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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문화] 성경, 문화와 영성23-24: 되찾은 아들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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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11 ㅣ No.3522

성경, 문화와 영성 (23)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는 질문한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새로운 삶의 방식인 에토스(ethos)를 제시하신다. 예수님의 에토스가 잘 표현되는 자리 중의 하나가 바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이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고 잘 알려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비유는 많은 예술작품들의 소재가 되었고, 성경학계에서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우리는 학자들의 해석과 더불어 렘브란트의 걸작을 함께 감상하고자 한다.

 

 

■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내용

 

루카 15장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세 비유는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상황을 그 배경으로 한다. 그 상황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식탁 공동체를 비판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연속적으로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세 번째 비유에는 아버지, 큰아들 그리고 작은 아들이 등장한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난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이며, 아버지 없는 자신의 삶을 원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로부터 멀어진다. 아버지의 재산 중에 자신의 몫을 챙겨 집을 떠난 작은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무책임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낭비한다. 그는 곤궁에 허덕이다가 아버지를 떠난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경험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아 결국 아버지께로 다시 되돌아온다.

 

· 작은 아들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아버지는 그를 보고서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5,20).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19)라고 말하며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기를 원하는 작은 아들을 아버지는 따뜻하게 맞이하여 그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이고 잔치를 벌인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분리하고 배제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였다.” 자신을 떠났던 작은 아들, 다시 돌아와 종이 되려는 그를 아버지는 다시 아들로 받아들임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올바른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고 공동체를 다시 형성한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작은 아들뿐 아니라 자신과 큰 아들의 공동체, 그리고 이 두 형제의 공동체도 회복시킨다.

 

 

■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

 

· 렘브란트는 예수님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되돌아온 작은 아들을 아버지가 품에 안고 있는 장면을 탁월한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은 1662~1669년 사이 혹은 1667년경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262×205cm의 크기이며,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Hermitage)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이 그림의 제작 연도에 대한 여러 의견이 있다. 정확한 연대 추정은 불가능할지라도 <탕자의 귀환>은 렘브란트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 그림의 중심인물은 아버지, 작은 아들, 큰 아들이다. 붉은 망토의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안고 있고, 오른쪽의 큰 아들은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에는 렘브란트의 가장 큰 특징인 빛과 어둠의 대조가 뚜렷하다. 그림의 왼쪽에는 아버지와 작은 아들의 만남이 빛 속에 묘사되고, 그림의 오른쪽에 서 있는 큰 아들은 어둠 속에 있다. 이들 사이에 검은 모자를 쓴 콧수염이 있는 어떤 남자가 앉아 있고, 이들 뒤편에 두 여인이 등장한다. 기둥 뒤에 한 여인이 있고, 그림의 맨 왼쪽 뒤편에 다른 여인이 희미하게 묘사된다.

 

 

■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명칭

 

· 루카 15,11-32의 본문은 읽기의 초점을 등장인물인 아버지, 큰 아들, 작은 아들 중에서 누구에게 두느냐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우리 본문은 “탕자의 비유”로 불린다. 그러나 이 명칭은 우리 비유 전반부의 앞부분을 적절하게 잘 표현하지만, 전반부의 뒷부분과 후반부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리고 이 명칭은 작은 아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탓에 아버지와 큰 아들은 관심 밖에 있다. 이와 유사한 명칭인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도 작은 아들이 관심의 중심에 있다. 한편 “성경”의 명칭인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비유 전반부의 뒷부분을 잘 표현하지만 앞부분을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 성경학계에서는 우리 비유에서 아버지의 특성과 역할에 주목하는 연구 경향들이 있다. 즉 아버지를 이 비유의 중심인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대변하는 비유의 명칭으로는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 “아버지의 사랑의 비유” 등이 있다. 또한 아버지의 역할과 함께 두 아들을 모두 잃어버린 아들로 표현하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는 명칭도 있다. 그리고 이 비유의 중요 등장인물과 그 관계를 잘 표현하고 비유의 내용을 중립적으로 묘사하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라는 명칭도 사용된다.

 

 

■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구조

 

· 이 비유의 중요 등장인물인 아버지, 큰 아들, 작은 아들에 따라 본문의 구조를 나눌 수 있다. 11-24절의 중심 등장인물은 작은 아들이고 25-32절의 중심은 큰 아들이다. 따라서 우리 본문은 중심인물에 따라 11-24절과 25-32절의 두 부분으로, 즉 전반부와 후반부로 그 구조를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문학적 구조에서 지적할 점은 각 부분의 끝이 아버지의 말로 마무리 된다는 것이다. 전반부의 끝인 22-24절(“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과 후반부의 끝인 31-32절(“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은 작은 아들, 잔치, 기쁨에 대한 아버지의 언급이다.

 

· 본문의 문학적 구조를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나누는 제안들 중에는 다른 방식도 있다. 아버지, 작은 아들, 큰 아들이라는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좀 더 세분한 구조인 셈이다. 11-12절은 전체 비유의 도입 부분이다. 첫째 부분(13-20ㄱ절)은 작은 아들, 둘째 부분(20ㄴ-24절)은 아버지와 작은 아들, 셋째 부분(25-28ㄱ절)은 큰 아들, 넷째 부분(28ㄴ-32)은 아버지와 큰 아들이 중심이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r/rembrand/14biblic/69newtes.jpg)

 

[월간빛, 2016년 11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경, 문화와 영성 (24) 되찾은 아들의 비유 ②

 

 

렘브란트는 예수님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구원의 위대한 이야기는 탁월한 화가를 만나 어떻게 읽혀지고 표현되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환>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 렘브란트의 해석

 

- 그림의 왼쪽에는 한 늙은이가 남루한 행색의 청년을 품에 안고 있는데 그곳으로 빛이 비친다. 되돌아온 작은 아들을 아버지가 감싸 안고 있는 장면이다. 그림 오른쪽의 큰 아들은 어둠 속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이 빛과 어둠의 대조는 그림 안에서의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 우리는 먼저 렘브란트가 탁월하게 묘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감상해보자. 루카 15,20은 아버지가 되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아직도 그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보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작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절절한 기다림을 표현한다. 그림의 아버지는 흰 수염의 노인으로 묘사된다. 아버지의 시선에는 초점이 없는 듯이 보인다. 날마다 작은 아들이 되돌아올 길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은 그 기다림과 눈물로 멀어버린 듯하다. 마치 시력을 잃을 만큼 그렇게 간절하고 절실하게 작은 아들을 기다린 것이다.

 

- 되돌아온 작은 아들은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다. 그의 신발은 낡았다. 신발이 벗겨진 그의 상처투성이 왼발은 그림의 관객에게 보인다. 이러한 작은 아들의 모습은 아버지를 떠났던 그의 생활이 얼마나 곤궁하고 비참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머리는 빡빡 깎여 있다. 이 모습은 죄인의 상태를 의미한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21)라고 말한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머리는 갓난아기의 모습이다. 그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위치는 마치 엄마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연상케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어머니의 자궁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즉 자비(慈悲)란 어머니가 자신의 자궁 속에 있는 아기에 대해 느끼는 마음인 것이다. 렘브란트는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에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이 바로 작은 아들을 감싸 안고 있는 아버지의 양손이다. 이 부분에 빛이 집중되고 있다. 그의 두 손은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아버지의 왼손은 강한 남자의 손이고 오른손은 부드러운 여자의 손이다. 작은 아들의 어깨를 감싸는 왼손의 펼쳐진 손가락들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변함없는 마음을 표현한다면, 손가락이 모여진 매끈한 오른손은 따뜻한 사랑과 위로를 의미한다. 이 두 손에서 렘브란트는 하느님 아버지의 부성과 모성을 함께 표현하고자 했다.

 

- 그림 오른쪽에 있는 큰 아들은 긴 지팡이를 짚고 꼿꼿한 자세로 서 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품에 안으며 몸을 굽히고 있지만, 큰 아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닮은 모습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수염이 있고,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다. 큰 아들의 얼굴은 아버지의 얼굴과 몹시 닮았다. 그러나 큰 아들은 아버지와 작은 아들의 만남과는 거리를 두고 분리되어 있다. 아버지와 작은 아들의 모습이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기쁨을 표현한다면, 큰 아들은 아무런 표정 없이 방관자의 차가운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

 

 

■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의미

 

- 역사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가르쳤고 그것의 실현을 위하여 실천하셨다. 예수님의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과 사람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 안에서 현존하는 하나의 사회적 실재이다. 즉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은 새로운 공동체 운동이었다. 루카 15장의 세 비유 중에서 첫 번째 비유(루카 15,3-7)에서 양 백 마리를 가진 사람이 한 마리를 잃은 후, 그 잃은 양을 찾고는 기뻐한다. 두 번째 비유(루카 15,8-10)에서는 은전 열 닢 중 한 닢을 잃은 부인이 그것을 찾고서 기뻐한다. 세 번째 비유인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등장한다. 이와 같이 이 세 비유는 백 중 하나에서 열 중 하나로 그리고 둘 중 하나로 잃어버린 것의 중요성이 점차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비유는 모두 잃은 것을 되찾는 것에 관한 것이다. 각각의 경우, 양 백 마리, 은전 열 닢 그리고 두 아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그것은 온전한 형태의 공동체이다. 그런데 양 한 마리, 은전 한 닢, 한 아들을 잃었다는 것은 공동체의 와해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다는 것은 공동체의 회복, 즉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가리킨다. 이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주제는 세 비유에서 공통적으로 기쁨이라는 모티프와 관계된다.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루카 15장 세 비유의 주제는 그 배경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탁 공동체를 옹호하기 위하여 이 세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러한 문맥에서 우리 비유의 아버지는 용서하시고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상징하고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신다. 그리고 작은 아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킨다면, 큰 아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지시할 것이다.

 

-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났고 돌아와서도 아들이 아닌 종이 되고자 했다. 그것은 단절된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큰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종처럼 느끼고 있었다. 이 또한 단절된 관계이다. 사실은 작은 아들뿐 아니라 큰 아들도 잃어버린 아들이었던 셈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뿐 아니라 큰 아들도 아들로 받아들이고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다. 아버지와 두 아들뿐 아니라 형제간의 공동체도 재형성한다. 작은 아들처럼 큰 아들도 여러 경계들을 설정한 인물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들 경계들을 허물어 버린다. 경계를 뛰어넘는 자비, 즉 “함께 아파하기(compassion)”의 실천이 바로 우리 비유의 핵심 메시지이다. 공동체의 회복은 아버지와 두 아들 사이의 수직적 경계를 허물고, 아들 형제 사이의 수평적 경계를 무효화한다.

 

-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치고 실천하셨다. 이 새로운 삶의 방식은 바로 “함께 아파하기”의 에토스이다. 그분의 가르침 중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이 모티프가 잘 드러난다. 특히 비유의 등장인물 중에서 아버지가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5,20)라는 구절에서 이 주제가 잘 표현된다. 아버지의 “함께 아파하기”는 자신과 작은 아들, 그리고 자신과 큰 아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킬 뿐 아니라 두 아들 사이의 형제 관계도 화해시킨다. 따라서 우리 비유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새로운 에토스는 “함께 아파하기”를 통한 올바른 관계의 회복과 공동체의 형성인 것이다.

 

● “성경, 문화와 영성”은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오랜 기간 글을 써주신 송창현 신부님과 애독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월간빛, 2016년 12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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