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성경자료

[구약]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이사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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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12 ㅣ No.3210

[성경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이사야는? (1)

 

 

이사야는 어떻게 예언자가 됩니까?

 

그의 선택은 남달랐습니다. 이사야는 주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자 망설임 없이 곧바로 받아들입니다. 이러저러한 구실이나 핑계를 대며 소명을 거부하거나 피해보려 했던 다른 ‘주님의 사람’들과 달리 처음 찾아온 기회를 그대로 수용합니다.

 

 

다른 이들의 소명사화 몇을 꼽아본다면? 

 

모세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분의 소명을 거부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탈출 3,11) 모세는 소명을 피하기 위하여 핑계를 대기도 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하였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하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탈출 4,10) 그는 자신이 적격자가 아니니 다른 사람을 선택하라고 주님께 조르기도 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탈출 4,13) 

 

 

판관 기드온은? 

 

가문에서 차지하는 자기 집안의 위치가 낮다는 점과 기드온이 집안에서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소명을 피하려 듭니다.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그에게 먼저 말씀하십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예레 1,5) 그러한 주님 말씀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말재주가 없다는 구실을 들이대며 소명을 일단 거부합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이사야는 소명에 어떻게 응답합니까? 

 

이사야 자신의 고백을 들어봅니다.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이사 6,8) 이사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파견해달라고 주님께 아룁니다.

 

 

이사야는 소명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그는 하느님께서 죄인인 자신에게 값없이 건네주시는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어느 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시를 통하여 옥좌에 앉아계시는 하느님을 뵙고 나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말하였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이 고백에서 이사야가 죄에 물든 자신의 처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한 이사야가 예언자로 소명 받을 자격이 없다는 자신의 입장을 벌써부터 꿰뚫어보고 있었음이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소명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가 하느님 자비로 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정화과정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이사 6,7) 

 

 

정화는 무엇입니까? 

 

정화는 하느님께서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심으로써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까마득히 인류를 초월하시는 지고의 하느님과 비천한 처지의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장애를 그분께서 친히 치워주십니다.

 

제아무리 힘센 자라고해도 인간은 누구나 지고의 하느님 앞에 두려움을 느끼며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그 자신이 저지른 크고 작은 죄악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공포에 떠는 인간? 

 

첫 인간부터 그러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 3,8)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협하셔서가 아닙니다. 인간 내면의 세계, 곧 양심이 죄악에 물들었음을 자기 스스로에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소명의 특징은? 

 

하느님께서 혼자 중얼거리듯 자기 스스로에게 하시는 말씀을 이사야가 엿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이사 6,8ㄴㄷ) 바로 그때 이사야가 하느님의 직접적 부르심이라기보다는 사실상의 ‘하느님 혼잣말에’ 응답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ㄹ)

 

이와 같이 이사야 소명의 특징은 파견할 사람을 그분께서 직접 부르시지 않고, 간접적 방식으로 부르신다는 데 있습니다. 곧 영원하신 분께서, 곁에 있던 이사야로 하여금 그분의 뜻을 파악하도록 분위기를 마련해주신 다음에 그 자신이 예언직을 자원하도록 이끌어주신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이사야가 본 하느님 환시는? 

 

그는 자신이 소명 받은 시기를 분명히 밝힙니다.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이사 6,1)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우찌야 임금이 기원전 740~739년경에 세상을 떠나므로 이사야가 소명 받은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예언자는? 

 

자기 스스로 나서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불러주시어 그분으로부터 그분이 원하시는 이들에게 파견되는 자입니다. 따라서 예언자는 인간 역사를 초월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의 시점에서 그분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일정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역사적인 존재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소명 시기를 분명히 밝힙니다.

 

 

이사야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주님을 뵈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분 모습을 구체적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뵈었다.’고 명백히 고백하면서도 그분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용어는 단 한마디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현실 속에서도 아니고 환시 중에 본 것조차도 ‘주님 자신’이 아니라 그분 언저리, 곧 주변상황뿐이었던 것입니다.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계신 영원하신 분을 보았다고는 하지만 실상 환시 속에서조차도 그분 옷자락만을 바라본 것이 그저 전부였습니다. 

 

 

이사야가 본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요? 

 

당시 주변에서 가장 큰 건물은 물론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또한 이 성전은 그 부근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성전조차도 하느님은 물론이고 그분 옷자락을 담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크심, 그분의 초월성을 대변해주는 장면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11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

 

 

[성경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이사야는? (2)

 

 

이사야의 하느님 체험은?

 

다음 구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사랍(천상의 존재)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이사 6,3)

 

이는 이사야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본 환시 중의 한 장면입니다. 우리말로 ‘거룩하다’로 번역하는 히브리말 ‘까도쉬’는 먼저 다른 존재와 구별됨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다’는 말은 그분은 인간을 비롯하여 다른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분이심을 뜻합니다. 천상의 존재들조차 그분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얼굴을 볼 수 없는 이유는? 

 

그분 얼굴을 직접으로 보면 죽는다는 전통에 따른 표현입니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 33,11) “그래서 마노아는 아내에게 말하였다. ‘하느님을 뵈었으니 우리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오.’”(판관 13,22)

 

 

하느님은 인간과 뒤섞일 수 없는,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라면? 그럼에도 그분과 인간의 통교가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인간과 동떨어진 채로 순수 초월적인 존재로만 머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초월적인 존재이면서도, 아니 그런 존재이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인간에게 다가오시어 우리와 함께 대화하시고 행동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요한은 훗날 영원하신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쉽게 요약해서 정의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1요한 4,8.16)

 

 

인간은 그토록 거룩하시며 지존하신 하느님 앞에서? 

 

크게 두 가지로 반응합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움에 휩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측면을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가 환시 속에서 바라본 사랍들의 모습에서 엿보게 됩니다. 천상의 존재들인 사랍들이 한편으로는 날개 둘로 자신들의 얼굴을 가리고 날개 둘로는 발을 가리며 나머지 두 날개로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얼굴을 가렸다는 것은 영원하신 분을 조금도 바라다 볼 수 없도록 눈 주변을 몽땅 가렸다는 뜻이고, 발을 가렸다는 것은 맨 살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도록, 곧 인간의 몸 전체를 다 가렸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사랍들의 모습을 정리하면?

 

하느님 면전에서 천상의 존재들조차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분을 조금도 바라보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천상의 존재들인 사랍들은 지존하신 분 주변을 돌면서 거침없이 기쁨의 찬가를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끊임없이 외쳤던 찬미소리는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였습니다.

 

한편으로 지존하신 하느님 앞에 공포에 떨 수밖에 없는 존재가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께 찬송가를 읊어드리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하느님 앞에 두려워 떠는 인간은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받아 누리는 축복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한껏 부르게 됩니다.

 

 

그분을 갑자기 만날 때 인간의 반응은? 

 

초월적 존재인 지고의 하느님을 만날 때 인간은 자연스레 겁에 질리거나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이사야가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환시 속에서 얼떨결에 지존하신 분을 뵙게 된 이사야는 부르짖습니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준비 없이 그분을 만난 인간은 그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아니 그 누가 그분을 만나기에 합당한 준비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그분을 만나게 되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돌이켜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지존하신 그분 앞으로 내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분께서 내게 가까이 다가오실수록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철저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깨달음은 한마디로 ‘나는 더러운 존재다’라는 인식으로 요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나는 - 내가 진실을 향한 존재라면 - 이사야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이사야는 무엇을 고백합니까? 

 

그는 먼저 자신이 더러운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집단 전체에 대한 고백을 합니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이 집단 전체에 대한 고백 안에서 이사야는 그가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자신이 근본적으로 영원하신 분께 부당한 존재임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근본적으로 부당한 인간이? 

 

티 없으신 지고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 편에는 전혀 없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열쇠는 오로지 거룩하신 하느님께만 있습니다. 그 열쇠가 바로 지난번에 본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영원하신 분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막혀있는 장애물, 곧 죄악을 씻어주시는 정화입니다.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6,6-7)

 

 

영원하신 분을 뵐 자격이 없는 조금도 없었던(6,5) 인간 이사야가?

 

드디어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정화를 통하여(6,7) 그분의 예언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6,8)

 

 

이사야가 선포해야 할 내용은? 

 

예언자들이 흔히 선포하는 회개와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곧 이사야가 처음으로 부여받은 예언은 평범한 것이 아니라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었습니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6,9-10)

 

 

도대체 이게 무슨 예언입니까? 

 

일반적으로 예언자가 선포해야 할 내용의 정반대로 보입니다. 내용이 뒤집힌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이사야가 평생 외쳤지만 자신을 거부하는 백성의 모습을 총정리해주는 내용이라고 해석합니다. 백성이 그의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결국 벌을 받게 되었다는 해석입니다. 그리하여 이사야의 예언활동은 목덜미가 뻣뻣한 백성 때문에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음을 요약해준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꾸짖으시는 ‘저 백성은’(6,9-10) 누구입니까? 

 

다음 구절이 답을 준다고 봅니다. “그들은 비파와 수금, 손북과 피리 소리와 더불어 술을 마셔 대면서 주님의 업적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주님의 손이 이루신 일에는 눈도 돌리지 않는다.”(5,12)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12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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