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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구약] 구약 여행57: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욥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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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2-07 ㅣ No.3317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7)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욥 42,3)


선한 사람이 왜 고통받을까



흠없는 사람 욥은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 J. B. W. 버글 작, ‘쓰레기 더미 위의 욥’


“우츠라는 땅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욥 1,1).

이것이 욥에 대한 소개입니다. 욥이 어느 시대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츠가 어디에 있는지도 정확히 모릅니다. 욥기에서는 이런 점들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욥기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괴롭히는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고전적인 지혜의 가르침을 원칙적으로 인정한다 해도 이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너무나 많습니다. 욥기에서 욥은 그러한 고통을 대변하고 욥의 친구들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고집합니다.

고통은 죄의 결과일까요? 욥기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 않느냐고 항변합니다. 흠 없는 사람인 욥이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겪기 때문입니다. 욥은 많은 자녀를 거느린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축복을 받은 의인이라고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순간, 사탄이 그를 시험해 보겠다고 나섭니다.

욥은 처음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서 거두어 가시는 데에 불평하지 않지만, 곧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하느님을 고발합니다. 친구들이 그를 설득하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합니다. 욥기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욥과 친구들 사이의 논쟁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가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 분명 그에게 잘못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선과 악에 대한 갚음이 있다는 믿음에서부터, 모든 고통은 자신이 저지른 악에 대한 갚음이라는 결론을 끌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대답으로 만족하지 않고, 결국은 하느님의 답변을 듣고야 맙니다. 욥기의 하느님은 38-41장에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욥에게 하신 말씀은 그의 질문 내지 항변과 거리가 멉니다. 실상 하느님은 답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욥에게 무수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욥은 인간의 고통과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문제 삼고 있는데, 하느님은 그에게 자연과 동물의 세계로 눈길을 돌리게 하시며 당신의 창조 능력과 온 세상에 대한 당신의 지배를,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당신의 신비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전혀 엉뚱한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이것이 욥기가 제시하는 응답이고, 이 마지막 장들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욥의 항변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욥기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서」의 욥기 입문에서는 이를 훌륭하게 설명해 줍니다. “바로 이 담론이 그 앞의 토론들도 욥이 처해 있는 상황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 논쟁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순전히 신적인 차원으로 옮겨 놓기 때문에, 이것은 그 문제에 대하여 저자가 간파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그 해답은, 하느님의 행위는 신비롭다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답변들에서는 인간이 쉽게 다룰 수 있는 동물이나 이 세상 사물들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다스릴 수 없는 영역을 이야기합니다. 의도적이지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자연의 세계, 그것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고 인간의 지혜가 파악할 수 없다 하여도 이 세상에는 하느님의 계획이 분명 존재하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무질서하게 내버려 두시고 혼란을 조장하신다고 그분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통치는 욥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땅과 바다, 빛과 어둠, 하늘과 기후는 욥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자와 타조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욥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자연은 질서를 이루며 살아가고, 그 안에 지혜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제 욥은, 이 세상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인간 지혜의 한계에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 역시 납득할 만한 설명을 구할 수는 없는 문제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인간의 지혜가 가서 닿을 수 없는 곳, 그곳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인간의 머리로 하느님이 의로운 분이신지 아닌지를 판단하려 하는 태도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욥 38,1). 어쩌면 이 말에서 욥기의 가장 핵심적인 응답을 추출해 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불평꾼이 전능하신 분과 논쟁하려는가?”(40,1).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을 의롭지 못하신 분으로 정의하는 것, 이것은 지혜로움이 아니라 “지각없음”이고, 지혜는 오히려 하느님의 “뜻”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권능 앞에서 인간 자신의 위치를 올바로 인식했을 때, 인간이 취하는 자세는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40,4). 하느님의 두 번째 답변까지 듣고 나서, 욥은 38장 1절에서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하며 마침내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42,3).

기후 현상이든, 동물들의 세계든, 인간의 고통이든, 인간이 깨달아 알 수 없다고 해서 이 세상이 부조리하고 하느님께서 불의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인간의 한계일 따름입니다. 그 한계 너머에 심연의 나락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그 어둠 속에 하느님께서 계심을 믿는 것, 이것이 욥이 도달해야 했던 믿음입니다.

[평화신문, 2016년 2월 7일, 안소근 수녀(
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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