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자료

창세기의 창조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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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6-04-12 ㅣ No.3382

(창조설화는 영성적 사건을 신화적 상징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지금도 창조설화가 물리학적, 우주론적 또는 생물학적 역사기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결코 그럴 리는 없습니다. 성서는 그 정도로 엉성한 책이 아닙니다. 본 해설은 저의 영성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딱히 이것이 옳다고는 감히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의미를 찾는 분이라면 충분히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날 (창세기 1:1-5)

 

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땅은 모양을 갖추지 않았고 황량하였다. 모든 것을 뒤덮은 사나운 바다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는데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고 명령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즐거워하셨다. 그분께서는 어둠으로부터 빛을 가르시어 빛을 낮, 어둠을 밤이라고 부르셨다. 저녁이 지나 아침이 되니 이것이 첫 날이다.

 

처음은 시간적인 의미에서 우주가 시작되었던 때가 아니라 사람이 하느님과 결합하여 영적 인간으로 변화하는 사건을 가리킨다. ‘창조는 하느님께서 영적 인간을 통하여 또 그와 협력하여 세상을 완성하시는 일이다.

 

은 온 세상의 중심으로서의 사람을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사람은 자신의 참된 정체를 모르고(모양을 갖추지 않았고)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에(황량하였다) 하느님을 찾는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이성을 최종적인 것으로 신뢰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살아있는 지혜를 구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회개이다. 회개는 하느님을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전체를 기울여서 그분께 투신(投身)하는 행위이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한 사람에게 참된 자아와 참된 삶의 길을 알려주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통달하는 지혜를 내려주신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땅은 온 세상을 낳고 기르는 중심으로서 활동한다. 창조 설화는 바로 이 사건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투신하는 사람은 내면의 깊은 어두움 속에서 하느님을 대면한다. 하느님은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이 무한한 분이시므로 사람이 그분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하느님의 현존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활동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첫째 날은 사람이 하느님을 대면하는 바로 그 상황을 묘사한다.

 

모든 것’-영적 자아, ‘바다’-참된 자아의 내적 혼돈, ‘어둠’-하느님, ‘’-성령, ‘’-생명, ‘’-지혜로 대응하여 사람과 하느님의 내적 친교를 묘사한다. 하느님의 어둠에 잠긴 영적 자아는 하느님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으므로 모든 것이다. ‘어둠은 영적 자아가 경험하는 무지(無知)의 상태이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이시지만 영적 자아는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분께 자신을 맡긴다. 하느님의 (spirit)’을 통하여 그분과 사람 사이에 소통이 일어난다. 영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활동력이며 자아를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힘이다. ‘사나운 바다위를 감도는 영의 힘으로 맑게 가라앉는다. 이것은 자아가 하느님 안에서 겪는 자기부정(自己否定)의 과정이고 이로써 영적 자아는 거듭 새롭게 태어난다. 성서에서 물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이중적 상징을 지닌다. 영적 자아의 생명은 육적 자아의 죽음으로부터 태어난다.

 

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깨달음의 지혜를 가리킨다. 영적 깨달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도 없고 사람의 언어로 설명할 수도 없다. 영적 인간은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오는 깨달음의 사건을 즐기며 그분께서도 그 사건을 즐거워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영적 깨달음은 즉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무엇인가 어둠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 어둠은 인생사의 우여곡절에서 맞닥뜨리는 당혹과 혼란들로 드러난다. 영적 자아는 세상만사가 하느님의 경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믿고 이 모든 것들을 수용하고 기다린다. 사람에게는 세상이 빛과 어둠으로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을 으로 부르신다. , 자아가 얻은 영적 깨달음은 물론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세상살이에서 겪는 모든 괴로움들도 역시 그분의 선물이다. 빛뿐만 아니라 어두움도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어둠을 벗어나기 위하여 빛의 근원인 하느님을 찾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하루를 해가 뜨는 아침에서 시작하여 저녁의 쉬는 시간으로 마감한다. 여기에서는 정반대의 방법으로 하루를 표시함으로써 사람의 때와 하느님의 때가 전혀 다름을 강조한다. , 시간은 빛이 어둠으로, 생명이 죽음으로 사라지는 무미건조한 흐름(chronos)이 아니라 자아가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얻는 영적 사건(kairos)으로 변화한다. 사람은 하느님의 어둠으로부터 생명을 얻어 비로소 빛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시다. 영적 자아는 밤과 낮, 혼돈(chaos 하느님과의 내적 일치)과 질서(cosmos 세상에 통달하는 지혜)의 양축을 왕복하는 운동을 일으키면서 생명의 지혜를 심화시킨다.

 

 

둘째 날 (창세기 1:6-8)

 

하느님께서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을 두 군데로 갈라놓아라.” 하고 명령하시자 그렇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을 궁창 위에 있는 물에서 가르셨다. 그분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지나 아침이 되니 둘째 날이 지났다.

 

궁창은 영적 자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 마음은 하느님과 사람이 서로 소통하는 문이고 하느님의 뜻은 그 문을 통하여 그 사람 자신에게 드러난다. 사람의 마음은 변덕스럽지만 성령은 참되시다. ‘궁창은 사람의 눈으로 보는 텅 빈 마음이요 하늘은 하느님께서 보시는 생명과 지혜가 넘쳐흐르는 마음이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부르셨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성령으로 채워져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뜻이다. , 욕망을 따라 변화무상하게 움직이던 마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된 의지를 지니게 되었다.

 

은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육적 자아의 죽음과 영적 자아의 탄생이 일어난다. 물이 생명의 근원이듯이 성령은 사람과 삼라만상을 통틀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낳고 기르는 생명력이다. 성령은 영적 자아의 마음을 통하여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신다. ‘궁창 위에 있는 물은 자아를 품고 있는 영이며, ‘궁창 아래에 있는 물은 자아의 내면으로부터 샘솟아 넘쳐흐르는 영이다. 그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내적 갈등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셋째 날 (창세기 1:9-13)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이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고 명령하시자 그렇게 되었다. 그분께서는 뭍을 땅, 모인 물을 바다라고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즐거워하셨다. 그분께서 땅은 온갖 식물들과 곡식을 맺는 풀들과 과일을 맺는 나무들을 생산하여라.” 하시자 그렇게 되었다. 그리하여 땅은 온갖 식물들을 생산하였는데 하느님께서 보시고 즐거워하셨다. 저녁이 지나 아침이 되니 셋째 날이 지났다.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영적 자아를 인도하는 성령이며, ‘은 이 세상을 사는 영적 인간이다. 그는 온 세상의 중심으로서 세상 만물 하나하나의 존재 의미를 부여하고 심화시킨다는 의미에서 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아직 성령에 완전하게 굴복한 것이 아니어서 바다이다.

 

바다 속에는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듯, 마음속에는 다양하고도 크고 작은 욕()들이 설치고 있다. 이것이 첫째 날에 보았던 사나운 바다의 정체이다. ‘으로 변화됨과 동시에 바다로 변화한다. 영적 인간은 이제부터 성령의 인도를 따라 바다를 정복해갈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망덕을 일으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보시고 즐거워하신다. ,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건은 반드시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사건을 불러일으킨다.

 

식물들은 망덕에 의해 만물이 살아나고 있음을 상징한다. 희로애락, 생로병사 등의 모든 세상만사가 사람의 영적 생명을 북돋으며 생생하게 살아있는 의미로 다가온다. ‘곡식을 맺는 풀들은 만물이 단지 소비 또는 쾌락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는 양식으로 변화한 것을 상징한다. ‘과일을 맺는 나무들은 애덕을 상징한다. 영적 인간은 절제와 겸손의 멍에를 기꺼이 메고 성령을 받아들임으로써 항상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머문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당신께 투신하고,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신뢰하는 것을 보시고 즐거워하신다.

 

 

넷째 날 (창세기 1:14-19)

 

하느님께서 하늘에 빛들이 생겨 낮을 밤으로부터 가르고, 날과 해와 절기를 나타내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하늘에서 비추어 땅에 빛을 내려 주리라.” 하고 명령하시자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두 개의 큰 빛을 만드시어, 해는 낮을 다스리고 달은 밤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그분께서는 또한 별들을 만드셨다. 그분께서 빛들을 하늘에 두시어 땅을 비추고,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을 어둠으로부터 가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즐거워하셨다. 저녁이 지나 아침이 되니 넷째 날이 지났다

 

빛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지혜를 상징한다. ‘은 믿음과 불신, 지혜와 어리석음, 생명과 죽음, 참과 거짓 등을 상징한다. 성령의 지혜는 참된 생명을 길을 밝혀준다. 낮과 밤의 순환에 의해 일 년이 정해지고 절기가 변화한다. 사람의 지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영고성쇠를 순환하는 세상을 볼 뿐이지만 성령의 지혜는 벌써부터 사람의 생명을 싹틔우고 기르고 수확하고 있다. 사람을 포함한 우주만물은 물리적 시간의 지배를 받지만 하느님과 사람이 일으키는 협력하여 일으키는 영적 사건은 물리적 시간을 지배한다. ‘’ - 애덕, ‘’ - 신덕, ‘별들’ - 망덕으로 대응한다. 애덕과 신덕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이므로 빛이다. 망덕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심어주신 이성적 지혜이므로 상대적으로 작은 빛이다. 그러나 작은 빛이 없이는 큰 빛도 생기지 않는다. 영적 인간은 신망애 삼덕의 힘으로 시간을 지배한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분의 지혜는 해처럼 투명하지만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내적 어둠을 피할 수 없다. 신덕은 마치 해를 반사하는 달처럼 하느님을 신뢰하며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또한 영적 인간은 망덕을 발휘하여 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구한다. 그가 일상적으로 겪는 세상만사는 하느님을 가리키는 별들과도 같다. 세 가지 덕은 모두 성령으로부터 오므로 이들을 따로 따로 분리할 수는 없다. 하나의 덕에는 다른 두개의 덕들이 섞여있다.

 

애덕 : 하느님을 사랑하는 의지

신덕 : 하느님을 신뢰하는 의지

망덕 : 하느님께 구하는 의지

 

은 생명의 진리이며 어둠은 죽음의 세력인 거짓과 위선을 가리킨다. 영적 지혜는 사람의 지혜가 빚어내는 거짓과 위선을 떨쳐버리면서 성장한다.

 

 

다섯째 날 (창세기 1:20-23)

 

하느님께서 물에는 수많은 종류의 생물들이 우글거리고, 공중에는 새들이 날아다녀라.” 하고 명령하셨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큰 용들과 물에 사는 온갖 생물들, 또 날아다니는 온갖 종류의 새들을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보시고 즐거워하셨다. 그분께서 이들 모두를 축복하시고 나서, 물에 사는 피조물들은 번성하여 바다를 가득 채우고 새들은 수가 늘어나라고 말씀하셨다. 저녁이 지나 아침이 되니 다섯 째 날이 지났다.

 

물속의 생물들은 무의식의 어두움 속에서 갖가지 환영들을 빚어내고 있는 욕정이며, ‘공중의 새들은 끝을 모르고 방황하는 욕망이다. 영적 지혜가 성장함에 따라 마음속에서 다양한 허상들이 하나하나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마치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기이한 생물들이 생겨나서 살아 움직이는 것과도 같다. 영적인 여정은 내면의 허상들을 똑바로 대면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소멸시키는 사건을 수반한다. 하느님의 축복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다. 성령은 욕정과 욕망을 절제와 겸손으로 변화시킨다. 이때 사람은 자유로운 생명력으로 가득 채워지고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포함하는 모든 세상사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사랑의 선물로 변화한다.

 

여섯째 날 (창세기 1:24-31)

 

하느님께서 땅은 집짐승들과 들짐승들, 크고 작은 온갖 종류의 짐승들을 생산하여라.” 하고 명령하시자 그렇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들 모두를 만드셨으며, 그분께서는 보시고 즐거워하셨다. 하느님께서 이제 사람을 만들되 우리를 닮아 우리와 비슷하게 만들자. 그들은 물고기들과 새들과 집짐승들과 들짐승들, 크고 작은 온갖 종류의 짐승들을 다스릴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사람이 당신을 닮도록 창조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시며 자녀를 많이 낳아 너희 자손들이 온 땅에 퍼져 그것을 지배하도록 하여라. 나는 물고기들과 새들과 온갖 들짐승들을 너희들의 손에 맡긴다. 나는 온갖 종류의 곡식과 과일을 너희의 식량으로 마련하였으되 온갖 들짐승들과 새들에게는 풀들과 잎이 달린 식물들을 양식으로 마련하였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렇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매우 즐거워하셨다. 저녁이 지나 아침이 되니 여섯 째 날이 지났다.

 

집짐승은 쾌락과 재물이며, ‘들짐승은 명예와 권력이며, ‘크고 작은 온갖 종류의 짐승들은 일상생활에서 생멸하는 갖가지 욕구들이다. 여기에서 은 믿음을 상징한다. 영적 인간은 믿음으로 하느님을 닮아 쾌락과 재물, 명예와 권력 등 모든 욕구들을 지배한다. 하느님께서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신 것처럼 그분을 닮은 영적 인간도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영적인 자유로움에 맛을 들일 줄 알게 된 것을 보시고 즐거워하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라는 복수형으로 드러나시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영성의 삼중구조를 반영한다. 아래의 표 참조. 이는 사람이 잠겨있는 세계의 구조와 이에 상응하는 사람의 의식구조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삼중구조는 영적 인간 안에서 완전히 통일된다. 아래 표에서 보면, 육적 인간의 감성과 이성과 의지는 서로 분열되어 상호 충돌과 혼란을 일으키지만, 영적 인간의 생명과 지혜와 자유는 하나의 통일된 개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품성(稟性)들이다.

 

세계

육적 인간

육적 사랑

영성

하느님

영적 인간

영적 사랑

과거

감성

재물

애덕

아버지

생명

온유

현재

이성

명예

신덕

성령

지혜

겸손

미래

의지

권력

망덕

아들

자유

자비(사랑)

 

남자는 망덕을 여자는 신덕을 상징한다. 망덕은 욕구를 채우는 헛된 즐거움을 외면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의지이며, 신덕은 영적 싸움을 수행함에 있어 사람의 지혜를 버리고 성령의 지혜를 따르는 의지이다. 망덕과 신덕은 하느님의 아들이 지닌 품성이다.

 

하느님과 사람의 친교는 망덕과 신덕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로 완성된다. , 망덕과 신덕은 애덕을 낳는다. 애덕은 생명을 낳고 기르고 완성하는 힘을 제공하는 근원적인 덕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언함으로써 새로운 하느님의 아들들을 낳는다. 하느님의 아들은 곡식과 과일을 먹는다. , 그는 세상만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친교를 강화하며 이를 통하여 그는 온 인류와 더불어 끝없이 풍성해지는 생명을 누린다. 그런데 육적 인간은 별 영양가 없는 풀과 잎이 달린 식물을 먹는다. , 그는 들짐승과 새들처럼 욕정과 욕망에 따라 세상을 헤매다가 헛되이 소멸할 뿐이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크게 번성한다. ‘온 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가리킨다. ‘지배는 세상을 창조함으로써 그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손수만드신 당신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그분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매우즐거워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주만물과 사람들을 만드시고 난 다음 손을 떼고 두고 보시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것이 혼란에 빠져 있는 이 세상에서 그분께서 즐거워하실 일이 무엇 하나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

 

 

일곱째 날 (창세기 2:1-4)

 

이렇게 온 세상이 완성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일곱 째 날에 이르러서 하시던 일을 마무리하시고 쉬셨다. 그분께서는 일곱 째 날을 축복하시고 그날을 특별한 날로 떼어 놓으셨다. 그분께서 그날까지 창조를 완성하시고 쉬셨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창조된 경위는 이러하였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번성하는 것으로 창조사업이 완성된다. 하느님께서는 일을 마치신 후 일곱 째 날에야 쉬신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휴식이 필요하지 않으시다. 그분의 아들들이 떳떳하게 성장하는 것을 보고 안심하신다는 뜻이다. 아들들도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비로소 안심한다.

 

일곱째 날은 아들이 어른이 되어 떳떳한 삶을 꾸려가기 시작한 기쁜 날이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그 날을 특별히 축복하신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세상에 온갖 복을 내려주신다. 아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우주만물은 헛되이 돌고 도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드러나는 사건들로 변화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언한다. 하느님의 아들에게 있어 인생은 늘 안식일이며 특별한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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