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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신약] 이스라엘 이야기: 벳자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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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21 ㅣ No.3365

[이스라엘 이야기] 벳자타 못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시며 치유

 

 

벳자타 못 전경. 비잔틴 로마 시대 성당 유적이 못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필자가 이스라엘에 살던 시절,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 중 하나는 ‘집에 갇혀 심심한’ 안식일이었다. 필자는 유다인 할머니와 오랫동안 함께 살았는데, 안식일만 되면 아침에 찬밥을 먹어야 했다. 전기·가스 전원은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버스가 끊기고 상점도 문을 닫아 ‘방콕’ 생활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안식일 율법에는 도가 트고, 나중에는 집에서 푹 쉰다며 나름 위로(?)할 만큼 안식일에 익숙해졌지만, 율법이 족쇄처럼 느껴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짐을 나르지 못하도록 가방 메는 걸 금지한 율법은 2000년 전 벳자타 못 사건을 떠올리게 하곤 했다(유다인들은 회당 갈 때 가방 대신 보자기에 필요한 걸 싸서 다닌다). 벳자타 못은 예수님이 서른여덟 해 동안 앓던 병자를 낫게 하신 곳이다(요한 5,1-18). 그런 은총이 있었는데도 하필 그날이 안식일이라 논쟁이 벌어졌었다.

 

당시 벳자타 못은 정결 예식터였다. 벳자타라는 이름은 그 지역 골짜기에서 따온 것이다. 유다인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몸과 희생 제물을 씻던 저수지로서, 성전 주위에는 이런 예식터가 여럿 있었다. 실로암 못도 그 가운데 하나로 추정된다. 옛 이스라엘인들은 정결 예식터에 치유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수님도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던 사람 눈에 진흙과 침을 개어 바른 다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신 걸 보면 말이다(요한 9,6-7). 벳자타 못도 그런 치유 효과가 있다고 믿었는데, 나중에는 그 믿음이 지나쳐 아클레피오스라는 신에게 신전까지 지어 바쳤다고 한다.

 

벳자타 못이 처음 만들어진 시대는 기원전 8세기로 추정한다. 빗물을 모아 성전에 물을 대던 저수지였던 듯하다. 일부 학자들은 “마전장이 밭에 이르는 길가 윗 저수지”(이사 7,3-4)가 이곳이었다고 본다. 이 추정이 맞는다면, 이 저수지는 이사야가 남왕국 임금 아하즈를 대면한 장소가 된다. 아하즈가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아시리아와 계약을 맺으려 하자, 이곳에서 그를 꾸짖었다. 당시 아하즈는 북왕국·아람 동맹의 위협 앞에서 갈대처럼 떨던 상황이었는데, 끝내 이사야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아시리아와 계약을 맺어 굴종의 대가를 호되게 치렀다.

 

기원전 200년에는 대사제 시몬이 벳자타 못의 물 공급량을 늘리려고 두 번째 저수지를 만들었으며, 그 이후부터 못이 둘로 나뉘게 된다. 이는 주랑 다섯 채가 딸린 곳으로 벳자타 못을 소개한 요한 5,2 묘사와도 일치한다. 주랑은 사람들이 다니는 복도 같은 공간을 뜻한다. 그러므로 벳자타 못은 ‘해 일’(日)자처럼 주랑 다섯, 저수지 둘로 이루어진 형태였던 것이다. 위치는 예루살렘 성 바깥으로 북동쪽에 있던 ‘양문’ 근처였다(3절). 양문은 번제 양을 성전으로 가져갈 때 사용한 문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사람들은 양을 제물로 바치기 전에 벳자타 못에서 정결하게 씻었다. 주랑 아래에는 못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물이 출렁거리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천사들이 내려와 물을 젓는 거라고 여겨(공동번역 4절 참조), 병을 낫게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옛 성전 바깥에서 발견된 정결 예식터.

 

 

예수님이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오셨다가 이곳에서 한 병자를 보시고, “건강해지고 싶으냐?”고 물으신다(5절). ‘물이 출렁거릴 때 자기를 넣어 줄 사람이 없다’고 그가 한탄하니, 주님은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으로 병에서 해방시켜 주셨다(10절).

 

실로암에서와 달리 말씀으로 치유하신 까닭은, 당시 백성이 벳자타 못에 신전을 세울 만큼 물의 치유 효과를 맹신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유다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자 예수님을 박해했는데(16절),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병을 고친 탓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들것을 들고 걸어가게’ 한 것이 문제였다. 지금도 웬만큼 아프면 안식일이 끝난 뒤 병원에 가지만, 생사를 다투는 병이나 사고가 난 경우는 율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들것을 들고 걸어간 게 왜 문제인지 의아할 수 있지만,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무거운 짐을 옮기지 않도록 가방도 메지 않는다.

 

2000년이 지난 오늘도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다음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시면, ‘유다인 맞느냐’는 정체성 논란은 다시 벌어질 수 있다.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고, 자동차는커녕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는 ‘뚜벅이 데이’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니, 율법이 과연 어느 선까지 필요한지는 여전히 논쟁거리임에 틀림없다.

 

* 김명숙(소피아) -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20일, 김명숙(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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