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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18: 선교사 측근 양반 신자들의 행패에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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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01 ㅣ No.1596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18) 선교사 측근 양반 신자들의 행패에 맞서다


선교사들의 양반 중심의 교회 운영, 불화의 불씨 돼

 

 

- 최양업 신부는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초대 교회처럼 산속 교우촌에 화목하게 사는 신자들을 좋아했다. 사진은 배티성지에 조성된 옛 신학교터. 리길재 기자.

 

 

최양업 신부는 성경 속 초대 교회처럼 신자들이 살아가길 소망했다. 반상(班常)의 구분도, 차별도 없이 모두가 평등하며 신앙 안에서 화목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하는 공동체를 희망했다. 그래서 최 신부는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산속에서 교우촌을 이루고 사는 신자들을 좋아했다. 최 신부는 이들을 ‘열심한 신자’라고 불렀다. 

 

“신자들은 거의 모두 다 외교인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속에서 외교인들과 아주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거의 다 교리에도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으로 잘 지키고 삽니다. 그러나 평야 지대인 고향에서 친척들과 외교인들 사이에 섞여 사는 신자들은 대체로 교리에 무식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더 열심한 신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죄악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1850년 10월 1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그러나 당시 조선 교회 현실은 최 신부의 바람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신자 간 갈등과 불만이 극심해 와해할 조짐을 보였다. “우리 포교지의 상태는 신자 중에서 신분의 계급 차이로 서로 질시하고 적대시하므로 분열이 일어나서 큰 걱정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덕과 형제애가 부족하고, 계속되는 논쟁과 암투와 증오로 신자 공동체가 와해하고 비건설적으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이 폐단을 시정할 무슨 대책은 없는지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우리 포교지에 큰 손실을 초래할 것입니다.”(1854년 11월 4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서양 선교사들의 양반 중심 교회 운영이 갈등의 불씨였다. 최양업 신부 귀국 전 조선 교회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사목했다. 페레올 주교는 서울과 경기도를, 다블뤼 신부는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 지역을 맡아 사목했다. 최양업 신부 귀국 직후인 1850년 초 두 선교사는 모두 병에 걸려 있었다. 특히 다블뤼 신부의 병세가 위중해 최 신부가 그의 사목지를 대신 맡았다.

 

- 리델 주교가 그린 빗속의 가마 행렬. 페레올 주교를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은 사목 여행 중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양반 신자와 건장한 신자와 동행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박해시대 교우촌을 찾아가는 서양 선교사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박해자와 비신자들의 눈을 피해 상복을 입고 한밤중 외딴길을 이용해 몰래 교우촌을 찾아가는 선교사의 모습을 일반적으로 상상한다. 하지만 현실은 사뭇 달랐다. 양반 신자와 완력을 쓰는 이들을 대동해 말과 가마를 타고 요란 법석하게 다녔다. 선교사들이 박해자의 눈을 피해 안전하게 사목 여행을 하기 위해선 이들의 든든한 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품을 하나도 잃지 않고 어디든지 양반 행세를 하며 다녔어. 그날부터 우리는 계속 우리가 가는 주막마다 방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을 몰아내었지. 그러면 어떤 때는 그 가엾은 사람들은 추위에 몹시 떨어야 했어.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서 자야 하니까. 난 마음속으로 그들을 불쌍하게 여겼지.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어? 이렇게 하는 것이 불행한 만남을 피하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걸.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야말로 세르베로(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을 지키는 머리가 셋 달린 개)로 행동했지. 엄한 말투로 말하고 가끔은 협박도 하고, 조선의 양반들이 평소에 하는 대로 했어.”(다블뤼 주교, 1848년 8월 동생에게 보낸 편지)

 

문제는 선교사들의 양반 수행원들이 교우촌 신자들에게까지 위압적으로 행세했다는 것이다. 교우촌 신자들은 선교사들의 사목 방문 때마다 양반 수행원들 행패에 모욕을 감수하며 접대해야 했기에 불만이 컸다. 

 

“페레올 주교님이 생존하셨을 때 신자들 사이에 말이 많아 주교님을 원망하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페레올 주교님께서 당신을 보좌하는 복사들을 잘못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 복사들은 크게 비난받을 짓을 많이 범하고서도 양반임을 내세워 항상 너무 거만한 행세만 부리므로 모든 교우한테 미움을 샀습니다. 그러나 유독 페레올 주교님께서는 그들만 사랑하고 신임하시어 그들하고만 모든 일을 의논하셨습니다. … 페레올 주교님은 양반 계급만 너무 편애하시어 이미 너무나 비참하고 억눌려 있는 일반 서민들을 더욱 억누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자들 사이에 나날이 더욱 불화가 심해지고 많은 이들이 의분을 느끼고 자포자기에 빠졌습니다. 또한, 교우들의 열심이 나날이 감퇴되어 가고, 악한 사정이 더욱더 악하게 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1857년 9월 15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선교사 측근들의 전횡을 보다 못한 최 신부는 페레올 주교에게 직접 그들의 폐단을 지적했다. “제 생각에 이를 그대로 두면 주교님께도 해로울 것이고 일반 교우들에게도 손해가 되겠기에, 주교님께 여러 번 서한도 올리고 직접 면담하면서 그들을 내보내시라고 진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저는 주교님께 큰 꾸중만 들었고, 저 복사들로부터는 큰 미움을 샀을 뿐이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최 신부는 조선의 양반 제도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고 백성들의 온갖 비참함의 원인으로 인식했다. “조선의 양반 제도 아래에서는 형제의 우애와 애덕이란 것이 있을 수 없고, 천부적 인권은 완전히 무시됩니다. … 그리스도의 정신에도 위배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실행으로 항상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들의 편을 드시고,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에게는 혹독하게 대하셨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는 조선 사회에 만연한 고질적인 신분제를 반대했다. 신분 차별 없이 그 사람의 출생 성분을 따지지 않고 재능과 인격만으로 평가받는 사회를 희망했다. 그래서 그는 측근에서 시중드는 복사들 말만 듣고 판단을 그르치거나 그릇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자신과 신자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제대로 익힌 다음 선교사를 파견해줄 것을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정식으로 요청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월 1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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