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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의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 (9) 한국천주교 초창기 신앙생활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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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08 ㅣ No.537

[레지오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斷想) (9) 한국천주교 초창기 신앙생활의 특징

 

 

2004년 가을에 안동교구로 성지순례를 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신설본당에 주임으로 나가 성전을 짓고 빚을 거의 다 갚고 몸이 많이 상한 상태에서 안식년을 지내려고 본당을 떠나 있었던 상태였다. 안동지역에서 며칠 묵으면서 도산서원을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곳 전시실에서 유독 눈길을 끌었던 것이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의 성학십도(聖學十圖)라고 하는 병풍이었다. 이것은 어린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면서 성리학의 대강을 강의하고 심법(心法)의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성리학자들의 도설(圖說)에서 골라 책을 엮고, 각 도식 아래 자신의 의견을 서술하여 왕에게 강론했었는데, 그것을 한눈에 보기 쉽게 열 가지의 도식으로 담은 병풍이다.

 

한국 천주교 발상지인 천진암 성지는 실학자 이벽이 1777년부터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권상학, 김성원, 이총억 등의 젊은 선비들과 함께 천주학(天主學)을 연구했던 곳이다. 지금은 천주교 창립선조인 이벽,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문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는 초기 한국천주교 신앙에 참여한 인물들이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에서 이른바 강학회(講學會)를 할 때 모습이 적혀있다. 강학회는 교회사에서 한국천주교 신앙의 발상이라고 하지만, 동시에 유학자 선비로서 수덕생활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 얼음 같은 샘물을 떠다가 세수하고 양치한 다음,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암송하고, 해가 뜨면 경재잠(敬齋箴)을 암송하며, 정오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암송하고, 해가 지면 서명(西銘)을 암송하였다.”라 하여 그들의 수덕생활의 장엄하고 경건한 모습을 보였다. 마치 수도회에서 새벽에 일어나 성무일도 기도로 시작되는 하루일과를 그린 듯하다. 여기에 나오는 바로 이 숙흥홍야매잠과 경제잠, 그리고 서명은 성학십도에 나오는 세 가지이다. 특히 숙흥야매잠은 새벽에 일어나서부터 밤늦게 잠들 때까지 모든 시간을 통하여 나날의 생활을 경건하게 살기 위한 조목들을 제시하였고, 그런 면에서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의 중앙에는 ‘경(敬)’자 하나가 모든 항목의 정신임을 확인시켜준다.

 

“닭이 울어 잠을 깨면, 이러저러한 생각이 점차로 일어나게 된다. 어찌 그동안에 조용히 마음을 정돈하지 않겠는가! 혹은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생각해 내어, 차례로 조리를 세우며 분명하게 이해하여 두자. 근본이 세워졌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안색을 가다듬은 다음, 이 마음 이끌기를 마치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밝게 한다. 엄숙히 정제하고, 마음의 상태를 허명정일(虛明靜一)하게 가질 것이다. 이때 책을 펼쳐 성현들을 대하게 되면,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자와 증자가 앞뒤에 계실 것이다.”(숙흥야매잠도의 내용 중)

 

 

‘의(義)’의 추구는 선비가 가장 강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

 

무엇보다도 한국천주교가 선비들로 구성된 평신도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이들은 또한 천주학에 대한 진리 탐구와 아울러 수덕생활이 병행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초기 천주교의 신앙공동체에 ‘명도회(明道會)’가 있었으니, ‘명도(明道)’란 ‘명덕(明德)’과 같은 의미이다. 이는 곧 “덕(德)을 닦음으로써 도(道)를 밝힐 수 있는 것이며, 하늘도 알아서 섬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들은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한 1,1)라는 구절에서 ‘말씀’과 ‘도(道)’를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었으니, 유교적인 입장에서도 도(道)는 하늘의 뜻에 따른 운행을 의미하는 동시에 진리를 의미하기도 하다. 그 앎이란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으로 이루어진 삶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목숨과도 바꿀 정도의 순교의 열정이었으며 이는 선비들의 의(義)에 대한 확고한 의지에 있었다.

 

“나는 생명을 원하고 또 정의를 바란다. 그러나 만일 양자를 함께 가질 수가 없다면 생명을 버리고 정의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의 현인 맹자의 말이다. 신앙에는 중립이란 없다. 믿느냐 안 믿느냐 양자택일뿐이다. 의와 목숨은 똑같이 중요하지만 순교자는 의를 택한 분들이다. 그들은 인생이 그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세에서 누릴 것 다 누려보고 또 현세적인 행복을 누릴 만큼 누려보고 천국이 있다면 가겠다는 미지근하고 공리적인 사람들에게는 순교는 그만두고라도 아직도 “자신을 기만하는 원욕에 따르는 묵은 사람”(에페 4,22)에 불과하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는 선비가 가장 강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은 ‘의(義)’를 추구하는 정신으로 나타난다. 공자가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고 했다. 그래서 선비정신은 이기심을 넘어선 당당하고 떳떳함을 지닌다. 비굴하지 않고 꼿꼿하며 의심하지 않고 확고함을 지녔던 것이다. 선비의 근본은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일의 마땅한 도리를 확인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비는 학문을 통해 지식의 양적 축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를 확신하고 실천하는 인격적 성취에 목표를 두었다.

 

이처럼 선비는 자신의 덕을 사회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관직에로 나가기도 했지만 관직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관직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펴고 신념을 실현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선비가 권력의 부당성을 비판하면서 견제할 때는 순수한 입장을 지켰으나, 권력의 주체가 되었을 때 선비는 엄청난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비가 선비의 신념과 도리를 넘어서 실질적인 권력을 지녔을 때는 지배자로서 서민대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권력의 도구나 하수인이 되었던 것이다. 더러 이들은 역사적으로 정치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는 선비의 진실한 모습의 상실이자 타락상이다.

 

 

평신도 지도자의 소양을 선비에서 찾았으면

 

뜬금없이 선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교회 내에 사목자와 협조자인 평신도 봉사자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사목자와 사목의 협조자로서의 지도자 양성이라는 취지로 마련된 많은 교육들과 특강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이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갖게 해줄 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봉사자들에 대한 자질과 소양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천주교는 평신도로부터 시작되었고 자기들은 순교자들의 후손이라고 자부하면서도 그 자질과 소양을 어디서 찾을 것인지. 이들이 사목자에게 실망하여 뒷전으로 물러섰을 때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 그리고 현재 어떤 직책을 맡고 있을 때 어떤 자세로 봉사하고 있는지. 아울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신자들은 평신도로서의 어떻게 지내는지. 한국천주교 평신도 사도직에 있어서 평신도 지도자나 봉사자에 대한 소양에 대한 것을 선비에 대한 생각으로 풀어가 보았으면 하는 심정이다.

 

옛날 신학생 때 우연히 이화여대 교육관에 가본 적이 있었다. 교육관 입구에 희랍어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는 구절이 쓰여 있었다. 과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 아니면 진리가 우리에게는 불편한 진실이 되지는 않는지, 아니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과 진리를 착각하며 살지는 않는지….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9월호, 이동훈 시몬 신부(서울대교구 상설고해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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