, 평화의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제시한다.

 

- 「평화학(PAXOLOGY)」(박신배 지음/305쪽/1만3000원/프라미스키퍼스): 한국적 상황에서 평화 사상이 무엇인지 연구한 책. [가톨릭신문, 2018년 3월 18일, 서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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