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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신약] 이스라엘 이야기: 진복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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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02 ㅣ No.3205

[이스라엘 이야기] 진복팔단


하늘나라의 ‘참행복’ 선언… 예수 가르침의 절정



- 릴래아 호수가에 위치한 진복팔단 기념성당.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말은 ‘대박 나세요’ 또는 ‘부자 되세요’였던 것 같다. 세상 재물은 한정돼 있으니 모두 부유해질 수는 없을 텐데, 행복이 대박과 부에 달린 듯 몰아가는 현상이 조금은 걱정스럽다. 거짓 행복과 참행복이 뒤섞여 혼란한 요즘, 예수님이 선언하신 ‘진복팔단眞福八端’(마태 5,1-12)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된다.

주님이 참행복을 선언하신 자리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의 한 언덕으로 전해진다. 초원이 양탄자처럼 넓게 펼쳐진 곳으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빵과 물고기 기적 기념 성당’도 근처에 있다. 예수님은 군중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산에 올라 가르치셨다. 언뜻 보기에 아주 높은 산은 아니지만, 갈릴래아 호수에서는 높은 축에 속한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신 까닭은, 당시 유다인들이 산을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산은 하늘과 가깝다는 상징성을 띤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 올라 십계명을 받았고(탈출 24,12), 엘리야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해 참하느님을 증명했다(1열왕 18장). 예수님은 타보르 산으로 전해지는 정상에 올라, 당신의 참모습을 보여 주셨다(마태 17,1-9). 특히 예수님이 가르치신 참행복, 곧 진복팔단(마태 5,1-12)은 모세의 십계명에 맞먹는 무게를 가졌으며, 마태 5-7장에 걸친 ‘산상수훈’의 서두로 나온다. 진복팔단이 산상수훈의 첫 가르침이라는 사실에서도 그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사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 모습은 여러모로 모세를 연상시킨다. 마태 1-5장이 더욱 그러하다. 헤로데의 핍박에 아기 예수님이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신 사건은(마태 2,13-15.19-23) 모세가 이집트 탈출 뒤 백성을 이스라엘 입구까지 이끈 경로와 유사하다. 헤로데가 유다인들의 임금이 탄생할 것을 두려워해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사건은(마태 2,16-18) 히브리인들의 번성이 두려워 사내아이들을 죽인 파라오를(탈출 1,22) 생각나게 한다. 헤로데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어린 예수님은 파라오의 핍박에서 목숨을 부지한 어린 모세를 연상시킨다(탈출 2,1-10). 그리고 진복팔단은 십계명을 떠올림으로써 공통분모의 절정을 이룬다. 그런데 루카 복음(6,17-23)은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서 참행복을 가르치셨다고 전한다. 이 차이는 마태오가 유다인들을 겨냥한 데 비해, 루카는 이방인들을 위해 쓰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곧, 루카 복음은 예수님이 이방인들을 향해 내려가신다는 의미를 강조하려 했던 것 같다.

플헤데릭스보그성 국립박물관에 있는 칼 하인리히 블로치의 작품 ‘산상수훈’.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산 위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5,1). 당시 현인들이 가르칠 때 자리에 앉던 관습과 동일하다. 그러자 제자들이 ‘다가왔는데,’ 이는 스승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를 묘사한다. 산까지 따라온 군중은 설교가이자 기적 베푸는 이로 유명한 라삐의 말씀이 궁금했지만, 사실은 배가 고파 뭘 좀 얻어먹으려는 희망에 또는 너무 아파서 치유를 바라고 온 이들이 태반이었을 것이다. 이런 군중에게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한 가르침으로 희망을 주신다. 가난하거나 아픔이 있는 자가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더 쉽다고(마태 5,3-4). 여기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가난은 물질적 빈곤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포함하는 말이다. 이사 61,1에 ‘가난한 이들’이 ‘마음이 부서진 이들’의 동의어로 나오는 까닭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로마 식민지 생활을 하던 그때는 주리고 병든 자들이 많았다. 기댈 데라곤 하느님밖에 없는. 구약성경은 하느님을 가련한 이들의 보호자로 소개한다(시편 9,13 34,7 등). 예수님도 이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는 내세에만 들어가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장소에 관계없이 ‘하느님과 함께 함’을 뜻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래서 먼 미래가 아닌, 현재형으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다(마태 5,3.10). 사실 부족함이 없으면 절대자를 찾으려는 마음도 사라지지 않나? 고통 중에 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현존을 바라고 구하게 되니, 하늘나라가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얻고자 하는 한 가지는 행복이다. 그런 우리에게 진복팔단은 결핍이나 역경이 불행의 동의어가 아님을 가르쳐 준다. 역경은 성숙이라는 열매를 주고, 조물주와 함께 하려는 마음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복은 갑자기 터진 대박이나 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변에 숨어 있으므로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아는 지혜가 최고의 지혜이며, 참행복의 원천이 아닌가?

김명숙(소피아) -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1일, 
김명숙(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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