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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신약] 예수님 이야기27: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다(루카 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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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8-19 ㅣ No.3783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27)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다(루카 7,36-50)


진정으로 회개했으니 이미 용서받았다

 

 

-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아 음식을 드시던 예수님은 자신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닦아준 죄많은 여자를 용서하셨다. 그림은 성 안젤로 성당 벽화 중 하나로 ‘죄많은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 프레스코화, 성 안젤로 성당, 카푸아, 이탈리아. 출처=굿뉴스 가톨릭갤러리.

 

 

지난 호에 살펴본 요한 세례자에 관한 예수님 말씀(7,24-35)의 끝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과 당신을 대비시키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7,33-35)

 

루카는 이 말씀에 바로 이어 예수님께서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를 받아 음식을 드시다가 죄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이 일화를 통해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인 예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 루카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화를 세 장면으로 나눠 살펴봅니다.

 

첫째 장면입니다.(7,36-38) 시몬이라는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합니다. 장소가 어딘지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이 바리사이 집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옵니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7,37-38)고 루카는 전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죄인인 여자입니다. 그 여자가 왜 죄인인지 또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 여자 스스로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의 놀라운 활동과 특히 죄를 용서하신다는 소문을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단지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는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은 다음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여인의 이 일련의 행위가 순전히 즉흥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향유를 든 옥합을 갖고 올 때부터 이미 어느 정도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 장면입니다.(7,39-47) 이 장면은 죄인인 여자의 행위를 본 시몬의 생각과 그 의중을 간파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 시몬에게는 여인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인의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문제 삼았습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댄 여자가… 죄인인 줄 알 터인데”(7,39)라는 생각의 이면에는 ‘왜 저 죄 많은 여인이 하는 짓을 그대로 놔둘까?’ 하는 못마땅함이 들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시몬에게 설명하십니다. 여자가 눈물로 당신의 발을 씻어주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다음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라준 것은 더 큰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더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7,47) 

 

그런데 이 마지막 말씀은 뭔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여자의 행동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데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다음 장면에서입니다.

 

셋째 장면입니다.(7,48-50) 예수님께서는 이제 비로소 그 여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7,48)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둘째 장면 마지막 부분에서 제기된 의문에 답을 찾아봅시다.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께 한 행위를 용서의 이유(회개의 표시)이자 동시에 결과(사랑의 표현)라고 보면 어떨까요? 어쩌면 여자는 예수님을 찾아뵙기로 작정했을 때부터 이미 마음으로 회개했고 또 자신의 큰 죄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를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회개의 마음과 용서에 대한 확신이 예수님을 직접 뵈면서 행동으로 드러났다고 하면 잘못된 해석일까요?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7,48)고 말씀하셨을 때, ‘용서받았다’는 단어가 ‘과거에 이미 용서받았고 그 결과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완료형’으로서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더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라는 47절의 ‘용서받았다’에 대한 반복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7,48)고 말씀하시기 전에 또 그 여자가 사랑의 행위를 표시하기 전에 여자의 회개하는 마음을 보시고 이미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는 성경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예수님 말씀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합니다.(7.49)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언급하시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7,50) 하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 또한 여자가 예수님께 한 행위가 죄의 용서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 살아가면서 우리는 회개가 먼저인가 용서가 먼저인가 하며 옥신각신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편한 쪽으로 해석하려고 하지요. 누가 내게 잘못했고 내가 용서를 해야 할 입장이라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언제든지 용서할 준비가 돼 있어. 그쪽에서 먼저 잘못했다는 한마디만 한다면.” 그 반대 상황이라면 또 이런 식으로 생각하겠지요. “저쪽에서 조금만 관용을 베푼다면 내 잘못을 기꺼이 인정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텐데….”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신 일화는 이런 방식에서 벗어나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죄 많은 여인이 보인 태도는 회개의 표현이자 또한 용서받은 데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중요한 것은 공감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용서 청하는 사람의 진심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의 너그러움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을 닮을 필요가 있습니다.

 

- 바리사이 시몬은 죄인을 멀리함으로써 자신의 의로움을 간직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멀리하거나 내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이고 포용하며 죄인을 회개시킴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드러내십니다. 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흠 없고 깨끗한 세상을 꿈꾸기보다는 죄인을 받아들여 용서하고 회개시킴으로써 개선해 가는 세상, 그런 세상을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가꾸어 가야 하는 게 아닐까요?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8월 20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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