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7일 (목)
(녹)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성경자료

[신약] 예수님 이야기22: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루카 6,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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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16 ㅣ No.3751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22)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6,12-16)


간절한 밤샘 기도 후 12사도를 임명하시다

 

 

-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작 ‘사도들을 부르심(Calling of the Apostles)’ 중 일부, 1481, Fresco, 349 x 570 cm , 시스티나성당, 바티칸.

 

 

이번 호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뽑아 사도로 세우신 이야기를 살펴봅니다.(루카 6,12-16)

 

예수님은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6,12) 하느님께 기도하러 굳이 산으로 나가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집에서는 안 되나요? 성경에서 산은 광야와 함께 기도하는 장소, 곧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또 산으로 나간다는 말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 마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고 따라서 일상에서 탈피한다는 것입니다. 

 

산으로 가신 예수님은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밤을 새우며 기도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혹은 간절한 뭔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밤을 새우며 기도할 까닭이 없습니다. 밤새 기도하신 예수님은 날이 새자 비로소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러고는 그들 가운데 열둘을 뽑아 사도로 부르십니다.(6,13) 이제야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워 기도하신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를 선택하시기 위해서였지요. 

 

‘사도’는 ‘사명을 띠고 파견된 이’를 말합니다. 유다교에서는 ‘파견된 이는 파견하는 이와 동등하다’는 원칙이 통용됐다고 합니다. 유념해야 할 것은 파견된 이가 파견한 이와 동등하다는 근거는 파견된 이 곧 사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사도로서 수행하는 사명, 곧 파견한 이가 부여하는 사명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곧 온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또한 ‘완전함’을 나타낸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온 이스라엘, 온 세상에 당신의 사명, 곧 아버지의 뜻대로 세상을 구원할 사명, 복음 선포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도록 열두 사도를 선택하셨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듯이 중차대한 일을 맡을 사도를 선택하고자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것입니다.

 

루카는 이렇게 열두 사도를 뽑기 위한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를 전한 다음 열두 사도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합니다.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6,14-16)

 

이제 이 열두 사도를 차례로 살펴봅니다. 우선 시몬 베드로입니다. 원래 이름은 시몬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이름을 지어 주는 사람이 이름을 받는 사람에 대한 권한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 새로운 소명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심으로써 시몬에 대한 권한을 지니시고 그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소명은 ‘베드로’ 곧 아람어로 ‘케파’라는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바위, 반석이라는 뜻이지요. 베드로를 반석으로 곧 기초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시몬은 ‘들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루카는 열두 사도의 두 번째로 안드레아를 듭니다.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으로 형 시몬과 필립보와 함께 벳사이다 출신입니다.(요한 1,44) 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 북단의 도시로, 지금은 폐허가 되고 유적만 남아 있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로 거명되는 야고보와 요한 역시 형제간으로 갈릴래아의 어부 출신입니다. 이 두 사도에게는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인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다혈질적이고 과격하다는 뜻이겠지요. 큰(大) 야고보라고 하는 이 야고보는 열두 사도 가운데 제일 먼저 순교했고(사도 12,2), 사도의 유해는 우여곡절 끝에 순례길로 유명한 스페인의 서북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성야고보 대성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인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는 루카복음에서 여기에만 나옵니다.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필립보는 요한복음에 따르면 친구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요한 1,44-45) 바르톨로메오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타나엘과 같은 인물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을 행하신 카나(요한 2,1-11)에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를 기념하는 성당이 있지요.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인 마태오와 토마스 역시 루카복음에서는 이곳에서만 나옵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마태오가 세리였다고 합니다.(마태 9,9; 10,3) 토마스는 ‘쌍둥이’라고 불리는데 과단성이 있고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을 지닌 것 같습니다.(요한 11,16; 14,5; 20,24-28 참조) 

 

아홉 번째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고 성경학자들은 봅니다. 마르코복음 15장 40절에는 “작은 야고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 야고보와도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에 나오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갈라 1,19) 또는 “야고보”(1코린 15,7)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알패오의 아들”은 마르코복음에서 ‘세리 레위’로 나옵니다(마르 2,14). 세리 레위는 또한 루카복음(5,28)에도 등장하지만, 이 레위가 아홉 번째 사도인 알패오의 아들 야보고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리 레위는 마태오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부르신 마태오 복음 기사(마태 9,9-13)가 마르코복음 2장과 루카복음 5장의 세리 레위를 부르신 기사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열 번째는 열혈당원 시몬입니다. 열혈당원은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은 로마 제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이들의 집단입니다. 열혈당은 기원후 6년쯤 갈릴래아 출신의 유다가 주도한 반란에서 시작합니다. 이 내용은 사도행전 5장 37절에 짧게 언급되고 있지요. 

 

열한 번째 사도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입니다. 그런데 같은 열두 사도 선택을 전하는 마태오복음(10,1-4)과 마르코복음(3,13-19)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나오지 않고, “타대오”라는 이름만 나옵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아들과 타대오가 같은 인물인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다만 마태오복음을 손으로 베껴 쓴 몇몇 사본에는 타대오 대신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표기돼 있다고 하지요. 그래서 타대오가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동일인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마지막 열두 번째는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바로 그 유다지요. ‘이스카리옷’이 무슨 뜻인지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1) 유다 남쪽의 지명을 가리키는 ‘크리옷 출신’(여호 15,25 참조)이란 뜻 2) ‘예리코’ 출신의 뜻 3)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에게 붙인 ‘거짓말쟁이’라는 뜻 4) 열혈당원에 해당하는 라틴 말 ‘시카리우스(암살자, 자객)’의 셈족말로 음역한 것 등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는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산으로 나가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요?

 

2)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소명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 때 모두 새로운 이름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지체로 사는 소명입니다. 우리는 이 소명을 어떻게 새기며 실천하고 있는지요?

 

3) 제자들 가운데 열두 명이 사도로 파견된 것처럼, 신자들 또한 사도로서 우리 삶의 현장에 파견됩니다. 이것이 평신도 사도직입니다. 우리는 평신도 사도직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요?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7월 16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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