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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구약]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새로운 가난과 변방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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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22 ㅣ No.3953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새로운 가난과 변방의 탄생

 

 

연재를 시작하며

 

토판이나 신상 등 고고학적 유물을 볼 때마다 드는 느낌이 있다.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과 고대 이스라엘의 외형적 모습은 전문가의 눈에도 엇비슷해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깊이 공부하고 그 뜻을 헤아리면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는 참 독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런 독특함의 한가운데에 예언자들이 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외형적으로나(사회, 종교) 내면적으로나(신학)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예언자가 전면적으로 활약한 시대는 대략 유배 이전인 왕정 후반기와 유배 시기, 유배 이후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필자는 북왕국의 경우는 오므리 왕조 이후를, 남왕국의 경우는 히즈키야와 요시야 개혁부터 ‘왕정 후반기’로 보고 예언자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작은 성공으로 변방이 탄생하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자면, 고대 이스라엘은 ‘지정학적 요충지의 약소국’이자 ‘고대 근동 세계의 상대적 후발 국가’였다. 대제국들은 이스라엘 같은 작은 나라를 의도적으로 무시하였다. 약소국인 이스라엘이 성취한 부와 권력은 초라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성공이라도 백성을 부패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빈부의 격차가 커졌고, 그 결과 하느님 백성의 내부에 ‘변방’이 탄생했다. 본디 평등한 공동체가 계급 사회가 된 것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 그동안 연구가 많았다. 수많은 연구를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고전적인 견해다. 하느님께서 열두 지파에 골고루 땅을 배분하여 주신 것이(여호 13—21장 참조) 이스라엘 고유의 토지 소유권 제도였다.

 

그런데 왕정 후반기에는 가나안의 불평등한 토지 소유권 제도가 도입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본디 평등한 이스라엘의 제도’와 ‘본디 불평등한 가나안 제도’를 대립시키는 차별적 시각을 배경에 두고 있는 게 문제다. 물론 고고학 등의 자료로 전혀 입증될 수 없다는 점도 약점이다.

 

그래서 촘촘한 경제적 분석이 뒤를 이었다. 대개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하는 경제가 이른바 ‘소작료 자본주의’로 이행했다고 본다. 고위 관료와 왕족 등은 소작료를 모아서 자본을 형성했고, 결국 하느님 백성의 내부에 지주 계급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들은 거두어 들일 소작료가 밀리자 토지를 빼앗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영농은 점차 사라지면서 대토지 소유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가장 많은 학자가 지지하고 있는 이론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 안에 유복한 ‘중앙’과 가난한 ‘변방’이 탄생한 것은 과연 이스라엘 왕정의 실패로 평가해야 할까? 필자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인간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고 싶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선민임이 분명하지만, 인간사의 보편적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지상에 사는 하느님 백성은 시대와 조건에 따라 인간적 체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세운 어떤 제도도 완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그래서 이런 현상은 하느님 백성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때 채택했던 ‘고대 근동의 왕정 체제’가 실패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이 시기부터 예언자를 중심으로 임금과 왕정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시작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왕정이 실패한 순간 예언자의 신학이 시작하는 것이다.

 

 

네 가지 표현 

 

예언자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그들의 언어를 보자. 이 시기에 예언서 등을 보면 변방의 ‘새로운 집단’을 가리키는 세 가지 표현이 폭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낱말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을 지칭하는데, 그 기원과 용법이 퍽 차이 나고 어감이나 함의도 다르다. 왕국 후반기의 사회적 현실을 염두에 두고 하나씩 짚어보자.

 

▶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

 

첫째로 볼 낱말은 ‘달’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말은 본디 사회적 계급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니라, 야위고 비참한 모습을 묘사하는 형용사로 쓰였다.

 

왕국 초반기에 이 말은 일반적으로 ‘가냘프다’, ‘야위다’, ‘약하다’, ‘가난하다’ 등의 의미로 쓰였다(창세 41,19; 판관 6,15; 룻기 3,10; 2사무 3,1; 13,4 참조).

 

그런데 예언자들은 ‘달’이라는 집단을 신학적 성찰의 중요한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사야가 선두 주자였다. 그는 다섯 번이나 ‘달’(힘없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와 공동체의 의무 등을 언급한다(이사 10,2; 11,4; 14,30; 25,4; 26,6 참조). 아모스는 네 번에 걸쳐 ‘달’을 짓밟지 말고 주님의 정의를 세울 것을 더욱 직접적이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아모 2,7; 4,1; 5,11; 8,6 참조).

 

이 밖에도 예레미야(5,4; 39,10 참조)와 스바니야(3,12 참조) 예언자가 비슷한 성찰을 내놓았다. 시편도 다섯 번에 걸쳐 ‘달’(가련한 이: 41,2/ 불쌍한 이: 72,13; 82,3.4; 113,7)에 대한 주님의 사랑과 정의를 노래하는데, 예언서의 맥락과 상당히 비슷하다. 예언서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달한 지혜 문학에서도 그 쓰임새가 비슷하다.

 

‘달’은 본디 아카드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육체노동을 하는 불쌍하고 야위고 가엾은 의미의 가난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전한다. 곧 ‘달’은 ‘불쌍하고 힘없는’ 느낌의 가난한 사람이다.

 

▶ 멸시당하는 사람

 

둘째 낱말은 ‘에브욘’이다. 흥미롭게도 이 말은 이집트어에서 온 외래어다. 고대 이집트 문헌을 치밀하게 연구한 램딘은 이집트인들이 외부에서 들어온 노동자 등을 경멸할 때, 특히 항만 등에서 일하던 ‘셈족 출신의 노동자’를 멸시할 때 이 말을 썼다고 보고한다.

 

이러한 관찰은 큰 의미가 있다. ‘에브욘’은 가난한 셈족의 조상들이 멸시당하던 말이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은 모두가 에브욘으로 멸시받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백성 내부에서 ‘에브욘’이란 집단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오직 ‘탈출의 하느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믿었던 예언자들에게 이런 현상은 정말 참기 힘들지 않았을까?

 

‘에브욘’의 사용 빈도와 신학적 성찰의 대상이 되는 유형은 놀랍게도 앞서 본 ‘달’과 무척 비슷하다. 지면의 한계를 고려하여 지금부터는 간략히 횟수만 밝힌다. 구약 성경 본문에 총 60회 등장하는 에브욘’은 이사야(5회), 아모스, 예레미야(각 4회), 에제키엘(3회) 등 예언자들의 집중적 성찰의 대상이 된다. 비슷한 맥락의 성찰이 시편에 즐겨 등장한다(30회)는 점도 같다.

 

이런 성찰은 지혜 문학으로 이어져, 특히 욥기(5회)와 잠언(4회)에서 즐겨 사용된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에브욘’은 본디의 ‘경멸하는 느낌’을 살려서 번역하면 좋을 것이다.

 

▶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

 

세 번째로 볼 낱말은 ‘아나빔’이다. 이 말의 어근은 ‘궁색하다’, ‘불행하다’, ‘고통스럽다’ 등인데, ‘인간의 어두운 밑바닥 체험’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말의 명사형은 위의 두 말과 빈도와 용례가 비슷하다. 모세 오경(8회)과 역사서(1회)에는 무척 드물게 나오는데 예언서(30회)와 시편(38회), 욥기(15회) 등에 거의 집중된다.

 

흥미롭게도 예레미야서에는 이 말이 거의 나오지 않는데(1회) 이사야서에는 무척 자주 나온다(26회). 이러한 차이는 예언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관심과 표현법 등이 매우 다름을 알려 주는 좋은 보기라고 하겠다.

 

이 말은 다양한 명사형으로 파생한다. ‘오니’는 ‘가난하고 억눌리고 비참한 상태’를 뜻한다. 그저 가난한 상태가 아니라 ‘넋이 빠진 상태’(욥 30,16), ‘속이 끓어오르는 상태’(욥 30,27), ‘쇠사슬에 묶여 캄캄한 곳에 있는 상태’(시편 107,10)를 말한다.

 

‘아나브’는 본디 엎드리고 웅크린 모습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은 복수형으로 쓰면 단순히 가난하여 억눌린 사람이 아니라 주님 앞에 엎드린 사람, 곧 ‘겸손한 사람’ 또는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예언자들은 가난이 폭증하는 사회 현실을 직시하고 가난한 사람 사이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들은 단순히 사회를 고발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간 사람, 하느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고백을 한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겸손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동음이의어가 된 것이다. 이런 신학은 이스라엘의 이웃 종교들에서 매우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 가난한 사람들

 

왕국 후반기에 작은 성공이 반짝 찾아오자, 이 작은 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계급사회가 되면서 변방이 탄생했다. 그러자 한 무리의 종교인들은 새롭게 등장한 가난한 사람에 주목하고, 변방에서 그들 곁을 지켰다. 그들은 그전에는 거의 보이지 않던 새로운 낱말로 새 계층의 사람들을 지칭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은 고아, 과부, 레위,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예언자들은 ‘달’(불쌍하고 가련한 사람), ‘에브욘’(멸시당하는 사람), ‘아나빔’(가난하고 겸손한 사람) 등을 추가했다.

 

이 말들은 저마다 독특한 느낌과 함의가 있는데, 우리말 「성경」에서도 언젠가 이런 독특한 느낌을 잘 살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제 가난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은 훨씬 풍부해졌다. 이런 말의 증가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성찰이 상당히 심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신학화의 주역은 다름 아닌 예언자로 불린 사람들이다. 과연 그들은 누구였을까?

 

다음 호부터 살펴보자.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과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8년 1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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