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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를 읽어 주는 남자: 명성, 그 6일의 기록 -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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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18 ㅣ No.978

[영화를 읽어 주는 남자]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지면을 통해 여러분께 인사를 드린 지도 벌써 한 해가 지났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실 때쯤이면 이미 새해가 시작되었겠네요. 기쁘고 행복한 새해 맞이하셨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제가 읽어 드릴 영화는 「명성, 그 6일의 기록」입니다. 1997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1987년 6월 항쟁 중 벌어진 6일 간의 명동성당 농성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는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공교롭게도 저는 지금 대통령 탄핵 소추안 의결을 몇 시간 앞둔 국회 앞에서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영화는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선출대회에서 노태우 후보가 선출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 시각, 퇴계로 일대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투석전을 벌이는 시위대의 모습이 교차하며 나옵니다. 당시 대통령 직선제를 열망하는 시민들은 국민평화대행진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날인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결의대회를 하던 대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면서 평화 대행진의 양상은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달라지기 시작했고 경찰의 강경진압에 밀리던 시위대는 결국 명동성당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계획에 없던 명동성당 농성투쟁의 시작입니다. 영화 「명성, 그 6일의 기록」은 6월 10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진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재구성하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전반부는 계획에 없던 투쟁이 어떻게 질서를 갖추고 전개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당시 투쟁의 지도부였던 국민운동본부는 폭력투쟁의 반작용을 우려하며 농성대에게 자진 해산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밤을 새워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농성을 이어갑니다. 조직되지 않고 우연히 모이게 된 이들은 스스로 임시 집행부를 꾸리며 농성을 이어나갑니다. 날이 밝고 경찰이 계속해서 농성대를 압박해옵니다. 명동성당이 전투경찰의 군홧발에 짓밟힐 지경에 이르자 참다못한 성당 측의 항의로 경찰은 더 이상 진입하지 못합니다. 이는 천주교가 농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기 농성을 우려해 명동성당을 강제 진압하기 위해 천주교 지도부와 접촉하려는 정권의 시도는 추기경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습니다. 농성대는 점점 시민들의 연대와 지지로 힘을 얻어 당시 반독재 투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명동성당 울타리 안, 그 곳의 주체는 정치엘리트가 아니었습니다.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이 스스로 조직화되어 목숨을 걸고 싸웠고, 당시에 오갈 곳이 없어 성당에 천막을 짓고 살던 상계동 철거민들이 그 시위대들을 먹이고 재웠습니다. 시민들이 보내준 물품을 모두가 함께 나누며 아쉬움 없이 지냈습니다. 그곳에서 보낸 6일은 계급도 소유도 없는, 신념을 함께하는 이들이 모인,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으로 돌아간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농성의 해산과정과 이후 6월 항쟁이 마무리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농성을 지속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았음에도 긴 시간의 회의 끝에 해산 결정이 났습니다. 이후 6?29 선언을 얻어내었지만, 7월 5일에 이한열이 사망하고 정권은 그의 추모제를 원천봉쇄하려 했습니다. 이 사건이 그 해 말에 실시될 대통령 선거의 전조였다는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영화의 시점인 10년 후,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압니다.

 

감독은 어느 지면을 통해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1987년 당시 명동성당 농성에서 슬그머니 발을 빼고 말았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채의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면서 그가 사로잡히게 된 물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농성이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는 14일 무렵, 농성의 폭력성 시비도 없어졌고 강제 진압의 위험도 수그러진 그 즈음, 국민운동본부나 성당 측은 왜 그토록 강경히 농성대를 해산시키려 했는가? 해산을 전혀 생각 않던 농성대가 해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농성대의 한계, 당시 운동지도부의 한계는 어디까지였을까? 만약 해산을 하지 않았더라면 강제 진압이 되었을까? 그렇다면 명동농성과 6월 항쟁은 어떻게 발전했을까? 10년 후인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역사의 가정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아쉬움과 의문들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은 그때의 치열한 아름다움에 비해 지금의 현실이 너무 암울하기만 하며 우리가 꿈꾸었던 세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6월 항쟁이 지나간 10년 후, 감독이 영화를 만들며 갖게 된 질문은 그 이후의 역사를 아는 우리에게는 더 큰 고민거리를 던져 주고 있는 듯합니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스크린이라는 작은 창으로 세상을 보여주는 도구입니다. 현실의 조각들을 재구성하여 의미 있는 이야기로 직조해 관객들에게 제시합니다. 그것이 유효한 통찰을 제시할 때에만 영화는 계속해서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이 글이 완성되고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시점에 계실 여러분께 이 글이 어떻게 읽혀질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만큼 긴박한 역사적 시점을 우리가 살다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광장으로 모였고 촛불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권리를 외쳤고 연대했습니다. 아마 현재 시점에서 영화 「명성, 그 6일의 기록」이 가지는 생명력은 이러한 것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승리했다고 느낄지라도 그것이 승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항쟁의 시대가 지나고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질 때 되찾은 주권을 다시 노리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의 눈은 언제나 우리가 권력을 위임한 자들에게 향해 한다는 것을.

 

* 영화 「명성, 그 6일의 기록」은 각종 포털 사이트, IPTV, 디지털 케이블, 인디플러그 등에서 VOD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제작 푸른영상, 배급 시네마달.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6년 겨울호(Vol. 36), 이창민 세례자 요한(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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