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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성경] 소공동체와 함께 읽는 성경: 말씀은 곧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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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2-21 ㅣ No.3246

[소공동체와 함께 읽는 성경] 말씀은 곧 사랑이다 (1)

 

 

이 이야기는 어느덧 2009년 가을 곧 아직 내가 한국에 있고, 주교님 명을 받고 다시 이태리로의 유학 준비를 하고 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러 이유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무엇을 공부해야 하고 어느 교수님께 지도를 받아야 하나,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등등, 막상 많은 신자들과의 부딪힘 속에 익숙해있었던 나에게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여린 마음 속의 두려움도 그 안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하지만 내심 기대도 있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은 부질없다는 결론과 모든 것을 주님 섭리에 맡기려는 불쏘시게 정신이 타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신학생 때부터 1년에 한번인가 찾아오셨던 여호와의 증인 여신도 한 분이 집을 방문했다. 서너 번 만난 후라 안면이 있었던 차였다. 신학생 때도 수차례 이야기 나누었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그때는 그분의 성경지식에 탄복했었다. 그럼에도 신학생 때 자존심상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것이, 내 종교가 서로 옳다고 미숙한 설전을 벌였던 기억도 또한 소르르 떠올랐다. 막상 나는 성경을 좋아한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미사 때나 성무일도 때 듣는 것과 약간의 묵상을 통해서만 만나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조금 안다고 성경 공부했다고 얼마나 자만했었는지 지금에서는 헛웃음만 나온다.

 

예로니모 성인께서는 ‘성경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말씀을 인간의 손을 빌려 그 인간들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면서 당시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았던 인간의 언어로 쓰신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그 안에 이 세상 끝 날까지 인간이 알아야 할 모든 보화가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지금 현재 읽고 묵상하고 만나는 수 천 년을 이어 내려온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오늘 그리고 어제처럼 내일도 이 성경은 앞으로도 후손들에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갈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고 힘이 있으시고 어떤 쌍날칼보다 날카롭고 자비롭기 그지없다(히브 4,12참조). 그 안에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기 포기, 곧 케노시스(kenosis-자기 비움)와 신적 사랑이 강물처럼 관통하고 있다. 이 철저한 사랑, 지독한 사랑으로 인해 종종 그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우리에게 과연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4,16). 이 말씀의 뜻은 하느님은 그 본질상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밖에 난 몰라 하시며 사랑만 주시는 분, 사랑 이외에 어떤 것도 지니지 않으신 분, 그럼에도 끊임없이 불평하고 달라고 떼쓰는 우리의 모습, 본인의 모습에 한숨이 나오는 것은 과연 자아 반성의 결과일까? 아니면 투정일까? 그렇다면, 그 사랑의 하느님께서 왜 화를 내시고 저주하시고 벌을 주신다는 이야기가 구약성경에 많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의 하느님께서 구약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에서 만나는 종족을 철저히 전멸시키시는 무자비한 하느님 (신명 2,22 참조), 후손들에게 조상들의 죄를 삼대 사대에 걸쳐 물으시는 하느님으로 오직 이스라엘 백성만 보호하시는 하느님으로 묘사된다(민수 14,18).

 

하지만 이것이 정말 사실일까? 우리는 성경 이야기의 다른 면도 보아야 한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우상화를 미연에 방지하는 노력일 것이다. 우리가 어느 한 면에서만 바라보는 데서 교회의 수많은 분열과 피의 전쟁, 수많은 희생이 있어왔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여기서 드는 물음 하나,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답은 ‘그렇지 않다’ 이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광신과 맹목이다. 성경에 대한 자구적(글자 그대로의) 해석과 믿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역사 안에서 교회가 빠진 오류이고 반성한 사실이기도 하다. 정말 하느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을까?, 바벨탑은 어디에 있었나?, 노아의 방주, 예수님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님 탄생 이야기…등등. 교회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지동설 주창을 신성모독으로까지 여기며 위협을 가했다. 재판하고 심문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교회가 여러 세기 동안 주창하고 믿어온 천동설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회의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의문, ‘교회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무엇이 있구나’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의와 믿음간의 관계를 밝혀야 한다. 교회는 그동안 천동설을 믿어왔지만, 교의로 정하지는 않았다. 교의는 무엇인가? 교회 교도권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 믿을 교리로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 바로 교의이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본체로써 한 분이시나 세 위격을 가지신 하느님이라는 교의 - 가톨릭교회 교리서 253-256항 참조)는 교의이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라는 칭호도 교의이며, 7성사, 성모 승천, 등등. 그리고 한번 공적으로 선포된 이 교의는 변하지 않는다. 마치 지금의 성경이 세상 끝 날까지 덧붙여지거나 없어지거나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해석은 변할 수 있다. 그 밖의 세상을 설명하는 여러 것들도 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개신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가톨릭 제2경전 가운데 집회서는 그동안 희랍어 역본만 있었지 히브리어 본은 없었기에 곧, 심증만 있었지 물증은 없었기에 힘 있고 아름다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해왔다. 그러나 1896년 카이로 어느 회당의 게니자(다락방 창고, 서고)에서 수많은 히브리어 필사본들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집회서 히브리어 필사본이 발견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로써 이 제2경전에 대해 개신교도 무시를 못하게 되었다. 요즘은 개신교 목회자들도 설교 때, 제2경전을 자주 인용한다고 하니, 아름답고 뜻깊은 성경을 7권이나 더 가지고 있는 가톨릭을 얼마나 부러워할까.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예들이 바로 성경 해석이 변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것은 지속적인 고고학적 탐구와 발견에 의해 변화되고 확증되고 있다.

 

* 설종권(요한 세례자) 신부는 2008년에 사제 수품 후, 2015년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성경 신학)를 취득하였다. 현재 여주 본당에서 사목을 하고 있다. [외침, 2015년 12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설종권 신부(여주본당 주임)]

 

 

[소공동체와 함께 읽는 성경] 말씀은 곧 사랑이다 (2)

 

 

3, 4천 년 전의 세상은 어떠했을까? 그것도 아시아가 아닌 중동의 어느 지방, 어느 지역의 세상은 어떠했을까? 우리나라 삼국시대 아니 그 이전의 상고시대를 생각하는 것도 까마득할진대, 다른 나라의 지역과 지방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사고는 뿌옇게 짙은 안개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는 성경을 통해 수 천년 전의 세상을 그나마 신자들에게 있어서 우리나라 역사보다도 자세하게 엿볼 수 있으니 이 또한 하느님의 배려가 아닐까?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것도 있겠지만(여기서 성경 편집자의 하느님 손안에서의 상상력의 나래도 무시못할 것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엄연한 역사서이다. 아니 그러면, 우리나라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 실록과 같은 것일까? 여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답은 이것이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 안에서 만난 하느님과의 이야기이다”가 더 올바른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는 역사적 요소와 신앙적 요소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치는 이야기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데, 이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라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인으로써 한발자국 더 나아가 그 메시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거룩한 책인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사악까지 하느님의 뜻이라면서 기꺼이 바치고자 했다 - 물론 지금에서 우리가 말하는 살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야기의 근본 취지와 맞지 않다 -. 늘그막에 얻은 그 귀하디 귀한,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했던 자신의 대를 이어줄 외아들 이사악.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를 마치 선물로 주셨지만, 그 아들을 다시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다. 물론 성경에서는 우리 신앙인 독자들에게 너무나도 친절하게 이것이 하느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아브라함을 위한 시험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잠시 삼천포로 빠져 그 이야기의 스펙터클하고 긴장감 넘치는 장면으로 살짝 들어가 보자.

 

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보인 아브라함의 반응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22장 1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아브라함(많은 수 혹은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 아!” 이 이름(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그 사물이나 인물의 존재 자체나 그가 지닌 사명을 일컫는다 ? 역주)은 이전의 아브람(큰 아버지 혹은 고귀한 아버지) 이라는 이름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면서 새로운 이름인 아브라함을 주신다.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17,4-5).” 이러한 예는 성경 여기저기에 나온다. 야곱의 경우(‘이스라엘 - 하느님께서 다스리신다의 뜻’; 창세 35,10 참조), 또 시몬 베드로, 사라의 경우 등이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이렇게 새로 이름을 주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구약에서 하느님께서는 어떤 새로운 사명을 주실 때, 계약을 맺고 복을 빌어 주실 때, 새로운 이름을 선사하신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시고 계신다. 이러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지금 구약의 하느님과 동일하신 분으로써 하느님의 역할을 하시고 계심을 의미한다. 여하튼 아브라함은 이제 더 이상 한 가족, 한 민족 만의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브람이 아닌, 하느님의 일을 행하고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해야 하는 온 민족의 조상이요, 하느님의 사람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 계약의 상징이요, 계약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아브라함을 어느 날 하느님께서는 부르신다. 그에 대해 아브라함은 마치 언제나 준비되어 깨어 있는 사람처럼 대답한다. “예 여기 있습니다”(창세 22,1). 우리도 이런 자세가 요구 되겠지요. 언제나 주님의 부르심에 깨어 있는, 준비 되어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임을 이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대화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이사악을 자신에게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신다. 이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과 대답은 성경에서 명시되어 있지 않다. 변명도 불평도 아무런 대답도 없다. 침묵만이 흐른다. 마치 예수님께서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어둠이 세 시간 동안 사방을 덮쳤듯이 말이다(마태 27,45참조). 여기서 왜 뜬금없이 예수님 이야기가 나오는지 의아할 것이다. 필자는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대화에서 이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항상 신약을 읽을 때는 구약을 배경으로 읽고, 구약을 읽을 때는 신약과의 연관성을 늘 생각하면서 읽을 때, 더 풍부하게 주님 말씀이 다가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약과 신약 성경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구약은 신약을 준비하고, 신약은 구약의 완성이다). [외침, 2016년 1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설종권 신부(여주본당 주임)]

 

 

[소공동체와 함께 읽는 성경] 말씀은 곧 사랑이다 (3)

 

 

지난 달 구약에서의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대화(창세 22)에 대해 이야기 하였고, 신약과 구약과의 관계(구약은 신약의 준비이고, 신약은 구약의 완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번 달에는 신약에서 나타나는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대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골고타에서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약 세 시간 동안 침묵으로 일관되어 있다(마태 27,45; 마르 15,33; 루카 23,44 참조). 이것이 어둠으로 표현되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두 위격 사이(성부와 성자)의 대화를 느끼고 알 수 있어야 한다. 때론 침묵이 천 마디 말보다 더 큰 의미를 담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침묵 속에 내재된 사랑의 대화가 구약의 하느님과 아브라함 간의 대화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부부싸움에서 서로 자신의 입장에서 원망의 말만 늘어놓을 때, 욕설이 오고갈 때, 어느 순간 한 당사자가 침묵을 할 때 우리는 어떠한가? 상대방도 말을 멈추고 무슨 의미인지를 알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침묵은 안 될 것이다. 때로는 더 큰 싸움의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잠시의 침묵을 통해 남이 아닌 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처럼…. 이사악을 주신 것도 하느님이시요.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창조주 하느님께 불평, 불만을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남편이나 아내를 주신 것도 하느님이시다. 자녀를 주신 것도 재물을 주신 것도 하느님이시다. 그것을 하느님께서 앗아가신다 해도 우리가 불평불만, 원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욥 2,10 참조). 물론 인간적 생각으로 이는 무척이나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의 침묵을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그가 왜 믿음의 성조인지를 우리는 그의 침묵과 하느님 추종을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스스로가 억울하고 남이 나에게 잘못한 것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조금 열린 마음에서 생각하고 이해해 줄 때, 그 침묵은 값지다. 싸울 때, 잠시의 침묵을 통해 나를 되돌아보자. 이해보다는 감정이, 남보다는 ‘나’나 ‘나의 것’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미움과 질투와 욕설이 난무하게 됨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침묵을 통해서 부족한 나를 바라보고 이로 인한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흘린 눈물은 상대방을 감동시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내 것만, 내 자식, 내 물건만을 찾는 것은 원죄를 지닌 인간의 모습이다.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지은 그 바탕에는 내가 하느님의 것을 내 것이 되게 하려는 그 욕심과 교만에서 비롯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창세 3장 참조). 그리고 세상의 혼란과 전쟁, 기아와 난민, 살인과 범죄의 뿌리도 바로 그러한 똑같은 욕심에서 기인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 원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 지극한 자기비움(케노시스) ?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는 사랑 ? 때문에 우리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생각하며, 돕고 사랑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원죄를 용서받은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은 주님을 위해 사는 삶뿐이기 때문이다.

 

성 아브라함이여, 저희 죄인을 위해 빌어 주소서. 아멘.

 

이렇게 성경을 이야기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하고 명심해야 할 것은 삼천년기를 사는 우리의 환경, 사고, 문화 등이 성경의 시대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명기의 말씀을 들어보자. “주 우리 하느님께서 그를 우리에게 넘겨주셨으므로,… 그때에 우리는 시혼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남자,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성읍 주민들을 모조리 전멸시켜, 생존자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신명 2,33-34).”

 

신명기의 또 다른 구절을 들어보자. “우상을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주 너희 하느님은 태워 버리는 불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신명 4,23-24).”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때론 무자비하게 때론 너무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외적인 하느님의 모습이 아닌 ‘왜’ 하느님께서 그들을 전멸시키고자 하셨는지를 물어보아야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신 분이시다(1코린 1,9).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우상숭배로써 이 거룩한 계약을 어겼을 때조차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길 바라셨고 또 참아 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정화할 능력과 마음이 없었고 자꾸만 자꾸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나 떠나는 사내처럼 하느님으로부터 그 마음이 점점 멀어져 갔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련을 허락하신다. [외침, 2016년 2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설종권 신부(여주본당 주임)]

 

 

[소공동체와 함께 읽는 성경] 말씀은 곧 사랑이다 (4)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우상숭배로써 하느님과의 거룩한 계약을 어겼을 때조차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다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는 성실하신 분이시라고 지난 호에서 말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셨고 여러번 참아 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정화할 능력과 마음이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나 떠나는 사내처럼 하느님으로부터 그 마음이 점점 멀어져 갔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불러도 대답없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련을 허락하신다(바빌론 유배, 다른 민족의 침략, 전염병 등).

 

황금도 그 찬란한 빛을 얻기 위해서는 불로 수없이 단련되어야 순금이 되듯, 이스라엘 백성도 그래야 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있다고 하느님께서는 여기셨을 것이다. 여기서 사랑의 역설이 드러난다. 사랑하기에 거리를 두는, 매를 드는 어버이의 마음이 그것이다. 부모가 자신의 자식이 잘못했을 때, 매를 들 때 미운 감정 때문에 매를 드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요즘 부모답지 못한 언행으로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부모의 이야기가 종종 들리는 것을 볼때면 참으로 마음 아프다. 체벌의 문제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스승이 스승다운 모습과 사랑(아가페적 사랑 ? 내어주는, 헌신하는)으로 제자들을 훈육하고 그 잘못에 합당한 벌을 줄 때, 그 제자들은 감동하고 선생님의 사랑을 분명 느끼게 될 것이다. 본인도 학창시절 때 겪은 일이지만, 어떤 교사들은 단지 자기 분에 못이겨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폭력을 휘두른 경우도 보았다. 이러한 소수의 몇몇 잘못된 교사들로 인해 수많은 교사들이 비난을 받고 훈육의 의욕을 잃어버리는 오늘날의 모습을 볼 때, 아이들의 미래가 위태로워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 기성세대가 참된 가치관이 있는 어른으로써의 모습을 자라나는 미래세대에게 보여주어야 할 텐데….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부족한 모습이 바로 우리 대다수가 지닌 표현의 서툼, 감정조절의 서툼, 사랑의 서툼이라는 소통의 부재에 그 원인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소통이 필요하다. 하느님과의 소통, 사람 사이의 소통말이다. 독백(monologue)과 대화(dialogue)의 어원상의 뜻은 이것이다. ‘혼자 말하는 것 또는 혼자 규칙을 정해놓은 것’이 독백이고, ‘둘 이상이 말하는 것, 둘 이상의 규칙을 정해놓는 것’이 대화이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있어 대화가 아닌 독백을 늘어놓는다. 장자의 바다새 이야기는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어느날 노나라 임금의 궁궐에 바다새 한마리가 들어왔다. 왕은 그 바다새를 사랑했기에 놓아주지 않고 가두어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술과 고기, 온갖 산해 진미가 끊이지 않게 했다, 그렇게 몇일이 지나자 바다새는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죽고 말았다. 그때야 노나라 임금은 이런말로 탄식했다고 했다. ‘내가 새를 새로 키운 것이 아니라 새를 사람으로 키우려 했구나.’” 이 이야기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장자의 바다새 이야기는 소통의 문제를 분명히 보여준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도 소통이 잘 안되었다. 아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예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하느님을 피했고,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짓(우상숭배)만을 골라서 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바로 원죄의 결과인 교만 때문이다. 이 교만이 자신의 구미대로만 골라서 마치 자신이 하느님인 양, 필요할 때만 그분을 찾고 의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비단 이러한 모습이 그들만의 모습일까? ‘우리’ 아니 ‘나’는 어떠한가!

 

부부간의 소통, 부모와 자녀간의 소통, 대통령과 국민과의 소통, 친구들과의 소통 등등 오늘날 우리는 소통 강조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다새 이야기의 교훈은 일방적인 독백이 아닌 상대방의 말에 공감하고 받아 들이라는 것이다. 곧 진정한 대화를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서툴기에 대화의 기술이 부족하며, 자기 위주로만, 내 것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내것’, ‘나’를 찾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창세 3장 참조)에 그 뿌리가 있다. 내것만 고집하는 것, 내 가족, 내 나라, 내 종교만 앞세우는 것도 원죄의 결과이기에 심각한 문제이다. 그 이유는 창세기 3장에서 보여지듯 내것만 앞세우며 스스로 하느님처럼 행동하려 하기 때문이다(창세 3,22). 원죄는 따먹지 말라던 선악과를 탐하여 먹음으로써 발생한 죄이다. 그 죄의 결과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선악과를 먹고 보인 인류의 원조상들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1. 알몸을 가림, 2. 하느님을 피함, 3. 남의 탓을 함 (창세 3장 참조). 아담과 하와는 결국 교만이라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 에덴 동산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다. 이 ‘교만’은 바로 인간 스스로가 하느님이 되려고 한 탐욕에 그 바탕이 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3,4-5). 이 소리를 뱀으로부터 전해 들은 여인에게 이 선악과는 더 이상 이전의 선악과가 아니게 된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참스러웠다.” (3,6). 이렇듯 악마의 유혹은 치명적이다. [외침, 2016년 3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설종권 신부(여주본당 주임)]

 

 

[소공동체와 함께 읽는 성경] 말씀은 곧 사랑이다 (5)

 

 

지난 호의 후반부에서 소통의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가 범한 원죄와 그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원죄의 결과로 인류에게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고 하느님과 친교를 누렸던 복된 장소인 에덴 동산으로부터도 인류 첫 조상들의 탐욕과 교만으로 쫓겨나게 되었다(창세 3,24 참조).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시고 당신의 숨을 불어 넣어주신 사람들을 벌하신다. 하지만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포기와 좌절로 성경은 끝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교만과 죄에도 불구하고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시며”(창세 3,21) 보살펴 주신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이야기인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을 저주하시지만 그를 살려주시고 보살펴 주신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창세 4,15). 이어서 하느님께서는 대대로 인류의 자손들을 번성시키신다.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하느님께서 가장 역겨워 하시는 짓거리인 우상숭배(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것; 탈출 32장 참조)와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산다(탈출 16,1-4.8; 17,3 등 참조). 여기에 더하여 위급할 때에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하느님을 찾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기도 하며 선민사상에 휩싸여 하느님을 이용하려 드는데, 신명 32장에서 모세는 노래를 지어 그러한 백성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너희는 너희를 낳으신 바위를 무시하고 너희를 세상에 내신 하느님을 잊어버렸다”(32,18).

 

이에 이스라엘 백성의 선민사상도 결국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데 기원전 587년에 있었던 바빌론 유배 사건이 그 정점이다. 이 유배는 하느님 빽(?)만 믿고 설쳐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 깊은 절망과 어둠의 나락으로 추락하게 했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인 우리에게 ‘왜’, ‘왜’라는 질문을 통한 통렬하고 처절한 반성을 하게 했다. 결국 겉으로는 하느님을 찾는 척 하면서, 하느님 아닌 내 것과 다른 것에만 집착하고 몰두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오늘날 같은 다문화, 다종교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느님을 오직 자신들만의 소유물인 양 착각하면서,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의 행동을 하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들과, 내 것만 옳다고 무조건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하느님의 뜻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 아니 더 나아가 타인이 나보다 낫다고 여기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필리피 2,3 참조).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순종하고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소통의 문제는 상대방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내 것만 주장할 때 발생한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존중하려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도 우선이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내려놓으셨으며, 소외받는 이들과 사회적 약자를 우선시 하셨다. 이는 한편으로는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을 향한 외침이요 가르침이셨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진정한 율법의 정신을 몸소 가르쳐 주신 것이다(마르 7장 참조). 예수님 마음의 기본 바탕은 바로 철저한 자기 비움과 타인, 그것도 그 시대의 약자를 대변하시고 그들을 향하시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공감의 달인이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셨으며, 함께 슬퍼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의 고통으로 향하셨으며,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시면서 아파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셨고, 그들이 행복하게 될 미래를 약속하셨다. 마태오 복음 5장의 참된 행복 선언은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하느님의 소통방식은 이렇게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에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육화의 신비는 이런 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이러한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처절한 사랑은 고통의 연속이셨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스라엘 백성과 그 후손들, 현재의 우리들을 포함해서 하느님 아닌 다른 우상을 얼마나 섬기면서 살고 있는가!

 

하느님의 소통은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그리고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심지어 당신의 외아드님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그래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소통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아니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한 실천이 따라야 한다. 교회가 소통의 모범을 보이지 못할 때, 그 교회는 자기 이익과 권력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하나의 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 현실은 전자보다 후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이는 비단 어느 한 종파의 문제가 아닌 그리스도교 모두의 문제일 것이다. 이 시대의 화두는 이렇게 ‘소통’이다. 하느님과의, 성직자들 사이의, 성직자와 교우들 사이의, 교우들 서로서로의 소통. 과연 얼마나 잘 소통이 이뤄져 가고 있는가? 아직도 ‘나(ego)’가 하느님 위에서 우상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의 사랑과 자기 비움을 따른다하면서 내 것만 주장하고 있지는 않는지…. 바빌론 유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감했던 ‘내 탓이오’가 더 늦지 않게 우리의 영혼과 정신과 육신 안에도 스며들어 체화(體化)되길 바라며…. [외침, 2016년 4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설종권 신부(여주본당 주임)]

 

 

[소공동체와 함께 읽는 성경] 말씀은 곧 사랑이다 (6)

 

 

지난 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자기 비움을 통한 인류와의 소통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수님의 철저한 비움을 통해 이 세상에 구원이 오게 되었음에 우리 신앙인들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호에는 본래의 이 연재 취지와는 달리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가족 이야기를 조심스레하고 싶다.

오늘도 옥신각신이다. 그 놈의 술 때문에, 오형제의 아들을 둔 가장의 고단함에서 빚어진 스트레스 때문일까, 아버지께서는 내 어린 날, 술을 자주 드셨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의 잔소리와 바가지의 소낙비 안에서 아버지의 화는 불길이 되었다. 부모님의 부부싸움은 이렇게 막내인 나에게 있어, 어린 날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아버지의 폭력적인 그 모습이 잊혀지질 않게 되었다. 그 모습이 밖에서 존중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 심리였음을 그 당시에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그 싸움이 싫었다. 어머니께 대들지 말라고 참고 나가자고 울고 불며 매달렸다. 똑같은 말들의 반복으로 서로에게 상처 주는 그 지난한 싸움의 끝은 언제나 이렇게 공허로 끝났다. 푸념, 원망, 미움, 상처로 얼룩진 그 싸움을 보고 자라며, 나는 절대 부모님처럼 살지는 않겠노라고 결심했었다.

이렇게 멈춰버린 듯한, 어서 빨리 성인이 되어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던 나에게도 세월의 힘은 누구에게도 차별 없이 작용했다. 어린 날의 나는 이제 불혹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세월의 무소불위의 힘 앞에 어느덧, 부모님의 검은 머리는 하루가 다르게 그 생기를 잃고 하얀 소복으로 그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어머니의 허리는 벼 이삭처럼 굽어져 가고 있다. 옛날의 어르신들이 다 그렇듯, 자식 키우시고 먹이시느라, 노후를 미처 준비하지 못하신 부모님은 점점 초라한 모습으로 자식들에게 힘없는 존재로 탈바꿈해 가셨다. 의지한 채.

하지만, 두 분의 모습은 한 단계 진보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50년을 훌쩍 넘긴 혼인의 기간, 이제 두 분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탈바꿈하셨다. 두 손을 꼭 잡고 공원을 산책하시고, 성당에 가시며, 서로의 등에 기대어 TV를 보시고, 서로의 음식을 준비하시며, 그렇게 이 두 분은 하나가 되어 가셨다. 성경에서 말하는, 남자와 여자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것이 결혼(마태 19,5-6)이라면, 이 두 분은 지금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결혼을 한 모습임을 몸소 보여 주신다. 이제 자신의 반쪽이라고 서로를 생각하시는 우리 부모님. 과거의 앙금은 사라지고, 서로 반성하시는 모습 속에서 아름답게 반짝 빛나는 진정한 하나됨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배운 것도 없이, 그저 자식들 바라보시며, 아들 다섯을 고등학교, 대학까지 보내셨던, 부모님의 인생을 이제는 성숙한 나의 눈과 마음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때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분들이라고 더 좋은 곳에서 더 맛난 것을 먹이며 키우고 싶지 않으셨을까. 하지만, 남 속이지 않고, 당신들의 길을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이 걸어가신 그분들을 바라보노라면, 이제 남은 것은 그분들을 향한 사랑과 존경이리라.

이제야 깨닫습니다. 아버지의 술은 당신의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잠시 잊게 해주는 오아시스였음을, 어머니의 아버지를 향한 핀잔은 그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잊지 말라는, 그리고 다섯 아들을 한번 더 바라보고 힘을 내자는 다그침이었음을.

그 동안의 어린 마음의 상처들로 인해,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어깨라도 한번 더 두드려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밀려옵니다. 이제야 보게 됩니다. 아들의 구두를 미리 닦아 놓으시고, 교복을 다려 주시며, 약수를 자전거에 매일 실어 나르시던 아버지, 아들 다섯의 도시락을 30년간 싸신 어머니, 피곤한 몸을 뒤로하고, 아프다는 내색 없이, 자식들의 식사를 해 주기 위해서 꼭두새벽에 일어나시어 찬물에 손을 담그시고, 보글보글 국을 끓으신 어머니, 등교 길에 자식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늘 바라보시며 손을 흔드신 어머니.

그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함을 왜 어린 날의 우리는 잘 깨닫지 못했는지, 그분들의 행동이 내리사랑이었음을 왜 몰랐는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아등바등 살아 보시려, 발버둥치시며 살아오신 그분들의 모습이 왜 이제야 느껴지는지 후회가 밀려옵니다.

이제 부모님의 꼭 잡으신 주름진 두 손을 바라봅니다. 아름답게 웃고 계신 그분들의 미소를 바라봅니다.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으시려, 손사래 저으시는 부모님의 힘없는 팔을 바라봅니다. 자식들에게 뭐라도 주시려고 허리를 굽히신 두 분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늘 자식들의 행복을 바라시고 건강을 기원해 주시는 그 부르튼 입술을 바라봅니다. 언제나 자식들을 사랑으로 바라보시는 그 사랑의 눈을 이제야 바라보게 됩니다.

부모님의 백년해로가 언제 이 지상에서의 끝을 맞을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언제나 하나인 모습을 보여주실 두 분, 그분들을 위해 두 손을 모읍니다.

하느님, 당신 곁으로 이 두 분을 데려 가실 날이 언젠가 옴을 압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저희 곁에 언제나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 하게 하소서. 그분들의 품속에 늘 제가 있게 하소서. 제 품에 항상 그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그분들을 축복하소서. 그분들은 축복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랑, 그들에게 보여주소서. 모든 부모님들에게 당신 사랑의 축복을 내리소서. 아멘! [외침, 2016년 5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설종권 신부(여주본당 주임)]

 

 

[소공동체와 함께 읽는 성경] 말씀은 곧 사랑이다 (7)

 

 

지난 호에서 필자는 가정의 달을 맞아 비록 『외침』지에서 원하는 집필 목적과는 다르지만 소개하고 싶었던 필자의 부모님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계속해서 하느님과 예수님의 인간과의 소통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특히 성경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하느님과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인간들의 올바른 소통방식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오늘날의 세상은 자기 자신(ego)에 대한 애착을 넘어서 그것을 향한 숭배(나르시시즘 - 자기애, 자아도취)로 나아가는 것 같다. 저마다 스스로를 치장하기에 바쁘다. 어렸을 때부터 성형수술이 행해지고 저마다 더 오똑한 콧날, 더 진한 쌍꺼풀, 왕(王)자 복근을 갖기 위해 안간힘이다. 외적으로 더 아름다워지고 더 멋있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래야 더 좋은 직업과 더 좋은 배우자와 더 많은 호감과 부러움을 살 수 있으니까. 이는 우리 모두가 느끼는, 그리고 소유하고 싶은 당연한 본능일 것이다. 게다가 사회 또한 이러한 외모 지상주의라는 흐름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는 편승하여 더 조장하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인간으로써 지니고 있는 천부적 인권과 개개인의 소중함과 개성이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자리에 차별과 외모에 대한 공격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덕, 아름다움을 가꾸기보다는 외적인 모습에만 치중하는 오늘날, 사무엘기 상권에서 하느님께서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실 때의 말씀이 떠오른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된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물론 어느 한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자극인 외적인 모습이 판단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사람에 대한 1차 정보는 바로 외모이기 때문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대로 사람은 외형적인 모습과 목소리에 영향을 받고 사람들을 판단한다.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사람을 알아감에 있어 대개의 경우 외모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행색이 누추하고 경차를 차고 다니면 무시당한다 생각하고(실제로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반대로 값비싼 명품 옷에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 존중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은연중에 알아간다. 이로 인해 여자는 명품, 남자는 차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사기꾼 가운데 외모가 멋있고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더 신뢰를 얻어 그 신뢰를 바탕으로 많은 이들을 속여 심각한 피해를 사회에 초래하는 경우를 종종 뉴스에서 목격하게 된다.

교우분들에게 언젠가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을 지니셨을까요?’라는 질문을 한적이 있었다. 2천 년 전 신발도 없이 씻을 물도 넉넉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땅에서 샴푸와 비누도 없이 노숙을 즐기시면서 썬크림도 없이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활보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 걸으실 때, 어깨까지 오는 긴 생머리가 찰랑찰랑 물결치는 저 서양의 식스팩 복근을 지닌 멋진 미남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불규칙한 치열, 새카맣게 그을린 피부에 수많은 기미, 떡진 머리, 땀냄새에 온통 부르트고 굳은 살이 배긴 손과 발이 그분의 모습이라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탈리아 마노뺄로(Manoppello)라는 곳에 있는 베로니카의 수건으로 알려진 천에 새겨진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생각을 뒤엎는다(인터넷에서 Manoppello를 한번 찾아보시길).

각설하고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알려할 때, 외모에 대한 ‘판단 중지’를 내리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마음의 눈(심안)으로 바라보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심안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을 사귀면서 자라나게 된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급한 판단을 내려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기 보다는 장고의 시간 안에서 내 스스로 들어주고 이해하려는 진정한 대화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있듯, 우리 마음의 눈을 먼저 정화시켜야지만,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바라보아야(마태 7,3-5 참조), 참된 만남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자신의 단점은 바라보지 못하면서, 내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마음, 남을 무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는 한 진정한 대화와 만남은 불가능할 것이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 그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때론 상처받을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다. 인간관계 이것은 참으로 어렵다. 내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거나 대화가 아닌 독백으로 자기 말만 할 때 인간관계는 어그러진다.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해 줄 때에만 그 관계는 바른 방향으로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서로를 알기 위한 노력은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성경의 말씀은 기록되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로 당신의 말씀을 전해 주셨다. 따라서 그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소통과 공감하기 위해서, 또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이 말씀은 정경으로써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에게 건네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남게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은 힘있고 능력이 있으며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요한 6,68; 히브 1,3 참조). [외침, 2016년 6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설종권 신부(여주본당 주임)]

 

 

[소공동체와 함께 읽는 성경] 말씀은 곧 사랑이다 (8)

 

 

지난 호에서 필자는 사회의 외모지상주의와 소통의 부재를 언급했다. 또한 진정으로 소통과 만남을 갖기 위해서는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색안경을 벗어 버리고 ‘판단중지’와 더불어 외모가 아닌 상대방 내면의 말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말미에 하느님의 살아있는 생명과 능력의 말씀을 담고 있는 성경을 통한 하느님과의 소통을 잠시 다루었다. 이제 이번 호부터는 하느님의 능력과 생명의 말씀이 어떻게 성경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가에 대해 다루겠다.

말씀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다바르’(dabar)인데(희랍어로는 ‘로고스 logos’), 이 단어는 그 자체로 효력(또는 효과)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단적인 예로, 이 하느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3절에서처럼 말을 내뱉는 동시에 효력을 가진다 :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이 하느님의 ‘다바르’는 이사야 예언서 55장 10-11절의 말씀으로 그 정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렇듯 하느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고 힘있고 생명을 주는 살아있는 말씀이다. 따라서 이런 말씀으로 가득 채워진 성경은 그 본질상 귀하디 귀하며, 창조와 생명의 능력이 그 안에 충만히 내재되어 있다. 그 가치를 알아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유형 무형의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성경 말씀에 따라 실천할 때에만 그 말씀은 언제나 힘있는 능력과 생명의 말씀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장 몇절에 무슨 말씀이 있느냐?’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 그런 말씀을 하셨고, 그것이 ‘무슨’ 뜻이며, 현재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이다. 그리고 성경 말씀은 최종적으로 ‘그 말씀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느님의 육화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말씀의 결정체다. 바로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기 때문이고(로고스 : 요한 1,1 참조), 그 말씀을 통해 인류에게 생명이 오게 되었기 때문이며, 그 말씀과 더불어 지금도 우리 인류는 그분께서 말씀으로 약속하신 것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러한 생명의 말씀을 담고 있는 성경은 그 특성상 본질적으로 인류와 소통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류에게 믿음을 그 응답으로 요구하고 계신다. 하느님께서 먼저 성경을 통해 인류 역사 안에서 구원을 약속하셨고 마련하셨기에, 이제 인류가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이라고 하겠다.

신앙이란 히브리 말로 ‘aman’(    )이라고 한다(구약에서의 단어 사용의 예 : 신명 9,23; 시편 78,22; 93,5 등 참조). 이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는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첫째는 ‘스스로를 그 위에 놓다’, ‘스스로를 굳건히 놓다’, ‘신뢰를 두다’라는 의미로 어머니 품에 꼭 안기어 젖을 먹는 갓난아이의 상태를 말하고, 두 번째는 ‘어떤 안전한 보호에로 자신을 내어던짐’을 의미한다. 필자는 교우들에게 이런 예를 든다 : 어떤 사람과 예수님이 있다. 하지만 그 둘 사이를 2미터 정도의 낭떠러지가 가로막고 있다. 두 팔을 벌리신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당신께로 건너오라고 손짓하신다. 이제 선택은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 인간이 이제 최종 선택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래 선택했어! 이 선택은 나의 생명과 연관이 되어 있는 만큼 신중한 결단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선택할 수 있다. 껑충 도약해서 예수님 품에 안기거나 아니면 인간의 눈을 현혹하고 어둡게 하며 영원한 어둠이 그 종락인 현실에 안주하거나. 그러나 현세의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 - 안타깝지만 그리스도인들조차도 -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선택하는 듯하다.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그 2미터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할 수 없어’, ‘불가능해’, ‘왜 내가 그래야 하지’ 하면서 애써 두 팔 벌리신 채 우리에게 당신의 길을 따르라고 손짓 하시고 계신 그분을 외면한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예고를 하신 후에 베드로가 보인 반응(마르 8,31-33 참조)이며, 타볼 산에서 베드로가 보인 현실에 안주하려는 반응(마르 9,1-10 참조)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셨다. 그 길은 바로 요한 복음에서 언급하는 영광으로 이르는 길이며,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길이었다. 하지만, 그분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우리들은 그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르기보다는 포기하고 외면하려고 한다. 마치 가시덤불이나 돌밭에 떨어진 씨앗처럼(마르 4,1-9 참조)…. [외침, 2016년 7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설종권 신부(여주본당 주임)]

 

 

[소공동체와 함께 읽는 성경] 말씀은 곧 사랑이다 (9)

 

 

지난 호에서, 필자는 하느님의 말씀인 ‘다바르’에 대한 의미와 우리 인간이 지녀야 할 ‘신앙’이란 말의 어원에 대해 다루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 올바른 신앙인이란, 현재 있는 현실에만 안주하려 하기 보다는 ‘현재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일까’라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번 호부터는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하면 잘 깨달을 수 있고, 과연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성경에 나오는 여러 예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하느님의 말씀(다바르)은 본질적으로 그 효력을 지니고 있다고 지난 호에서 언급했다. 그런데 성경, 특히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무서운 하느님, 인간을 벌하시는 하느님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하느님께서는 그 이민족들의 씨를 말리라고 아주 잔혹한 표현인 ‘전멸’(신명 2,34; 3,6; 7,2 등등)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을 말씀하시며 ‘보시니 좋았다’(창세 1,10)라고 말씀하셨던 하느님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알아 들어야 할까? 이는 당시 역사·문화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선민사상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만군의 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맺으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창세 9,8~9). 이 계약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해 이어지게 된다(창세 17,7; 탈출 19장 참조). 이렇게 하느님께서 한 민족과 계약을 맺으시는 이유는 이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는 한분이신 하느님만이 모든 신들 위에 위대하신 임금님이시요, 주님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시편 95,3; 97,9 참조). 또한 하느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짐으로써 모든 민족들이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을 경외하고 따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승리자의 역사, 이스라엘 백성의 편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계약을 맺으시는 사랑과 능력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만군의 주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미워하거나 위협하는 자들은 하느님을 적대하는 자들로써 하느님의 분노를 사는 것이 마땅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너무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렇게 한 종족이나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멸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측면에서는 정의롭고 그들을 보호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종교나 종족 간 이념의 차이로 인해 피비린내 나는 종족 학살이 일어났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의한 유태인 대학살 - 6백만 명 희생; 1992년 보스니아에서의 인종청소 - 25만 명 희생; 1994년 르완다 내전에서 후투족의 투치족 집단 대학살 - 80만 명 희생 등).

이렇게 어떤 역사관으로 누가 썼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 있다. 최근 대한민국의 이슈였던 국정화 교과서 문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편협된 역사관을 미래 세대에 심어줄 수 있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야 하며, 논의에 논의를 거쳐야 한다는 데에 공감하게 된다. 구약성경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어 언제나 보호하시며 우상숭배를 하지 말고 제발 나를, 나만을 바라보라고 호소하시고 절규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의 사랑을 너무나 열망하시는 하느님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가장 역겨워하시는 우상숭배(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것)를 밥먹듯 하여 하느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며, 화를 돋우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경고하시며 때로는 시련과 고통을 주시지만 이 또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사랑을 얼마나 갈구하고 계시는지 보여주는 또다른 표현일 것이다. 전임 교종이신 베네딕토 16세의 첫 번째 회칙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에서 교종은 사랑에 대한 설명을 그리스어를 예로 드시며 탁월하게 말씀하셨다. 그리스어로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는 세가지이다: agape(아가페), philia(필리아), eros(에로스). 요약하여 말하자면, 아가페는 ‘내어주는 사랑’,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랑’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심지어는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라 할 수 있다. 반면 에로스는 ‘소유하려는 사랑’이다. ‘우애’를 의미하는 필리아는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다(요한 21, 15-19 참조).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하느님께서는 아가페와 에로스 모두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라는 점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면서까지, 당신 전부를 버리시면서까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다. 우리 인간에게 당신께서 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에 만드셨던 당신의 나라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신적 권위까지 버리시는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사랑을 소유하시고 싶으신 하느님이시다. 이는 당연하다. 당신께서 만드신 인간이 당신을 바라보려 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떤 마음이시겠는가! 이렇게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랑을 호소하시는, 회개를 바라시는 하느님을 외면하고 자신들 눈앞의 이익에만, 우상들에게만 마음을 기울였던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크나큰 시련을 허락하신다. 기원전 587년 바빌론 유배의 쓰라린 고통과 시련을 겪고 나서야, 저 절망의 끝에 다다르고 나서야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며 ‘내 탓이오’를 외치게 된다. [외침, 2016년 8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설종권 신부(여주본당 주임)]

 

 

[소공동체와 함께 읽는 성경] 말씀은 곧 사랑이다 (10)

 

 

지난 호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신 사랑의 속성(아가페와 에로스)과 이스라엘 백성의 선민사상의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기원전 586년에 있었던 50여 년간의 바빌론 유배(예루살렘에서 바빌론까지 끌려간 약 1300km의 고난과 죽음의 행군)와 그로 인한 이스라엘 백성의 실존적 의문(정체성)과 더불어 예수님 이야기를 그려나가고자 한다.

기원전 922년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다스리던 북이스라엘(10지파)과 르호보암이 통치하는 남 유다(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나뉘게 된다. 기원전 722년 북 이스라엘이 먼저 아시리아 제국(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위치했던 나라로 기원전 609년 바빌론 제국에 의해 멸망)에 의해 멸망하고 남 유다마저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 제국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제국의 속국이 되어 바빌론 왕이 임명하는 허수아비 왕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다스리게 되어 명맥을 유지하는 허울뿐인 나라가 된다. 그러다가 바빌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기원전 539년)하게 되고 페르시아 황제 키루스는 칙령을 내려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하던 유대인들을 풀어주고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립하도록 허락한다. 이 성전은 기원전 515년 우여곡절 끝에 완성되기에 이른다(이에 대해서는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를 참조).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은 약 50년이라는 뼈아픈 시련의 시간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 바빌론 유배를 거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처절한 반성과 실존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하게 된다. 처음에 그들은 ‘왜 우리가 이런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 하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진정 버리셨는가?’라고 자문하면서 이 고통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라고 했던가! 이스라엘 백성은 작금의 고통스런 처지에 대해 하느님을 원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고통의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 마치 우리나라가 35년 간의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더욱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였듯이, 이스라엘 백성도 유배 중에 처절한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여기서 역사 교육에 대한 당위성이 드러난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고 올바른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역사 교육의 필요성이 그것이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했던가! 이런 역사를 교훈 삼아 이집트 탈출을 이끄셨던, 바다를 가르셨던, 광야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을 언제나 해결해 주셨던, 언제나 그들과 함께 계셨던 오직 한 분이신 임마누엘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지 않고 우상 숭배에 빠져있었던 자신들의 부끄러운 지난날을 처절히 반성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제2이사야서(40-55장)에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40,7); “나는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45,5).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를 바라보아다오’, ‘내가 여기 있지 않니’하시면서 늘 호소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처럼 바빌론 유배는 민족주의적 선민사상에 빠져 있어서 정작 하느님을 알고도 바라보지 못하고 하느님 편에서만 짝사랑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환골탈태하게 하여 다시 한 번 그들의 잘못을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예언자 에제키엘은 이 처절했던 바빌론 유배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사람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 원인은 바로 “너는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피를 쏟아 자기의 때를 재촉하는 도성, 우상들을 만들어 자신을 부정하게 만든 도성아! 네가 쏟은 피로 너는 죄를 지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너는 부정하게 되었다. 너는 스스로 너의 날을 앞당겼다. 너에게 정해진 햇수의 기한이 찼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민족들의 우셋거리로, 모든 나라의 조롱거리로 만든다… 나는 너의 주민들을 민족들 사이로 쫓아 버리고 여러 나라로 흩어 버려, 너에게서 부정을 치우겠다. 너는 스스로 잘못을 저질러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더럽혀질 것이다. 그제야 너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22,3-4.15-16)라는 구절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유배 기간 동안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 탓이오’를 하게 된다. 동시에 그들은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신 하느님(시편 86,15; 탈출 34,6 참조) 이시지만 인내의 끝에 이르시면 민수 14,18의 말씀처럼 “주님은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충만하며 죄악과 악행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벌한다”라는 이 말씀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 대한 그들만의 방식으로의 사랑과 충성이라는 미명아래 더욱 더 민족주의적으로 순수 혈통보존으로 흘러갔다(이에 대해서는 에즈라와 느헤미야기 참조). 그리고 계속해서 외세(그리스 시대와 로마 제국)의 침략에 허덕이다가 결국 또 다른 멸망의 늪에 빠지게 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백성의 지도자들은 결국 마지막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되며 파멸을 앞당긴다. [외침, 2016년 9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설종권 신부(여주본당 주임)]

 

 

[소공동체와 함께 읽는 성경] 말씀은 곧 사랑이다 (11)

 

 

지난 호에서 필자는 바빌론 유배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 보았다. 요약하자면, 바빌론 유배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신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지만(선민의식에서 나오는 우월주의와 우상숭배의 잘못에 대한 벌), 지속적으로 개발 · 발전시키지는 못했고 다시 자신들의 아집과 선민의식에 빠지게 되는 악순환의 길을 걸어가게 했다. 그들은 시대의 선각자요, 하느님의 사자들인 예언자들의 말에 귀기울이며 회개의 삶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뼈아프고 마음을 찌르는 소리, 하느님의 벌에 대한 두려운 말을 하는 그들을 박해하고 없애려고 했다. ‘진실은 아프다’라고 했던가! 진실을 외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구약의 예언자들이요 의인들을 박해했고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신약을 잇는 요한 세례자를 죽였고 마침내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인 아들이요 메시아요 구원자이신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날에도 그들에게 아직도 도래하지 않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열강을 뒤에 업고 중동의 화약고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더욱더 철저히 자신들만의 게토(소수 인종이나 민족, 종교집단이 거주하는 도시 안의 한 구역을 지칭)를 만들며 자신들을 선택하시어 이집트로부터 탈출시키신 하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2천년전 그들의 반대와 불신, 박해가 온 인류의 메시아를 도래하게 했다는데 또다른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향한 언젠가 있을 수도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와 기다림,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다림은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는 동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진 현 사유와 세계 속에서 하느님의 시선과 그분의 사유를 짐작해 보는 것도 우리 인류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본래의 논지로 돌아오겠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 세력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지위를 누리고 지키려 백성들을 속이고 때로는 그들 간의 이간질을 통해 분열시키며 이용하려 든다. 이렇게 역사를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잘못을 반복하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잘못을 지적하는 예언자들과 특히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존재 자체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 요한 복음은 그 머리말에서 이렇게 잘 묘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1,9-11). 이렇게 빛 자체이시요,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다. 그 이유는 요한 복음 3,16절에 잘 나타나 있다 :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렇게 대표적으로 요한 복음을 예로 들었지만 4복음서는 예수님의 백성들을 향한 십자가의 길, 구원의 길, 사랑의 길을 알려주는 책이다. 혹자는 왜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이 반복되는 복음서가 네 권이나 필요하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것은 ‘공관복음 문제’라는 제목으로 다루어지는데, 2세기경 타티아노는 네 권의 복음서를 한권으로 편집했다. 하지만 이 성경은 교회 안에서 그리 오래 읽혀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무엇인가 부족한 듯한, 억지로 짜맞춘 듯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씌어진 시기와 장소, 편집자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의 문제점을 가지고 접근했던 개별 복음서를 한 권으로 만들었다는 자체에서 그 실효성은 의문이 되고 편리성만 강조된 듯한 느낌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갈릴래아와 예루살렘 일대에 사셨던 실제 인물이셨다. 그분은 30년이라는 짧은 삶을 사셨지만, 아니 그분 삶 안에서 3년도 안되는 공생활을 하셨지만, 그 동안 세상을 바꾸어 놓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신 분이시다. 세상을 바꾸기에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인류에게 끼친 그 정신사적 영향이 중요한 것이다. 그분 삶의 모습은 그렇게 인류의 정신을 움직였고 어제도 오늘도 그러했듯 수많은 사람들 안에 내일도 삶의 기준이요 유일한 희망으로 함께하고 계시다. 그런 그분의 말씀과 행적은 목격증인이었던 제자들과 가족들에 의해 구전되다가 목격증인들이 점점 사라지자 책으로 기록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때가 서기 50년 이후로 테살로니카 1서가 가장 먼저 기술되고(벌써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로 퍼졌음을 알 수 있다), 70년 경부터 복음서가 집필되기에 이른다. 70년 로마제국으로부터의 예루살렘 성전 함락 이후에 기술(논란은 있다)된 마르코 복음서를 필두로 80~90년 경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 100~110년 경 요한 복음서가 기술된다. 이외에도 외경으로 많은 복음서들(이를테면, 토마스, 마리아, 베드로 등등)이 존재하지만 3세기 정경으로 오직 이 네 권만이 복음서로 받아들여져 지금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저술 시기와 장소, 집필자(편집자)의 삶의 자리가 다르고 공동체마다의 상황이 달랐기에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도, 말씀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다른 이야기 좀 하고 가고 싶다. [외침, 2016년 10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설종권 신부(여주본당 주임)]

 

 

[소공동체와 함께 읽는 성경] 말씀은 곧 사랑이다 (12)

 

 

지난 호에서 필자는 왜 네 권의 복음서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다루었다(네 권의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더 입체적으로 더 풍요롭고 충만하게 우리들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서는 어떻게 성경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

2~3년전 만해도 온갖 매스컴에서 오디션 열풍이 불고 있었다.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그 당시에는 너도나도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오디션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실제로 이슈가 되었었다. 특히 슈퍼스타 K, 위대한 탄생, K-pop 스타 등등 서로 경쟁하듯 그 열풍에 가세했다. 이 오디션 프로그램은 많은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었고 지금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물론 문제도 없진 않지만, 대화의 주제에 종종 이런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분명 또 흥미를 끄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분명 누군가의 수필집이나 시나리오, 잡지, 신문에서 현재의 이슈인 이런 것들이 종종 다루어지기도 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0년 전에는 어떠했는가? HOT나 젝스키스, 핑클 등등 이른바 X세대의 많은 아이돌들이 많은 매스컴의 1면을 장식했었다. 지금은 물론 방탄소년단이나 여자친구, 빅스, AOA 등등 청소년들 아니면 생소한 이름들의 아이돌들로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반대로 지금부터 30년이나 40년 전 가수나 노래는 요즘 아이들에게 너무나 생소하게 들린다.

얼마 전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쎄시봉은 필자도 잘 들어 보지 못한 그룹이었다. 기성세대들에게 현재의 아이돌이 낯설듯,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현인 씨나, 전영록, 하춘화, 은방울 자매가 낯설다. 그 분들도 한때는 아이돌만큼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었던 분들이었음을 아는 젊은이들은 많지 않다. 필자가 이렇게 연예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를 끌어들이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있다. 요즘 신문이나 책에 이미 고인이 되신 백설희씨나 김정구씨가 등장하면, 필자도 그 분들이 누구신지 생소하다. 무엇을 하셨고 어떻게 지내셨는지 말이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그 분들을 찾아보면 ‘아! 이런 분이셨구나!’라고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40년대 책을 썼던 작가가 이런 분들의 이름을 인용하거나 당시의 노래 제목이나 유행했던 것들을 책 속에서 이야기 하게 되면, 오늘날의 독자들은 쉽게 그 상황이나 말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천 년 전에 씌어진 성경은 어떠할까? 몇십 년 전의 인물이나 이야기도 이렇게 생소할진대, 수천 년 전의 그것도 외국의 인물과 이야기, 지명, 문화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성경을 올바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삶의 자리’, 다시 말해 그 당시의 문화, 정치, 경제, 환경 등을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행동하셨던 가르침들과 이유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다시 현재화시켜 우리들에게 영원히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예수님께서는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율법에 따라 바칠 수밖에 없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다(레위 5,7; 12,8; 루카 2,24 참조). 가진 자들은 양이나 염소 혹은 소를 바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의 표현을 통해 당시에도 빈부격차가 있었고 예수님의 가정환경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렇듯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신 예수님께서는 곡식이나 동물들의 귀중함을 자연스레 체득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가난하셨기에 가난으로 인해 사람들을 더 벼랑끝으로 내모는 국가와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던 불합리와 부조리에 내몰린 서민들의 고통과 시련에 대해 공감하셨고 몸소 이를 타파하시려 하셨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전정화이다(마태 21,12-13; 요한 2,13-22 등).

이 성전 정화는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가장 거룩한 곳,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과 정신과 마음의 고향이요, 중심이었던 성전에서 외쳐진 한마디는 당시의 세태를 요약한 신랄한 한마디 절규였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나”(마태 21,13). 당시 정치, 종교, 사회, 경제의 중심지였던 성전 한복판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체제전복행위(?)는 정치와 종교와 경제가 맞물려 있었던 기득권 세력들을 뿌리채 뒤흔들고 전복시키려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환전상들과 동물 판매상들이 성전 책임자들에게 바친 뇌물들, 순례객들에 대한 폭리, 이를 또 돈을 받고 눈감아 주는 관리들, 그리고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에서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았던 서민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성전 정화 행위는 다른 한편으로는 서민들의 절대 지지를 받았다(남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속시원히 대변해주는 그런 느낌이랄까). 이로 인해 생긴 기득권 세력의 두려움은 성경에 잘 묘사되어 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마르 11,18).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자발적으로 택하셨다. 이제 인류 구원을 향한 처절한 십자가의 길의 종착역에 다다르게 된다. [외침, 2016년 11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설종권 신부(여주본당 주임)]

 

 

[소공동체와 함께 읽는 성경] 말씀은 곧 사랑이다 (13)

 

 

지난 호에서 필자는 성경에 대해 당시 문화와 정치 사회 경제를 염두해 두고 접근해야 예수님의 메시지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런 맥락 안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성전정화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연재의 마무리에 와 있다. 필자는 그동안 성경에 대한 조천한 지식을 가지고 연재를 하면서 한없는 부끄러움과 부담감을 솔직히 느꼈다. 무엇인가에 쫓기면서 해치우기식 연재를 쓴 적도 있음을 고백한다. 주님의 말씀이 담겨져 있는 그래서 우리 인간의 실천을 철저히 요구하는 성경말씀을 이야기하면서 필자 본인이 그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한 그 말씀을 실천했는가하는 성찰을 해보며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주님께 더욱 사랑해 달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다. 이제 마무리를 하려한다. 이 글을 연재할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며 주님께 오롯이 바치고자 한다. 여기서는 Text(본문)와 Context(문맥)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성경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본문들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뒤의 본문들과의 문맥을 늘 염두해 두어야만 한다. 성경(Biblia 책들이며 Biblos책)은 73권으로 이뤄어진 한질의 큰 책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로 시작되며 요한 묵시록의 새하늘과 새땅(21장)으로 갈무리되는 성경은 끊임없는 천지창조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는 책이다. 이 새하늘과 새땅은 ‘나(ego)’라는 실존을 통해 세상 끝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성경이라는 전체 맥락 안에서 본문을 읽을 때에만 올바른 의미를 깨달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성경 본문을 통해 지금의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가며 살아가야하는지가 설명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경은 세상 끝날까지 각자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메시아를 향해 한 인간이 걸어야할 길을 보여주는 실존에 관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면서 그저 과거의 좋은 말씀으로만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생명의 말씀을 죽은 말씀으로 만드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럴 때에만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으며 살아있고 생명을 주는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몫은 전적으로 태초부터 살아온 사람들이 각자의 지금 이 순간을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에 달려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에만 우리 개별 인간은 또다른 그리스도(Alter Christus)가 되어 지금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요한 복음에서 강조되는 현재적 종말론이다(3,18 참조).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이라는 논지다. 이 근거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2천년 전 직접 십자가의 길을 먼저 걸어가셨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참 권위의 모습을 보여주셨으며 수많은 이들을 당신의 권위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끄셨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만 속해 있는 사람들이며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세례(세례성사)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하며(성체성사)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고(고해성사) 그리스도로부터 견고해지며(견진성사) 그리스도로부터 선택되고(성품성사) 치유를 받으며(병자성사) 함께 그리스도가 되는 것(혼인성사).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걸어야할 길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미 이 세상을 초월해 살고 있다는 뜻이다. 이탈리아어 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말이 있다 : I cristiani sono nel mondo, ma non del mondo(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세상에 속해 있는 이들은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택받은 자들로써 세상 안에 발붙이고 살고는 있지만, 우리의 영혼과 마음은 저 위의 것, 저 천상의 것, 저 영원한 것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바로 순교자들이 보이셨던 정신이다. 세상에 사셨지만, 저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셨기에 그 모질고 혹독한 박해를 견디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작은 고통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느님께 불평불만과 원망만을 늘어놓고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을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은 분명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이 시대가 요구하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성경 전체는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절규를 처절히 드러내는 한편, 반대로 인간이 하느님을 외면하고 거부하는 모습이 가감없이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 더 크시기에 우리 들은 그분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고, 그분을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리니 깨어있어라!”(마르 13,35), 그날과 그시간은 아무도 모르니 서로 사랑하면서(요한 13,34 참조), 그분 말씀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분 앞에 사랑 가득한 미소를 하고 와락 달려들자. 그날에, 그 찬란한 구원의 날에…

 

이 연재글이 사랑의 실천에 있어 조금이라도 자극이 된다면 필자는 족하다. 부족한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외침, 2016년 12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설종권 신부(여주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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