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교의신학ㅣ교부학

[교부] 교부와 성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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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3-03 ㅣ No.478

STORY 01 교부와 성인 이야기

 

 

사순시기가 되면 교우들 중에는 금연과 금주를 결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교우들도 이 시기동안 제법 굳건하게 자신의 결심을 잘 지킵니다. 이 결연한 수행이 사순시기의 단식과 함께 의미 있는 절제행위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단식이란 음식을 절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건강을 이유로 단식하거나 외적 용모 때문에 단식하는 경우가 있고, 투쟁에 혹은 수행 자체에 목표를 두고 단식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금연과 금주도 육체적인 절제에 그리고 더불어 건강을 회복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맑아지는 열매를 맺는 것, 마음의 순결함을 진정한 목표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사순시기의 강론하면, 레오 대 교황(440-461)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느님의 지배를 받는 영혼은 육체의 주인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 만일 우리가 단식하면서 우리 생활이 완전한 절제에서 오는 순결함과는 동떨어져 있다면, 불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 단식의 핵심은 음식의 절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일 마음이 불의에서 되돌아서지 않고 혀가 악담을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육체에 음식을 줄이더라도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합니다.” 레오 대 교황은 또 이렇게 강론합니다. “단식의 경기장에서 음식만 절제하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육체에 음식을 줄이면 영혼은 강해집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약간 고통을 당하겠지만 내적으로는 영양을 섭취하게 됩니다. 육체에게는 육적 풍만이 줄어들지만 정신은 영적 즐거움으로 강인해질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교부들과 성인들은 인간의 영혼과 육신이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려고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그들은 몸의 절제 자체에 목표를 두지 않고 절제를 통해 가고자 하는 더 높은 영적 목표를 늘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교부 요한 카시아노(365?-435)에 따르면, 농부는 풍요로운 수확을 통해 안정된 생활을 진정한 목표로 삼기 때문에 땡볕에서도 쟁기질하며 땅을 고르는 수고를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단식을 비롯하여 금연과 금주 등의 육신적 절제가 향하는 진정한 목표에 대한 생각, 영적 열망이 우리 마음 안에 생생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육신적 절제와 더불어 우리의 영적인 노력이 함께 하는 사순을 지내시길 바랍니다. [2018년 2월 25일 사순 제2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2 교부와 성인 이야기

 


1) 사막 교부들

 

성령의 지시에 따라 예수님께서 광야로 들어서셨듯이 우리도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고 사순 시기의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화려함과 풍족함을 피하고 광야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광야’라는 말은 ‘사막’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사막에서 생활하라는 소명이 복음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3세기경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가르침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하여 이집트 사막으로 간 수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사부 내지 스승으로서 명성을 떨치던 수도자들을 일컬어 ‘사막 교부들’이라고 합니다.

 

사막 교부들의 과거는 무척 다양하고 흥미롭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집트 농부 출신이었지만 그들 가운데는 상인과 대장장이, 심지어 노예 출신도 있었습니다. 악명 높은 강도들이 회개하여 유명한 수도승이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강도들 사이에서 사악함과 잔인함으로 악명을 떨쳤던 모세라는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4명의 강도가 모세의 암자를 습격합니다. 모세는 그들을 꽁꽁 묶어 교회로 데리고 갔는데, 모세는 이 강도들의 운명을 사제들이 결정하게 합니다. 강도들은 자기들이 약탈하려 했던 인물이 그 악명 높은 모세였다는 사실을 알고서 회개하고 수도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교부들의 과거가 어떠했든 그들은 모두 하느님만을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살려는 의지로 사막으로 갔습니다.

 

2)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초기 이집트 사막 교부들의 지혜들을 모아 담은 문헌집을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이라 합니다. 이것은 분명 책인데 저자가 없습니다. 저자를 굳이 말한다면 200년의 시간에 걸쳐 등장한 250명의 수도승들이 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술 연대도 측정하기 어렵고 그저 사막에서 어느 시점부터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어느 경우는 몇몇 수도승간의 대화이고, 다른 경우는 ‘압바’라는 칭호가 붙는 스승 둘이 형제애를 나누는 내용입니다. 아울러 제자와 그의 스승과의 개인적 면담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막 교부들의 일화를 처음 접하게 되면, 불교의 선방(禪房)에서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인상을 갖게 됩니다. 다양한 과거, 예측 불가능한 언행, 단순성, 본질과 핵심을 꿰뚫는 혜안, 분별력 등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토마스 머튼은 사막 교부들과 중국 선사들의 유사성에 주목한 바 있습니다. 우리도 이 금언집을 구하여 읽음으로써 광야 한 가운데 자리 잡음이 어떨까 싶습니다. [2018년 3월 4일 사순 제3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3 교부와 성인 이야기

 

 

무겁거나 가볍거나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나오면 몸과 마음 모두가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혹은 마음을 짓누르던 무언가를 벗어버리게 되면 몸과 마음 모두가 가벼워집니다. 이는 무겁거나 가볍거나 하는 것이 단순히 물질의 무게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특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특성에 관해서 성 요한 카시아노(356년경-435년)는 자신의 저서 『담화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특성은 매우 가벼운 깃털이나 날개깃에 비유할 수 있다. 만약 그 깃털이 외부로 온 어떤 액체가 묻어서 방해받지 않는 한, 본래의 가벼움 때문에 아주 미약한 바람에도 자연스럽게 하늘 높은 곳으로 날아간다. 그러나 깃털에 어떤 액체가 뿌려지고 쏟아진다면 본래의 가벼움을 잃어버려 하늘 위로 올라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깃털이 머금은 액체 때문에 낮은 땅으로 주저앉게 되고 말 것이다.”

 

영혼이 무거워지는 것은 액체에 젖어들 때입니다. 요한 카시아노는 이 액체가 무엇인지를 바로 설명합니다. “만일 우리 마음을 공격하는 세상의 악들과 세속을 향한 애착들로 인하여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방탕이라는 해로운 액체 때문에 마음이 손상을 입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은 순수함이라는 타고난 선물로 인해 가벼워질 것이고 영적 묵상이라는 미미한 바람에도 하늘로 높게 치솟는다. 즉 우리 마음은 낮은 땅의 장소를 뒤로하고, 볼 수 없는 천상적인 곳으로 옮아가게 된다.”

 

우리가 본연의 가벼움으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그 해로운 액체란 바로 우리의 영혼을 붙들고 있는 악덕들과 세속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애착 그리고 방탕함입니다. 요한 카시아노는 주님의 권고로 루카복음 21장 34절을 제시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이 구절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은 영혼의 지방층을 형성하고 그에 따르는 과중함이 우리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음을 말합니다. 지방제거 다이어트는 몸만이 아니라 영혼에게도 해당됨을 알 수 있습니다. [2018년 3월 11일 사순 제4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4 교부와 성인 이야기

 

 

참된 눈물과 거짓 눈물

 

성 암브로시오는 죄를 씻는 눈물의 힘에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데는 참된 참회의 표시로 눈물이 함께 한다고 그의 저서 『과부』에서 말합니다. “영혼이 슬퍼할 때 눈물이 함께 나옵니다. 그러나 눈물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고생을 가볍게 만들어 주고, 고통을 없애 주며, 부끄러움을 가시게 하여 새 힘이 솟아나도록 도와줍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을 위해 늘 기도하던 어머니 성녀 모니카를 회고하면서, 한 주교님이 어머니에게 ‘아들을 위해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셨으니, 그 아들은 절대로 잃어버린 아들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고백록』에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눈물이 갖는 효과는 큽니다.

 

눈물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눈물을 예로 들며 성 암브로시오가 『루카복음 주해서』에서 전합니다. “베드로는 슬피 울었습니다. 그는 많이 울어서 그 눈물로 자신의 잘못을 씻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도 용서를 받으려면 눈물로 당신의 죄를 씻으십시오!”

 

또한 눈물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합니다. 다윗왕도 범죄한 후 눈물로 죄의 용서를 청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백성들을 멸망시키려던 뜻을 취소하셨습니다. 이처럼 암브로시오는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눈물의 막강한 효과를 『통회』에서 강조합니다. “이만큼 참회의 힘은 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분명히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혹은 외적으로만 흘리는 눈물에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 앞서 말한 눈물의 효과를 전혀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 요한 카시아노는 『담화집』에서 말합니다. “비록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그러한 눈물을 얻을지라도, 그들은 결코 자연스러운 눈물의 풍요로움에 도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정신을 아래로 끌어 내리고, 인간적인 관심에 빠지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아가 메마르고 강요된 눈물은 병을 키우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악어는 음식을 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자신의 먹이가 된 동물의 죽음을 슬퍼해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눈물샘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기 때문입니다. 먹이를 삼키기 좋게 수분을 보충시켜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악어의 눈물은 거짓 참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악어의 눈물은 생물학적 반사작용으로서의 눈물이기에 인간의 거짓 눈물과는 오히려 구별된다 하겠습니다. 성 요한 카시아노의 말대로 거짓 눈물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는커녕 결국 우리를 병들게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2018년 3월 18일 사순 제5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5 교부와 성인 이야기

 

 

성인 명가(名家)

 

신학교 교수 신부님께서 강의 중에 우리 한국 천주교회에는 순교성인은 많지만, 신앙을 평생의 삶으로 증거한 수덕성인이 아직까지는 없으니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또렷합니다.

 

교황 요한 23세는 어린 시절부터 영적 일기인 『영혼의 일기』를 평생에 걸쳐 썼습니다. 이 일기에서 그는 수시로 성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을 표현했습니다. 자신의 사제품 25주년을 앞둔 1928년 12월 24일에 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번 영신수련 중에 나는 실로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를 생생하게 몇 번이나 느꼈다. 주님께서는 ‘만약 내가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면 필요한 시간과 은총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간절함을 담아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저는 모든 은총을 당신께 돌리며, 지금부터라도 성인이 되도록 모든 제 노력을 다하겠나이다. 하늘과 땅 그 모든 곳에서 당신께 약속드리나이다. 자비로우신 성모 마리아님 그리고 사랑하는 제 보호자 성 요셉이여, 두 분을 예수님의 옥좌 앞에서 행한 오늘 제 약속의 보증인으로 삼으려 하오니, 저를 도와주시어 충실한 생활로 이끌어 주소서.”

 

동방 교회 4대 교부 중 첫째로 손꼽히는 성 대 바실리오(328경~379)는 터키에 있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리아에서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인의 가족은 교회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문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성인 명가입니다. 아버지 바실리우스와 어머니 엠멜리아도 성인이었고, 할아버지는 순교했으며, 할머니 마크리나도 신앙 때문에 추방된 적이 있는 성녀였으며, 대 바실리오의 스승이기도 했던 누나 마크리나도 성녀이고, 두 동생인 니사의 주교 그레고리오와 세바스테의 주교 베드로도 성인입니다. 대 바실리오의 절친인 나지안주스의 주교 그레고리오도 교부이자 성인입니다. 대 바실리오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이들 셋은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라 불립니다.

 

한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 집안도 성인 명가입니다. 어머니 논나, 동생 카이사리오, 여동생 고르고니아, 이들 모두가 성인입니다.

 

선대에 성인 한 분만 계셔도 큰 영광으로 여기는 우리의 시선에서 보면 놀라운 일입니다. 어느 후배 사제의 영명 축일에 선배 사제가 이런 글귀를 선물로 보낸 것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인증하는 성인 사제되시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우리 안에 자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2018년 3월 25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6 교부와 성인 이야기

 

 

바실리아드

 

플래너건 신부(Flanagan,1886~1948)는 1917년 집 없는 아이들을 위한 가정을 만들어 그들과 함께 생활한 것을 그 시작으로 ‘보이스 타운’(Boys town)을 설립하였습니다. 작년에는 미국의 연방조폐국이 ‘보이스 타운’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주화도 발행하였습니다. 플래너건 신부의 지도하에 ‘보이스 타운’은 점점 발전하여 큰 공동체가 되었는데, 학교, 교회, 우체국, 체육관 등 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을 갖추고 자체 ‘소년 시장’까지 선출하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1938년에는 이 이야기가 영화화되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스펜서 트레이시는 이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한국전쟁 후 전쟁고아들의 문제로 우리나라를 방문하기도 한 플래너건 신부는 시복을 앞두고 있습니다.

 

‘보이스 타운’과 같은 사회복지 시설은 교부시대인 고대교회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대 바실리오는 사회복지는 물론 병원의 역사에서 선구자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시설인 ‘바실리아드’를 주교가 된 후 카이사리아 외곽에 설립합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바실리아드’는 성인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368년 대 바실리오가 사제일 때 카파도키아에는 극심한 기근이 들게 됩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급식소를 열었습니다. 기록에 보면 369년에 대 바실리오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스프와 고기를 내놓았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당시의 기근은 후에 급식소로 만족하지 않고 시설을 더 확장해야겠다는 동기를 부여했을 것입니다. 그의 의지가 실현되어 설립된 ‘바실리아드’에서 대 바실리오 주교는 허리에 앞치마를 두른 채 가난한 이들을 접대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이 보호하는 이들의 영혼을 돌보았습니다.

 

‘바실리아드’는 대 바실리오가 그리스도교 복음 정신으로 사회적 이상을 구체화시켜 만들어 낸 ‘사랑의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복합적인 자선 단체로서, 가난한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이자 병원, 호스피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거리를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곳이었습니다.

 

대 바실리오의 절친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아드’를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과 같은 불가사이한 일들 중 하나로 비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전합니다.

 

“바실리오의 관심사는 오직 병자들을 치료하고 상처를 낫게 해주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병환자들을 깨끗이 씻어 주었습니다.” [2018년 4월 1일 주님 부활 대축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7 교부와 성인 이야기

 

 

부자의 심보

 

“저렇게 돈 많은 사람은 평생 자신의 돈을 써도 남을 텐데, 왜 남의 돈을 탐하고 부정축재하고 그랬을까?” 사람들이 그 답에 대해 알 듯 모를 듯해 합니다. 나라면 재산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모아둔 재산을 잘 쓰는 일에 집중할 수 있을까?

 

언젠가 한 사람이 이제는 돈을 여생을 감당할 만큼 충분히 벌었다고 생각하는데 여전히 돈 버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그 돈으로 좋은 일에 쓰면서 여유롭게 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늘 자신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하는 불안감 속에 있고, 그래서 계속 재산증식을 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재산이 늘지 않고 멈춰 있어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자신 주변의 부자들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도 알려 주었습니다.

 

대 바실리오(328경~379)는 이런 부자들에게 『부자에 대한 강해』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는 자신이 가난하다고 주장합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많은 것이 부족한 사람이고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 때문에 그대 역시 많은 것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대는 그대가 받은 십 탈렌트에 부지런히 십 탈렌트를 더 보탰고, 이십 탈렌트에 이십 탈렌트를 더 보탰습니다. 그러나 이런 끝없는 축적 때문에 그대의 욕망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불타올랐습니다. 포도주 한 잔이 술꾼에게는 더 많이 마시게 만드는 기회가 되는 것처럼, 새로운 부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가졌음에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계속되는 축적이 그들의 병을 더 깊어지게 만듭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구가 결국에는 그들을 해칩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그들은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 기뻐할 줄 모르고, 아직 갖지 못한 것 때문에 슬퍼하며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발을 내디디며 꼭대기에 오를 때까지 쉬지 않고 한 계단 한 계단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이 사람들도 정상에 오를 때까지 정상을 향한 경주를 멈추지 않다가, 거기 올라가면 추락하여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349/50-407)는 『마태오 복음 강해』에서 돈에 대한 애착의 정도가 가난한 자보다 부자가 훨씬 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부자들의 경우 돈에 대한 애착이 폭군처럼 지배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재산의 증식은 우리 욕구에 더 큰불을 일으켜 부족함을 훨씬 더 크게 느끼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가 그런 욕구의 무게에 짓눌려 살다가 추락하여 곤두박질치게 됨을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2018년 4월 8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8 교부와 성인 이야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1

 

우리가 육교를 건너가다 보면 추위와 더위에도 머리를 땅에 숙이고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도움을 청하는 이를 간혹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그를 다른 이가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도움이 배후의 누군가에 이용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에게 도움주기를 망설입니다. 도와주는 경우에도 그냥 지나치는 경우에도 마음의 찜찜함이 남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누군가를 돕기에 앞서 생각이 많아지는 이에게 이런 상황에 마주하게 될 때 해답을 주는 교부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오늘은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345/6경-399), 다음번에는 요한 크리소스토모(349/50-407)의 글을 살펴봅니다.

 

교부 에바그리우스는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악한 성향과 생각들을 거슬러 싸우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련의 성경 본문들을 인용하는 작품 『안티레티코스』를 썼습니다. 이 작품에는 각각의 악한 생각에 대응하여 반박하는 의미를 가진 성경인용구절 487개를 담고 있습니다. 참고로 ‘안티레티코스’는 ‘반박’ 내지 ‘논박’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안티레티코스』에서는 그 전개방식에 따라, 먼저 우리가 맞서야 할 악한 생각이 제시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물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양식과 의복을 궁핍한 이들과 나누지 않으려는 생각에 맞서”

 

그리고는 이 생각에 대한 부연설명과 함께 반박하는 성경구절을 제시합니다.

 

“그 생각은 틀림없이 우리 앞에 있는 사람보다 더 약하고 궁핍한 다른 사람이 있는데, 수고하지 않고 먹고 입으려 하는 게으른 이 사람보다, 그에게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우리에게 제안한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안셀름 그륀 신부는 자신의 저서 『내 영혼의 치유제』에서 『안티레티코스』의 내용을 우리에게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합니다.

 

“물론 지하철 역의 동냥꾼이 ‘거지 조직’의 일원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등쳐먹으려 하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러나 에바그리우스는 이런 생각에 반대합니다. 다만, 가진 것을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만 상기시킬 뿐입니다. 그 사람이 과연 도움 받을 가치가 있는지, 받은 도움을 제대로 활용하는지, 그런 건 에바그리우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2018년 4월 15일 부활 제3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9 교부와 성인 이야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2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388년 혹은 389년경 차후에 『부자와 라자로』라는 책으로 엮어진 일련의 강론을 하였습니다. 이 강론들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그는 자신이 선호하였던 주제들을 다룰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두 번째 강론은 부자와 라자로, 두 사람의 죽음 이후(루카 16,22-24 참조)를 다루고 있습니다. 죽음은 누가 진정 부자이고, 누가 진정 가난한 자인지를 밝혀냅니다. 이 강론에서 그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마땅히 가져야 할 사고와 행동에 대해 담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따르면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사건(창세 18,1-15 참조)에서 아브라함의 지혜로운 처신을 본보기로 세웁니다.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바와는 달리 아브라함은 길손 셋이 누구인지, 출신지가 어디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지나는 이들 모두를 맞이하여 환대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바로 이 사실에 주목하며 말합니다.

 

“가난한 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자신의 가난함, 즉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에게서 그 이상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 가난한 이가 정말 사악한 자일지라도, 그에게 음식이 필요하다면 여러분은 그의 배고픔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 자비로운 이는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항구와 같습니다. 항구는 파선하여 배에서 탈출한 사람들 모두를, 악한 자인지 선한 자인지 상관하지 않고 받아들여 위험에서 구해줍니다. 항구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위험에 빠진 이들을 피신처로 맞이합니다. 여러분 또한 가난으로 지상에서 파선의 고통을 겪는 이를 보면, 그를 판단하거나 그에게서 설명을 요구하지 말고, 그를 위험에서 구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왜 쓸데없이 스스로 골머리를 앓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런 온갖 종류의 불안과 노고로부터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가난한 이를 도울 때, 필요 이상으로 세세한 것에 궁금해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가 도움 주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도움 받는 자가 어떤 품성과 자질을 지닌 자인지를 놓고 문제 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의 성덕 때문이 아니라 그의 어려운 처지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주님의 큰 자비를 입게 됩니다. 우리 자신도 합당한 자격이 없지만 그분의 호의를 누립니다. 우리가 동료 종들에게 해명을 요구한다면, 우리 자신도 위로부터 호의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2018년 4월 22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10 교부와 성인 이야기

 

 

세례자 요한의 도플갱어 성 스타니슬라오(1030–1079) 1편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임종 순간, 그의 곁에는 40년간 한결같이 지근에서 비서로 봉직한 스타니슬라오 추기경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이 추기경의 주보성인이자 폴란드의 주보성인인 성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 첫 번째 성인입니다. 지난 4월 11일이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이었습니다.

 

폴란드는 최근에도 미사 참여자의 수가 꾸준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또한 사제서품자들이 선종하는 사제들보다 그 수가 많아 사제성소가 여전히 증가 내지 안정 추세에 있습니다. 폴란드에서 966년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후 가톨릭교회는 종교 · 문화 ·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폴란드 국민들에게 가톨릭 신앙은 자신들의 정체성 그 자체였기 때문에, 지금도 폴란드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교회 신자입니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74퍼센트가 부활 판공성사에 참여하고자 했다 합니다. 이는 점점 더 고해성사를 부담스러워하는 한국 가톨릭교회 신자들의 현실과 대조적입니다.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융성의 계기라기보다는 결과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주교직을 원치 않았던 성 스타니슬라오는 1072년 교황 알렉산더 2세에게 순명하여 크라코프의 주교가 됩니다. 주교가 된 후에도 거친 삼베옷을 평생 걸쳐 입고, 세속 재물을 멀리하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데에 전념합니다. 성인은 교회 정신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따끔히 혼내며 올바른 길로 가도록 이끌었습니다.

 

당시 폴란드의 왕이었던 볼레슬라오 2세는 유능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전쟁을 직접 치르면서 폭력과 범죄에 젖어든 인물로, 헤로데 왕과 유사하게 도덕적 문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의 신하들은 물론이요 폴란드 교회의 지도자들도 그의 서슬 시퍼런 행태 때문에 감히 직언하지 못했습니다. 성 스타니슬라오만이 세례자 요한처럼 수시로 왕을 찾아가 왕의 잘못을 가감 없이 지적했습니다. 그는 왕이 자신이 범한 죄와 그 범죄의 결과들이 위중함을 성찰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왕은 일단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을 통해 교정의 의지를 보이곤 하였지만 그런 태도가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름답기로 이름난 한 귀부인을 왕이 강제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폭군을 자처하며 인륜을 저버린 그의 행위는 폴란드 귀족들의 분노를 크게 샀지만, 그 누구도 왕에게 감히 맞서지 못하였습니다. 주교들조차 왕의 심기를 건드릴까 싶어 침묵하였습니다. 다른 모든 이의 침묵 속에서도 성 스타니슬라오는 오랜 기도 끝에 왕을 대면한 자리에서 반인륜의 범죄를 또다시 저지른다면 그를 교회의 처벌, 즉 파문에 처하겠다고 강력하게 경고하기에 이릅니다. [2018년 4월 29일 부활 제5주일(이민의 날)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11 교부와 성인 이야기

 

 

세례자 요한의 도플갱어 성 스타니슬라오(1030–1079) 2편

 

폴란드 왕 볼레슬라오 2세는 성 스타니슬라오 파문 경고에 맞대응하여 그에게 심한 모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럼에도 성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다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왕에게 성인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던 중 왕은 성인이 계약서 없이 두 명의 증인들만 배석시킨 채 베드로라는 신자에게서 구입한 토지가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됩니다. 베드로는 3년 전 세상을 떠났기에 왕은 그의 자손들에게 토지반환소송을 하라고 부추깁니다. 한편으로 왕은 증인들을 협박하여 위증토록 하였습니다. 왕을 재판장으로 한 법정에서 토지대금을 지급하였다는 성인의 주장은 부정되었습니다. 유죄선고 직전에 순간적인 영감을 얻은 성인은 재판관들에게 사흘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사흘 안에 죽은 베드로를 법정에 증인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왕을 비롯한 재판부의 비웃음 속에 그의 요청은 수용됩니다.

 

성 스타니슬라오는 사흘간 밤낮으로 단식하고 기도하였습니다. 3일째 되던 날 성인은 무덤으로 가서 목장(주교지팡이)을 시신에 댄 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일어날 것을 명합니다. 베드로는 죽음에서 깨어났고, 성인이 그를 산 채로 법정에 세우자 모두가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앞서 위증한 두 명의 증인들이 배석한 자리에서 성인이 자신에게 토지대금을 지급하였음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는 동시에 자신의 자손들을 꾸짖으며 참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을 마친 후에 베드로는 자신의 무덤으로 돌아가며 성인에게 자신이 연옥에서 빨리 벗어나도록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왕은 더욱 깊은 타락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왕의 회개를 위한 성인의 기도와 권고가 모두 무위에 그치게 되자, 성인은 다른 주교들의 의견을 물어 마침내 왕을 파문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더욱 분노가 치민 왕은 부하들에게 성인을 살해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들이 미사 집전 중이던 성인을 붙잡으려 하는 순간 그들은 알지 못할 힘에 압도되어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왕은 직접 칼을 들어 성인의 목을 치기에 이릅니다. 화가 풀리지 않은 왕은 성인의 시신을 잔혹하게 훼손한 뒤, 그 시신을 새와 짐승들의 먹이가 되도록 들판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이 때 네 마리의 독수리가 이틀간에 걸쳐 성인의 시신을 지켰고 밤에는 시신에서 찬란한 광채가 났다고 전해집니다. 사제들과 신자들은 성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교회 안에 매장하였습니다.

 

볼레슬라오 왕은 이 일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파문되어 마침내 퇴위되기에 이릅니다. 그는 방황 끝에 참회하여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사면 받게 됩니다. 이후로 그는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무명의 평수사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2018년 5월 6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12 교부와 성인 이야기

 

 

그리스도인의 우정

 

우리들 중에 참된 우정을 원치 않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로마 철학자 키케로는 “인생에서 우정을 빼앗는 것은 우주에서 태양을 빼앗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우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서로 다른 기대와 불명확한 우정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종종 깨지는 우정을 실제로 경험합니다. 특히 유용성과 쾌락을 중심으로 한 우정은 기본적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 믿는 이들 간의 우정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4세기와 5세기 초에 교부들도 우정이라는 주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교부들의 삶과 저술에 나타나는 우정은 세상 일반에서의 우정과 차별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우정의 차별성에 대한 이해는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시대를 관통하여 새롭게 다가섭니다.

 

교부들 중에 특별히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참되고 지속적인 우정을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실천적 노력을 통해 보여 주었습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저술 안에서 우정에 관한 논의들을 자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우정의 차별성은 그런 논의 안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는 인간적인 것만으로는 결코 참된 우정을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적인 것 뿐만 아니라 신적인 것에서도 함께 할 때 우정이 완성된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 관계가 인간적인 것에만 한정되면, 애정이 아무리 깊어도 참된 우정에 이르지 못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적인 것들에 일치하지 못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일치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적인 것들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은 인간적인 것들에 대해 합당한 판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되신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인간을 합당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의 우정은 여타의 신앙의 덕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에 기인하는 신적인 특성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우정은 안정적 지속성과 항구함이라는 특성을 지닙니다. 역으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면 그 우정은 이런 특성들을 상실하여 결국 깨지게 됩니다.

 

교회의 신앙 단체를 보면 신앙적 실천을 게을리하면서 인간적인 친목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인의 우정이 그 특성과 차별성을 상실하고 분열을 초래함을 우리는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적 친목과 함께 혹은 그에 앞서 성찬례를 비롯한 기도생활에 함께함이 우리 신앙인들의 우정을 견고케 하고 지속시키는 것임을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교부들을 통해 새삼 확인합니다. [2018년 5월 13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13 교부와 성인 이야기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의 우정 1

 

앞서 ‘성인 명가’로 부제가 달린 글에서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 중에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는 절친이었음을 알려 드렸습니다. 그들의 우정은 그리스도인의 우정의 모범이자 전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성인들의 우정에도 굴곡을 겪은 끝에야 더 깊은 우정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가 우정을 다지게 된 것은 아테네에서의 학창시절 때였습니다. 먼저 다가선 친구는 보자 마자 바실리오에게 마음이 끌렸던 그레고리오였습니다. 그는 바실리오가 짓궂은 신입생 환영식을 피하게 해 주었고, 한 학생이 바실리오를 질투하여 시작한 논쟁에서 바실리오를 지지하였습니다. 이에 바실리오는 그레고리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면서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절친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지하며 조언과 위로를 주고받는 가운데, 두 사람 모두가 영성 생활, 특히 관상과 은수생활에 대한 깊은 열망이라는 동일한 이상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깊은 영적 교감으로 맺어졌기에 그들은 그 밖의 모든 것도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됩니다. 당시에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와의 우정에 관해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학업과 일상생활에서 그리고 나에게 바실리오는 토론할 때 늘 함께 하는 이였습니다. 좀 자랑하자면, 우리 두 사람은 그리스 전역에서 한 팀으로 익히 알려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말하자면 육신으로는 둘로 나뉘어 있었으나 우리의 영혼은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를 서로에게 이끌어 준 것은 당연히 하느님과 더 높은 것들을 향한 열망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을 서로 내어주고 우리의 열망 안에서 한층 더 일치되는 신뢰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같은 생각을 나누는 것만큼 더 단단한 일치란 없습니다.”

 

그레고리오에게 하느님께 기반을 둔 영적 우정은 유용성과 즐거움을 중심으로 한 ‘육적인 우정’과 비교할 때 훨씬 더 내밀한 것이었습니다. 금방 시들어 버리는 봄꽃과 같은 세상의 우정과 달리 자신들의 깊은 우정은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우정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또한 그는 서로를 통해서 그리고 둘이 함께 할 때 더욱 효율적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실리오가 일 때문에 아테네를 떠나게 되자 그레고리오는 자신이 반쪽으로 쪼개지는 듯한 좌절과 슬픔을 겪게 됩니다. 나중에 바실리오가 그레고리오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초청하였지만, 이번에는 그레고리오가 집안 사정 때문에 떠날 수 없어서 합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함께 이루고자 했던 관상과 은수생활의 동반 실행은 무산되고 맙니다. 함께 하지 못함은 변치 않을 것 같았던 그들의 우정에도 위기를 맞이하게 합니다. [2018년 5월 20일 성령 강림 대축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14 교부와 성인 이야기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의 우정 2

 

그레고리오가 바실리오에게 쓴 편지를 보면 친구를 향한 애절한 표현들이 가득합니다. 그는 숨쉴 때 마시는 공기보다도 바실리오에게 더 의지하며 산다고 하기도 하고, 실제로 혹은 생각으로 바실리오와 함께 할 때 살맛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들의 우정에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원치않던 사제서품을 받고 교회 직무를 수행하게 되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공동 수도생활의 실현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370년에 바실리오는 자신의 병이 위중하며 생사를 다투니 친구가 보고 싶다는 편지를 그레고리오에게 씁니다. 그러나 이 편지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바실리오는 공석이 된 체사레아의 주교직을 둘러싸고 아리우스 이단 세력과 다투던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했던 그는 그레고리오를 체사레아로 오게 하기 위한 구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체사레아 주교직은 당시 교회정치 지형으로 볼 때 그만큼 중요한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친구가 죽는다는 소식에 상심하던 차에 사실 관계를 파악하면서 한층 더 고통을 겪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우정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들의 우정에 회의를 갖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가 주교직에 오르는 것에 일조하게 됩니다.

 

우정에 이상이 생긴 상황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단인 아리우스파였던 황제 발렌스가 정통교리의 수호자였던 바실리오 주교를 견제하기 위해 압박을 가하는 상황에서 그는 또 다시 그레고리오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자신의 친동생은 니싸의 주교직에 임명하고 친구인 그레고리오를 새로이 설정한 지역의 주교로 임명하여 세력를 형성함으로써 정통교리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는 자신이 갈 곳이 너무 외진 곳이어서 주교좌에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여 주교직을 거절합니다. 바실리오는 이러한 그를 원망하게 됩니다. 바실리오의 입장에서는 교회의 정통교리를 수호하는 일에서 그레고리오가 자신의 안위를 찾고 무관심한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평화와 고요함의 삶을 함께 찾던 자신들의 우정에 금간 것이 서로에게 책임 있다고 보았고 한동안 화해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실리오의 죽음 이후에 자신의 조카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와의 우정의 오랜 위기 속에서도 그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이 위기를 겪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굳은 우정을 지켰던 것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 우정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하다는 의식을 그들이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정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 자신들은 서로에게 속한 존재로 성령께서 동참하시고 있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2018년 5월 27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15 교부와 성인 이야기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의 우정 3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의 장례 때 고별 강론을 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정의 진실함과 그 깊이를 누구나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강의 지류처럼 같은 조국의 샘으로부터 학문을 추구하고자 서로 다른 행로로 떠나갔으나, 흡사 둘이서 약속이나 한 듯 하느님의 안배에 따라 아테네가 우리 두 사람을 상봉케 해주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동안 나는 나의 친구인 위대한 바실리오의 무게 있는 행동과 말하는 데 있어서의 슬기와 완숙함을 보고 그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를 모르고 있던 다른 이들에게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갖도록 권고해 주었습니다. 실은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한 명성을 이미 들어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이 결과로 아테네에 처음 유학 오는 학생들이 보통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와는 달리 바실리오만은 이러한 통례를 넘어 특별한 영예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우정의 서곡이고 상호 간의 친밀성을 불붙여 준 계기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두 사람은 상호간의 사랑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서로의 친애감을 고백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 다 같은 지혜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각자가 서로에게 모든 것이 되어, 같은 지붕 아래서 살게 되고, 식탁을 함께 하며, 마음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 둘의 눈은 한 목적에 고정되고 우리의 친애감은 더욱 더 깊어져 힘차게 자라났습니다.

 

우리 둘 다 학문을 추구하고자 하는 같은 소망으로 이끌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대개 학생들간에 질투심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지만 우리 사이에는 질투심이 결코 없었고 경쟁을 좋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두 육신 안에 하나의 영혼을 갖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으면 안 되지만 우리는 각자가 서로 안에 있고 또 서로가 함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두 사람의 유일한 과업과 갈망은 덕을 쌓고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며 현세의 삶을 떠나기 전에도 여기를 떠나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목적하는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생활과 행동을 하느님의 가르침의 지도에 따라 이끌어 나가면서 동시에 덕행에 대한 사랑을 서로 분발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좀 지나치다고 볼지 모르겠지만 우리 자신은 서로에게 있어 선악을 식별하는 규범과 척도였습니다.

 

자기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귀족 칭호들을 가진 이들도 있고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 얻은 칭호들을 가진 이들도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2018년 6월 3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16 교부와 성인 이야기

 

 

영적 취함: 정신 말짱한 취함

 

우리는 많은 것들에 취해 삽니다.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꽃향기에 취하고, 기쁨에 취하고…… 흥미롭게도 많은 교부들은 취한다는 표현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의 특별한 만남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들의 표현을 말그대로 옮기면 ‘정신 말짱한 취함’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매우 고양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취하는 것이 보통이나 어떤 날은 분명 술을 마시고 취했음에도 기쁨이나 슬픔이 너무 커서 정신은 또렷하고 말짱했던 체험을 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체험은 교부들이 의미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으나 그 의미를 유비적으로 이해하게 해줍니다.

 

‘정신 말짱한 취함’, 이 표현을 처음으로 쓴 교부는 오리게네스(185경-254) 입니다. 그는 『마태오 복음 주해』에서 우리를 취하게 하는 것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성찬례에서 성체를 영하면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가 영적 취함에 이른다고 하면서 70인역 구약성경 시편 23장 5절을 인용합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니 당신의 술잔은 그 어떤 술보다도 나를 취하게 하는 것이옵니다.”

 

오리게네스는 또한 자신의 저서 『아가 주해』를 통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영적 취함’의 의미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교회 혹은 주님께 다가선 영혼, 즉 신앙 깊은 이들은 우리를 주님의 잔칫집, 포도주가 마련된 집으로 친구들과 가족들을 초대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이 맥락에서 그는 잠언 9장 5절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라는 초대의 말을 인용합니다. 바로 성찬례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는 바로 성찬례를 통해서 ‘영적 취함’이라는 높은 영적 단계에 이를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이 술은 의로운 이와 거룩한 이들이 마시고 취한 술입니다. 그들은 이 술을 늘 반겼습니다. 일찍이 노아는 이 술을 넋 잃고 바라보다가 영적으로 취하였습니다. 다윗은 잔칫집의 술잔에 눈길을 떼지 않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를 취하게 하는 당신의 술잔은 더 할 바 없이 아름답나이다.’ 그러니 완덕에 이르고자 하는 교회나 모든 영혼은 이 포도주의 집으로 서둘러 들어갑시다. 그리하면 우리는 지혜의 가르침과 신비로운 지식을 즐기게 됩니다. 이는 마치 잔치의 감미로움. 포도주가 주는 기쁨과 같은 것입니다.”

 

미사 때 우리도 각자의 몸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의 몸에 흐르는 성혈로 취하게 됩니다. 주님의 성혈로 취함은 우리가 맑은 정신으로 지혜를 찾게 해 줄 것입니다. 성인들은 우리가 맑은 영혼으로 영적 취함에 이르도록 잦은 영성체를 늘 권고하였습니다. [2018년 6월 10일 연중 제10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17 교부와 성인 이야기

 

 

그리스도인의 츄잉껌: 예수의 기도

 

이집트의 은수자인 대 마카리오(300-390년)는 폰투스의 에바그리오(345/46경-399)가 즐겨 찾던 스승이었습니다. 에바그리오가 어느 날 자신이 무슨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바위에 마음의 닻줄을 굳게 붙잡아 매고, 호흡할 때마다 ‘예수의 기도’, 즉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반복하라.”

 

그러면서 그는 우리 안에 늘 함께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복된 이름을 반복하는 것보다 더 완전한 묵상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관련된 대 마카리오의 예수의 기도에 관한 이야기는 콥트어로 된 자료에서도 나옵니다. 이 자료는 스승 포이멘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언젠가 나는 형제들과 함께 스승 마카리오 옆에 앉아 있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나의 아버지시여, 제가 생명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노인인 그가 나에게 응답하였다. ‘내가 아버지 집에서 살던 어린 시절에 나이 든 여자들과 어린 소녀들은 무언가를 입안에 담고 있는 것을 보곤 하였다. 그것은 씹는 껌이었다. 그 껌은 목 안의 침들에 단 맛을 일으키고 구강 내의 악취를 해소하며 간은 물론 체내 장기의 수분조절과 회복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이 껌이 이를 씹는 이들에게 그렇게 풍성한 달콤함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생명의 음식이며 구원의 샘이시고, 생명의 물의 원천이시며 달콤한 것들 중에 가장 단 맛을 지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선사하실 수 있겠느냐? 당신의 고귀하고 복된 이름만으로도 악령들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마는데, 그때가 바로 악령들이 우리의 입을 통해 그분의 이름을 듣게 될 때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된 이름을 반추하듯이 끊임없이 씹는다면, 그분의 이름은 영혼과 육신을 이끌어가는 우리의 지혜에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 이 기도는 죽을 우리 육신에게서 모든 악령들을 몰아내고 육신에게 천상의 것들을 내어 보이신다. 무엇보다도 높은 곳에 계시는 분, 왕 중의 왕이시며 군주들의 군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신다. 이는 온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는 이들을 향한 하늘의 보답이다.’”

 

그리스도인의 씹는 껌인 예수의 기도는 일상 기도는 물론 특별히 미사 영성체 후에도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 몸 안에 모셔진 주님의 몸에 마음의 닻줄을 굳게 붙잡아 매고, 숨 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반복해도 주님의 보답을 받습니다. 즉, 들숨에 ‘예수’ 그리고 날숨에 ‘그리스도’를 반복하면 성체와의 일치에 크게 다가섬을 느끼게 됩니다. 성체를 모시고 와서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즉시 주보를 내려놓으시고 ‘영성체 후 기도’ 전까지 우리의 껌 예수의 기도를 씹으시기 바랍니다. [2018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18 교부와 성인 이야기

 

 

말씀 반추하기: 영적 균형 이루기

 

교부 에바그리우스(345/6경-399)는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악한 성향과 생각들을 거슬러 싸우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련의 성경 본문들을 인용하는 작품 『안티레티코스』를 썼습니다. 이 작품에는 각각의 악한 생각에 대응하여 반박하는 의미를 가진 성경인용구절들을 담고 있습니다. ‘안티레티코스’는 ‘반박’ 내지 ‘논박’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는 반박 말씀을 한 번만 발설하면 이로써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이면 충분하신 분이셨지만 우리는 반박 말씀을 지니고 다니며 반복하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이것을 고대 수도자들은 ‘반추하기’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경의 어떤 말씀이 살과 피가 되어 내면 깊숙한 곳에 각인될 때까지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어느 사막 교부의 말씀은 ‘반추하기’를 이렇게 풀어줍니다.

 

“물의 성질은 부드럽고 돌의 성질은 단단하다. 그러나 돌 위에 매달려 있는 용기가 물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려 돌에 구멍을 뚫는다. 그렇게 하느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 마음은 딱딱하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하느님 말씀을 자주 들으면, 그의 마음이 하느님 경외를 위해 열린다” (『교부들의 금언집』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완고함과 인간 영혼 안에 있는 단단하게 굳어 있는 것을 부드럽게 풀어 줄 수 있습니다. 성 베네딕도(480?-547년?)도 특정한 성경 말씀을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반복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251-356년)도 악령들에 맞서 시편을 계속해서 되풀이하여 읊었습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악습들, 부정적인 행동들은 대부분 오랜 습관적 반복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를 해소하려면 역으로 우리의 영혼에 치유의 성경 말씀을 거듭 반복하여 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영혼 안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시어 영적 균형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분노로 달구어져 약한 이웃을 마구 거칠게 대한 이들이 화제입니다. ‘죄송합니다’를 반복하기보다는 『안티레티코스』에서 제시하는 코헬렛 7장 9절을 반복하여 되뇔 것을 그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마음속으로 성급하게 화내지 마라. 화는 어리석은 자들의 품에 자리 잡는다.” [2018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19 교부와 성인 이야기

 

 

참 행복의 길: 마음의 정화

 

어른이 되어 천주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에게 그 동기를 물어보면 대부분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답하곤 합니다. 이 대답에는 언뜻 보기에 신앙의 완숙함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성숙 과정에서 중간자적 의미를 지닌 이 말에는 그들이 이후에 걸을 신앙의 길에 대한 직관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의 평화는 어지럽고 탁한 마음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평화가 맺는 완성 열매는 복음 말씀대로 하느님을 뵙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예전에 밤이 되면 어두움이 덮인 성당 부속 유치원 마당에 중학생 정도의 아이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소란스럽게 하곤 했습니다. 그들을 불러 타일러 보내도 이내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였습니다. 놀이시설 손괴와 화재의 위험도 있고 성당 구내에서 불의의 사고가 걱정되었습니다. 가로등을 설치하여 마당을 환하게 비추자 아이들은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밝은 곳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본분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유치원 마당은 원래대로의 평온함을 찾았습니다.

 

마음의 어두움에 빛을 비추면 마음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떠납니다. 이렇게 신앙의 빛 내지 영적 식별을 통해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 즉 마음의 정화는 교부들의 주요하고도 일차적 과제였습니다. 사막교부들은 궁극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도 생활을 일차적 목표로 삼았습니다.

 

요한 카시아노(365?-435년)의 『담화집』 1권을 보면 스승 모세는 수도생활의 궁극적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을 뵙는 것이고, 이를 이루기 위한 일차적 목표는 마음의 정화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정화를 이루지 못하면 하느님을 뵙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질러진 방을 보고 더럽다고 생각하여 치우는 사람이 있고 괜찮다고 생각하여 계속 어질러진 채로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상의 방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깨끗하게 치우지 않으면 하느님을 뵙지 못하여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마음의 어두움과 그림자를 걷어내는 고해성사는 우리의 신앙이 향하는 행복의 길목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2018년 7월 1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20 교부와 성인 이야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뒷담화

 

우리는 뒷담화의 해악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함께 나누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방심 속에서 뒷담화의 파괴력은 모든 이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1090-1153년)는 뒷담화가 독사보다도 더 다발적이고 심각한 독성을 지니고 있음을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남을 헐뜯는 이는 독사보다도 해로우니, 독사는 한번 물면 한 사람을 해칠 뿐이지만, 남을 헐뜯는 이는 한 마디의 말로 세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다. 곧 자신이 그 하나이고, 듣는 이가 하나이며, 헐뜯음을 받는 이가 하나이다.”

 

뒷담화의 다발성은 오늘날 SNS를 통해 그 능력치가 크게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뒷담화의 위험의 크기만큼 그 절제의 보상도 큽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강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확신을 갖고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씀드리지요! 만약 우리 모두가 뒷담화를 하고자 하는 욕구를 다스릴 수만 있다면, 종국에 가서는 모두 성인이 될 것입니다!”(『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에서).

 

원래 우리 영혼에 무거운 짐을 얹는 뒷담화는 자신을 가벼운 존재로 위장하여 우리가 그를 무심결에 행하게 합니다. 그 행함의 결과는 예상치 못한 공동체의 큰 불화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반면에 뒷담화의 절제는 성인이 되는 것에 직접 관여할 정도로 영적 질서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설교집』에서 뒷담화를 절제하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영역으로 하느님께 절실한 도움을 청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구든지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마태 5,22)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야고 3,8). 그러면 모두가 불타는 지옥에 가게 될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시편 90,1) ……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이해합시다. 사람의 혀를 아무도 길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길들여 주실 하느님께로 피신해야만 한다고. 우리가 혀를 길들일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인간 본성 때문일까요?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야고 3,8).

 

이 말씀을 우리가 길들이는 짐승을 놓고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말은 자신을 길들이지 못합니다. 낙타는 자신을 길들이지 못합니다. 뱀은 자신을 길들이지 못합니다. 사자는 자신을 길들이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신을 길들이지 못합니다. 말이나 소, 낙타, 코끼리, 사자, 뱀을 길들이려면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길들려면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2018년 7월 8일 연중 제14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21 교부와 성인 이야기

 

 

세례자 요한의 손가락: 신앙의 롤모델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부르심을 받아 그에 따라 각자의 삶을 가꾸어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 부르심의 중요 요소 중 하나는 우리를 당신께 이끄는 증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증인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알려주신 세례자 요한과 같은 분입니다. “이분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다. 이분을 따르라.”(요한 1, 36)고 말하며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이를 식별하는 일은, 신앙의 여정에 꼭 필요합니다. 부모, 조부모, 친구, 성직자, 수도자와 같은 증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네가 진정으로 참되고 복된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이분을 따르라”고 말하는 세례자의 요한의 손가락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교부들의 삶은 하느님과의 개별적이고 독점적인 관계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훨씬 돋보입니다. 특별히 스승 내지 원로와 제자의 인격적 관계가 중요했고 그에 따른 일화도 많습니다. 사막의 교부의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악령이 불화를 일으키려고 온갖 책략을 꾸몄지만, 두 형제는 여러 해 동안 작은 불화도 일으키지 않고 함께 생활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인내와 겸손에서 경쟁했습니다. 어느 날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한 형제의 눈에 다른 형제의 성덕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 형제는 다른 형제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그 순간부터 그를 ‘형제’가 아니라 ‘사부’로 부르며 자신의 원로로 대했습니다.

 

사막의 수도승들의 중심지가 형성된 곳이면 반드시 원로와 제자의 구분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원로 내지 스승을 중심으로 모여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원형적 구조는 현재의 교회 내지 본당 안에서도 존재하고 온당하게 존재해야 합니다. 교리교사, 대부모가 원로라면 예비신자, 대자녀가 제자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화석화된 대부모와 대자녀의 관계에 놓여 있다면 그를 떠나서라도 나를 예수님께 이끌어 가는 증인을 찾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증인의 기준은 나이도 신앙생활의 경력도 아닙니다. 요한 카시아노는 『담화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이들 모두가 똑같이 열심히 하고 지혜롭고 덕스러운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원로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경지의 완덕을 쌓은 것은 아니다. 규율의 해이로 어영부영 늙어 가는 이들도 많다.”

 

현대의 교회공동체에서 점차 미약해지고 있는 신앙의 원로들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형성이 더욱 절실합니다. 신앙의 원로들은 공동체에게 세례자 요한의 손가락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주변에 당신을 주님께 이끌어 가는 증인을 찾으셨습니까? [2018년 7월 22일 연중 제16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22 교부와 성인 이야기

 

 

군대에서 운동하는 그리스도인

 

19세기의 프랑스 시인인 샤를 보들레르는 『너그러운 노름꾼』이라는 기이한 산문시를 썼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어느 설교자의 말을 통해 오늘날 진보된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악마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경고를 전합니다. “친애하는 형제여, 여러분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가 문명의 진보를 자랑하는 것을 들을 때, 악마의 가장 교묘한 술책은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토록 자신의 존재마저도 숨기려는 간교한 악마의 술책에 맞서기 위해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251-356년)는 끊임없이 싸웠다고 성 아타나시오(295년-373년)는 그의 저서 『성 안토니오의 생애』에 적고 있습니다. 악령에 의한 유혹이나 시련과의 싸움은 구원을 향해 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필연적입니다. 그래서 성 안토니오는 말합니다.

 

“누구도 유혹을 받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유혹을 빼앗아라. 그러면 구원을 찾아 얻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유혹을 각오해야 한다.”

 

『성 안토니오의 생애』에서 성 아타나시오는 늘 유혹과 싸우는 성 안토니오를 ‘운동선수’로 지칭하였습니다. 이 ‘운동선수’라는 표현은 순교자를 일컬을 때 사용하였던 존경의 표현이었습니다. 운동선수가 훈련을 통해 운동 능력을 향상시키듯 성 안토니오는 악령들에 맞선 싸움을 통해 내적으로 강해졌습니다.

 

한편 초기 그리스도교의 세례 훈화와 순교자들의 영성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군사’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한 군대 생활’로 불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교 세력은 물론 자신의 내면의 악의 권세들에 대항하여 전투를 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군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표상은 『성 안토니오의 생애』는 물론 『성 베네딕도의 규칙』 등 초기 수도승들의 문헌에서 그 명백한 자취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 빼고 듣는 사람에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이야기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운명은 그 재미없는 이야기와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군인으로서 그리고 운동선수로서의 표상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 안토니오로 대표되는 수덕의 길은 우리의 길입니다. 유혹이나 시련과의 영적인 싸움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하고 영적으로 무르익게 합니다. 그리고 이 성숙 과정은 평생 계속되기에 이 싸움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평생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2018년 7월 29일 연중 제17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23 교부와 성인 이야기

 

 

부(富)와 부자(富者) 1 - 좋은 부(富), 나쁜 부(富), 무관(無關)한 부(富)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 영화를 일컬어 ‘마카로니 웨스턴’ 혹은 ‘스파게티 웨스턴’이라 합니다. 그 대표작으로는 ‘황야의 무법자’가 있는데, 이 영화의 원제가 ‘좋은 놈, 나쁜 놈, 추한 놈’(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입니다. 10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영화가 나와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약칭 ‘놈놈놈’으로 알려진 이 영화의 원제목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입니다. ‘추한 놈’ 내지 ‘이상한 놈’ 같이 선과 악 양극 사이의 중간에 있는 무심한 듯한 존재는 우리의 흥미를 더 유발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것, 즉 부(富)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던 교부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누군가 많은 재물을 꿰차고 있는 것이 다른 이들의 몫을 부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요한 카시아노는 자신의 저서 『담화집』에서 이들과 다른 시각으로 부(富)를 이해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부(富)에는 세 부류가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즉, 좋은 부(富), 나쁜 부(富) 그리고 중간적인 부(富)가 있다.” 그는 공교롭게도 앞서 소개한 영화 제목처럼 세 가지 부류의 부(富)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수덕(修德)의 열매로서 우리 삶의 축복을 뜻하는 좋은 부(富), 우리 삶에 불행을 초래하는 나쁜 부(富) 그리고 좋고 나쁨에 무관한, 중간에 위치한 부(富), 이렇게 세 부류의 부(富)가 성경에 나타나 있다고 부연하여 말합니다.

 

요한 카시아노는 성경에서 나쁜 부(富)와 연관된 구절들을 제시합니다. “부자들은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었다”(70인역 시편 34,10).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루카 6,24). 한편 그는 좋은 부(富)를 표현하는 성경구절들 중 하나로 시편 112, 2-3을 내세웁니다.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이들의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고 그의 의로움은 길이 존속하리라.”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의 관심을 더 끄는 좋고 나쁨에 무관한 부(富)에 대해 그는 『담화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쁜 부(富) 혹은 좋은 부(富)가 될 수 있는 중간적인 부(富)가 있다. 부(富)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결단에 따라 부(富)의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사도 바오로가 이 중간적인 부의 올바른 사용에 관해서 말한 1티모 6,17-19를 제시합니다. 부자는 부를 겸손한 마음으로 사용하여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나누어 좋은 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에서의 부자처럼 영원한 저승의 불길로 누구든 떨어질 것이라고 요한 카시아노는 경고합니다. [2018년 8월 5일 연중 제18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24 교부와 성인 이야기

 

 

부(富)와 부자(富者) 2 - 좋은 부자, 나쁜 부자 그리고 무관심한 부자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을 보면 부자는 익명으로 라자로는 실명으로 등장합니다. 그 차이를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힙니다.

 

“부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의 이름은 밝히셨습니다. 부자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입에 담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사람들이 몰랐을 가난한 이의 이름은 밝히셨지요. …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부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신 것은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분께서 가난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신 것은 그 이름이, 당신의 지시에 따라 하늘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유에서 부자는 부당하게 축재를 했다거나 그가 라자로의 가난과 고통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부자는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지 않은 채 지옥 불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을까? 성 예로니모가 그 이유를 밝힙니다.

 

“자주색 옷을 입은 그 부자는 탐욕을 부렸다거나 남의 재물을 빼앗았다거나 간음을 했다거나 다른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것이 아닙니다. … 그대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말이 아니오. 그대가 내버리는 것,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이오.”

 

성 예로니모는 라자로에게 부스러기만큼의 관심도 두지 않은 부자의 무관심을 지적한 것입니다. 또한 성 치릴로는 부자의 무관심은 짐승보다 잔인한 인간의 무자비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네, 개들조차 라자로의 종기를 핥으며, 그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가엾이 여겨 돌봐 주었다고 합니다. 짐승들은 아픈 데를 혀로 핥아서 고통을 가라앉히고 종기를 낫게 하지요. 그런데 부자는 개들보다 잔인했습니다. 라자로를 가엾이 여기지도 않고 무자비하게 굴었으니까요.”

 

한편 부자는 오만해지지 말라는 1티모 16,17의 말씀처럼, 성 아우구스티노는 부자의 무관심은 그의 교만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부자의 많은 재물이 아니라 그의 불경과 불성실, 그리고 교만과 잔인함을 나쁘게 보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입증했다고 생각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부자의 라자로에 대한 무관심은 부자 자신이 라자로와 차별된 존재라는 교만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확언합니다. 그렇게 무관심한 부자는 교만과 연관된 무자비하고 잔인한 악의 편에 서 있습니다. 부와는 달리 제3의 혹은 중간적인 부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관심한 부자는 악하고 나쁜 부자입니다. 무관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결국 우리의 겸손에 달려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나와 다르고 나는 그 처지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교만을 벗어버릴 때 우리의 이름은 실명으로 하늘에 기록됩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난민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이 우리의 교만의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의 무관심은 어떤 결과를 맺을까요? [2018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25 교부와 성인 이야기

 

 

마음 지도: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

 

일자무식(一字無識)이란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아는 것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로지 일(一)자만 아는 또 다른 의미의 일자무식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배고픔을 해결하려 문인(文人)으로 가장하고는 어느 부잣집에 기거하게 됩니다. 그는 매일 자신이 유일하게 아는 일(一)자만 쓰면서 오랜 세월을 풍족하게 지냅니다. 시간이 지나도 거지가 시 한수 내놓지 않자 주인이 시문을 심히 재촉하기에 이릅니다. 더 머물다가는 낭패를 입을 것을 알고 거지는 지필묵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멀리 물러가게 하면 깨끗한 마음으로 시 한수 올리겠다고 주인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반복해서 쓸 수밖에 없었던 일(一)자를 힘차게 휘갈기고는 야반도주를 하였습니다. 주인은 의심하던 차에 그가 도주한 것을 알고는 분노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거지가 휘갈겨 남긴 일자가 불세출의 명필임을 깨닫고 그를 찾았으나 찾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이집트 사막의 수도승들은 지식인들도 있었지만, 소수였고 대부분이 가난한 문맹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 모두는 하느님을 뵙기 위해 자신들의 일차적 목표인 마음의 정화를 이루는 일에 전심전력 하였습니다. 문맹 수도승들은 성경을 읽을 수는 없었어도 성경 구절을 외워서 반복하여 되새겼습니다. 어떤 방도를 사용하던 자신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데에 한결같았던 그들은 그렇게 마음의 깊은 곳을 읽는 데에 전문가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자기 이해는 오늘날의 심층 심리학적 이해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집트의 수도승들은 마음 수행을 통해 우리의 정신이 정념과 감정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 카시아노(356년경-435년)는 이를 일컬어 멈춤이 없는 ‘정념의 맷돌’이라 표현하였습니다. 아울러 그러한 정념들과 감정들의 상호작용에 관한 이해도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집트의 수도승내지 교부들의 마음 수행의 총체적 결과로 마음 지도가 그려집니다. 이 마음 지도를 정리한 이는 에바그리오(345/46경-399)입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 마음에는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부정적인 정념과 감정 내지 악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프락티코스』에서 악한 생각들을 여덟 가지의 근본적인 유형으로 분류 정리합니다.

 

“모든 (악한) 생각들을 포괄하는 근본적인 (악한) 생각은 모두 여덟 가지이다. 첫째는 탐식, 그 다음은 음욕, 셋째는 탐욕, 넷째는 슬픔, 다섯째는 분노, 여섯째는 아케디아(나태), 일곱째는 헛된 영광, 마지막으로 교만이다. 이 모든 생각이 영혼을 괴롭히느냐 괴롭히지 않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에 있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영혼 안에서 머물러 있느냐 머물러 있지 않으냐, 격정을 부추기는지 아닌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2018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26 교부와 성인 이야기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과 칠죄종

 

동방교회에 속했던 에바그리오(345/46경-399)는 우리 마음 안에 존재하는 악한 생각을 여덟 가지의 근본적인 유형으로 분류 정리하였습니다. 이들은 탐식, 음욕,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나태), 헛된 영광, 교만 등입니다. 이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은 그의 제자 요한 카시아노(356경-435)에 의해서 받아들여집니다. 이후 카시아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서방 라틴교회에 이를 소개하면서 서방 수도승 전통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 깊이 자리 잡게 됩니다.

 

7세기에 와서 대 그레고리오(540경-604) 교황은 이들을 일곱 가지의 죄로 정리합니다. 그는 슬픔을 아케디아(나태)에 통합하고 헛된 영광은 교만과 같은 것이라 하여 교만으로 통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롭게 시기를 추가하여 일곱 가지의 죄의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늘날의 칠죄종이 정착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866항이 칠죄종에 관한 이런 역사적 과정을 요약 기술하고 있습니다.

 

“악습들은 그와 반대되는 덕에 따라 분류할 수 있고, 또 죄종(罪宗)과 연관시킬 수 있다. 죄종은 요한 카시아누스 성인과 대 그레고리오 성인의 뒤를 이어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으로 식별되었다. 이 악습들을 죄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들이 다른 죄들과 악습들을 낳기 때문이다. 죄종은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이다.”

 

‘죄종’이라 함은 그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죄종은 여덟이 아니고 일곱입니다. 이는 여덟 가지의 악습에서 단순히 하나가 줄어든 것이 아닙니다. 헛된 영광과 교만이 교만으로 합쳐지고, 슬픔은 아케디아(태만)에 들어가면서 둘이 줄게 됩니다. 거기에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시기를 새로이 더하여 모두 일곱이 되었습니다.

 

에바그리오가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을 근본적인 형태로 정리한 목적은 사실 죄의 인식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부정적이고 죄스러운 행동양식들의 본원적 뿌리들을 통찰하여 정화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을 주는 내적 장애, 즉 분노와 우울을 생각하게 됩니다. 교부들이 이해한 여덟 가지의 악습 도식은 현대인이 보이는 행태의 주요 양상들을 거론하고 해석할 여지를 줍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많은 저자들이 교부들이 이해한 방식에 따라 우리 사회의 상처들을 명확히 지적하고 그 치유를 위한 조언들을 아끼지 않습니다. 고대 이집트 수도승의 영성의 체험은 현대인들의 현실적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줍니다. 설혹 모두는 아니어도 영적 여정을 마음먹은 이들에게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2018년 9월 2일 연중 제22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27 교부와 성인 이야기

 

 

탐식 (1)

 

탐식은 분명 음식의 섭취와 관련이 있습니다만 단순히 음식의 과다한 섭취에 관한 것만은 아닙니다. 뚱뚱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현대의 왜곡된 인식은 탐식의 의미를 오해하게 합니다. 뚱뚱한 사람이라고 반드시 탐식하지는 않고 마른 사람이 탐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탐식이라는 말로 우리가 떠올리는 그림이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적 편견과 방송 매체를 통해 형성된 편견에 따르면 뚱뚱한 사람은 마른 사람보다 건강하지 않고 인성도 열등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의 장애로서의 탐식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편견의 지뢰밭을 조심스럽게 통과해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마침 사순 시기였습니다. 일정 기간 지속되는 소식과 단식에 익숙하지 않았던 저는 그 사순 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이 불편함은 이렇게 먹고도 생활에 문제가 없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인 이유로 절제의 길을 한 번도 사순 내내 가보지 않았기에 멀다고 느낀 그 어둑한 길이 두렵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사막의 수도승들은 수도 생활에 들어섰을 때 이와 유사한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강력한 두려움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들은 척박한 사막에서 빵과 소금과 물, 올리브유와 같이 질박한 음식들, 그마저 엄격한 규정으로 제한된 양을 섭취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다이어트 필수식품들인 고기, 과일, 야채를 선호하는 것이 그들 사이에서는 구도의 진정성이 없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이 음식 규정은 그들에게 건강을 해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주변 사람이 건강을 잃고 사막을 떠났습니다. 에바그리오(345/46경-399)와 성 예로니모(347/8-419/20)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사막의 교부들에게 탐식이란 건강 상실의 두려움 때문에 늘 음식을 생각하고 걱정함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갈라지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들의 탐식은 칠죄종의 죄로서의 탐식과는 결이 다른 것입니다. 그들에게 탐식이란 죄라기보다는 극복해야 할 장애였습니다. 다양하지 않은 음식을 소량으로만 섭취하는 것은 그들의 엄격한 규정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수행 생활에 합당한 영양공급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공포는 그들에겐 명백한 현실이었습니다. 에바그리오는 탐식의 유혹이 바로 그런 두려움을 바탕으로 활동함을 알아차립니다. 탐식이라는 악한 생각은 건강에 집착하여 음식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수행자의 일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에바그리오는 그렇게 하느님 생각에 미치지 않고 음식에 미친 듯이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그리스어로 ‘음식에 미친 것’이라는 단어로 탐식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의 제일 첫 번째에 탐식을 두게 됩니다. [2018년 9월 9일 연중 제23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28 교부와 성인 이야기

 

 

탐식 (2)

 

탐식은 여덟 가지의 악습 중에 가장 경미한 것으로 비쳐집니다. 탐식은 인간의 자연 본성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때때로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요한 카시아노는 저서 『담화집』에서 다른 악습들과 달리 탐식을 우리의 자연 본성과 직결된 악습으로 분류합니다. 탐식의 유혹이 생기는 것은 바로 아담 육체를 지니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같은 육신을 지닌 우리는 항상 음식이 필요하고 음식은 보통 우리의 미각에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탐식하고자 하는 생각과 유혹을 완전히 뿌리치지 못합니다. 그렇게 탐식은 인간의 자연 본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더 경계해야 할 탐욕보다도 더 집요합니다. 그렇게 사순 시기뿐만 아니라 평생 그리고 어느 삶의 자리에 있든 탐식과 싸움은 피할 길 없는 우리의 운명입니다.

 

어느 큰 부자가 복음 말씀대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의 수도승이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여 이제 자신은 탐욕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많은 재산이 아닌 빵 한 조각 때문에 동료와 다투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는 자신이 벗어났다 여긴 탐욕보다도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한 탐식의 유혹에 넘어간 자신을 보고 오열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에바그리오는 저서 『악한 생각』 에서 탐식에 관해 말합니다.

 

“음식에 대한 욕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을 기쁨으로 채우지 못한다. 사실 음식에 대한 욕구는 땔감이 계속 공급되어 항상 불 지펴진 화로와 같다. 그릇은 채워지는 데 적당량이 있지만 밑바닥 없는 배는 ‘충분하다’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이 줄기찬 유혹을 펼치는 탐식을 교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해야 할 첫 번째이자 우선적 싸움의 대상이라는 것에 이견이 없었습니다. 탐식의 악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고는 본격적인 영적 전투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선격인 육체적인 욕구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에 비로소 다른 악들과 싸우는 본선격인 ‘올림픽 경기’에 참가하여 영적 타락을 대적하는 경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태오와 루카 복음의 유혹사화에서도 첫 번째 유혹의 내용은 일치합니다. 광야에서 사람이신 예수님은 빵으로 첫 번째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유혹을 이겨내시자 이제 악마는 다른 유혹의 장으로 넘어갑니다.

 

카시아노는 저서 『공주수도승 규정집』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내장을 음식으로 가득 채운 채로 내면의 전투를 버텨내지 못한다. 덜 힘든 (탐식과의) 전투에서 항복한 사람은 다른 더 격렬한 싸움에 결코 적합하지 않다.” [2018년 9월 16일 연중 제24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29 교부와 성인 이야기

 

 

탐식 (3)

 

지독한 구두쇠의 이야기인 ‘자린고비’ 이야기에 나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구두쇠가 반찬비용을 줄이기 위해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반찬 대신 굴비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고 하지요. 『이집트 수도승 이야기』에 비슷한 일화가 등장합니다. 오이를 먹고 싶었던 수도승이 자신의 방에 오이를 매달아 놓고 먹고 싶은 마음이 떠날 때까지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분명 두 일화는 다른 맥락이기는 하나 지독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같은 책에 나오는 또 다른 일화에 따르면 축일 때 초대받은 수도승이 자신에게 제공된 포도주잔을 땅에 내던지며 말했습니다. “이 죽음을 내게서 몰아내라!” 사막의 수도승들의 이런 지독함은 외적인 식생활 환경이 다른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분명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한참 전에 어느 봉쇄수도원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수도자들과 함께 산에서 작업하던 중에 한 수도자가 갑자기 통닭구이가 생각나면서 눈앞에서 아른거려 사라지지 않는다고, 정말 먹고 싶다고, 배가 고프니 기도도 일도 제대로 안된다고 화내듯이 거친 말을 던졌습니다. 그 당시 수도원의 지독한 식단이 더 문제였지만, 그 수도자는 교부들이 우려한 탐식의 전형적인 유혹에 빠진 모습이었습니다. 오래 지속된 음식절제가 하느님께 마땅히 집중해야 할 그의 마음을 흩어버린 것입니다. 정제되지 않은 엄격한 식단이 때로는 우리를 거룩한 것에서 멀어지게도 합니다. 이를 보면 엄격한 음식절제만이 탐식의 유혹을 이겨내는 방법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탐식의 문제를 놓고 참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로 먹느냐’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양』에서 이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무런 탐욕이나 탐식의 악습을 보이지 않고 값비싼 음식을 들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아주 값싼 음식에까지 추잡한 식욕을 갖고 덤비는 일이 있다. 성한 사람이면 주님이 하셨듯이 물고기를 먹지 아브라함의 손자 에사오처럼 불콩죽을 먹거나 심지어 소처럼 보리죽을 먹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짐승이 우리 음식보다 못한 먹이를 먹는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우리보다 더 절제심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에사오(창세 24,42 참조)나 소처럼 절제 없이 먹는 것을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신 예수님의 모습(루카 24,42 참조)에 대비시킵니다. 그는 그렇게 음식에 관한 한 우리가 ‘어떤 것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떤 이유로, 어떤 태도로 먹느냐’에 따라 칭찬을 받을지 비난을 받을지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관점으로 예수님의 식이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렇게 칠죄종 중에서 단 하나, 탐식의 죄를 범한다고 매번 예수님께서 비난받았던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2018년 9월 23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30 교부와 성인 이야기

 

 

분노

 

사막의 교부들은 탐욕적 집착으로부터 해방된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추구하였습니다. 몇몇 이야기들은 이들이 전에 살았던 세상을 완곡하게 풍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들 중에 하나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면서 다툼이 없었던 두 노인에 관한 것입니다.

 

한 노인이 다른 노인에게 제안하였다. "우리도 다른 이들이 하는 것처럼 논쟁을 해 보자고."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것이었다. "나는 논쟁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 그러자 제안을 한 노인은 "자, 내가 우리 사이에 벽돌 하나를 놓을 거야. 그리고 '이 벽돌은 내 거야'라고 말할 참이네. 그러면 자네는 '아니야 그 벽돌은 내 거야'라고 말하게." 이렇게 해서 한 노인이 자신들 사이에 벽돌을 놓고 나서 논쟁을 시작하였다. "이 벽돌은 내 것일세." 그리고 다음 노인이 자신이 맡은 역할대로 "아니야, 그건 내 거야"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첫째 노인이 즉시 수긍하면서 "그래, 자네 것이니 가져가게." 이렇게 해서 두 노인은 다투기를 포기하였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이 이야기는 사막 수도자들의 이상을 특징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달랐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이 이상을 향해 멈추지 않고 걸어갔습니다.

 

우리들은 사막의 수도자들이 가장 어려움을 갖고 싸워야 했던 대상이 성에 관한 것으로 추측하곤 합니다. 그러나 고대의 자료들이 전하는 바는 다릅니다. 성의 문제보다는 분노가 그들에게는 더욱 긴급한 당면 과제였습니다. 분노라는 장애가 걷힌 인간관계가 수도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목표 과제였던 것입니다.

 

분노에 관해 유독 많고도 의미 깊은 언급을 하였던 에바그리오는 저서 『프락티코스』에서 악령들이 우리들의 분노를 부추기는 일에 특히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능력이란 자신의 정체를 모호하게 하여 우리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분노가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아야 우리가 적절한 대응을 함에도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아군처럼 보이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노의 전문가였던 에바그리오가 표현한 분노에 관한 정의는 우리에게도 친숙하게 들립니다.

 

분노는 아주 순식간에 발생하는 정념이다. 분노를 정의하자면 상처를 준 이에게 혹은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되는 이에게 화를 터뜨려 끓어오르게 하는 것이다. 분노는 우리의 영을 계속해서 화로 들끓게 한다. 무엇보다도 기도할 때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의 모습을 떠오르게도 한다. 때때로 분노가 좀 더 지속되면 원한을 품게 되고 밤에 불안 증세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것이 더 진행되면 몸이 쇠약해지고 피폐해져서 독을 품은 맹수들에게 공격당하는 환상까지도 보게 된다. 원한을 품으면서 일어나는 이 결과들을 겪을 때쯤이면 이미 다른 악한 생각들도 함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프락티코스』 11). <끝> [2018년 9월 30일 연중 제26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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