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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인물] 말씀 그루터기: 성조 이사악은 무엇을 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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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5-17 ㅣ No.2641

[말씀 그루터기] 성조 이사악은 무엇을 하였나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마태 1,2). 

 

예수님의 족보를 다 외우지는 못해도 여기까지는 압니다. 어쨌든 이사악은 유명합니다. 별로 성경 공부를 하지 않았어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듣는 이름들 가운데 하나가 이사악입니다. 성조들 가운데 한 사람이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분명 상당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처음부터 읽다 보니 이사악은 별로 한 일이 없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사악은 주로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한 귀퉁이를 차지하거나, 아들 야곱과 에사우의 이야기에서 한 구석에 머물러 있습니다. 성조라는 엄청난 이름에 어울릴 일은 별로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사악이라는 세례명도 있던데, 글쎄요, 그건 다른 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아마 그런 이름을 가진 인물이 있지요? 현대식으로 시성 조사를 하면 성조 이사악이 시성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사악이 자기 뜻대로 한 일이라고는… 기근이 들어 그라르 지방으로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아내 레베카를 차지하려고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레베카가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 정도(창세 26장) 아버지 아브라함도 똑 같은 일을 했다고 전해지기는 하지만(창세 20장), 누가 했든 대단히 훌륭한 일은 아닙니다. 

 

이사악의 일생은, 스스로 무엇을 했다기보다는 수동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은 삶인 것 같습니다. 그의 출생부터가 그랬습니다. 이사악은 물론이고 그 아버지 아브라함도, 그 나이에 아들을 낳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젊었을 때에야 아내 사라에게서 아들을 가다렸겠지요. 그러나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던 아브라함은 여종 하가르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로 만족하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실 때,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었습니다.’(창세 17,17). 이 구절은 상당히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굽히는 정도가 아니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는 것은 절대적인 복종과 존경의 표시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엎드려서는 웃었습니다. 속으로는 믿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백 세, 사라의 나이 구십 세였습니다. ‘사라도 웃었습니다.’(창세 18,12). 스스로 그것이 가능성 없는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 놓고 나중에는 웃지 않았다고 잡아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사악은 태어납니다. 일방적으로 하느님께서 그를 태어나게 하셨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스스로 태어나려고 한 것은 물론 전혀 아니고,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그를 낳으려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는 태어났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간절히 청해서 얻은 아들이 아니라, 아들을 주겠다고 하시는 약속을 믿지 못해 웃었는데도 굳이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남으로써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도 그에게서 크나큰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기 시작합니다. 그의 이름은 이사악, 히브리어로 ‘웃었다’는 동사와 연관되는 이름입니다. 

 

다음으로 이사악에 관해 전해지는 것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모리야 산에서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일입니다. 아마도 이사악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요. 유다교에서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입니다. 이사악이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제물로 바치려고 이사악을 묶었을 때 이사악이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창세기는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있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시험하려고 하신 것은 이사악이 아니라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사악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지고 산에 올랐습니다.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성경 해석에서 이러한 이사악의 모습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막상 이사악은,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창세 22,7)라고 묻습니다. 그는 자신이 제물이라고 생각하고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악과 레베카의 혼인에서도, 고대에야 당연한 일이었기는 하지만, 이사악은 한 일이 없습니다. 이사악의 아내가 될 사람이 가나안 여자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친족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집안의 가장 늙은 종”에게 맹세를 시키고, 며느리감을 구해 오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레베카의 집에 가서 레베카를 아브라함의 며느리로 보내겠는지 물었을 때 그 가족들은, “이 일은 주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우리가 당신에게 나쁘다 좋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창세 24,50)라고 말합니다. 며느릿감을 찾아 멀리 떠나온 아브라함의 종에게 즉시 친족 레베카를 만나게 해 주신 하느님의 섭리가 그들을 부부가 되게 한 것입니다. 이사악의 아들 야곱은 나중에 자기 마음에 든 여자인 라헬을 얻기 위해서, 라반의 속임수 때문에 14년을 일하지요. 그러나 이사악은 레베카를 바라지도 않았고, 레베카를 얻기 위해 한 일이 없습니다. 

 

두 아들 야곱과 에사우와 관련해서는, 글쎄요, 야곱과 에사우와 레베카가 맏아들의 축복을 둘러싸고 나름 노력을 했다면 이사악은 가만히 앉아서 당했네요. 에사우는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그냥 죽 한 그릇에 맏아들 권리를 야곱에게 넘겨 버렸습니다. 이사악은 에사우를 축복해 주려고 했지만 그 말을 들은 레베카가 야곱을 보내 속임수를 써서 축복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사악은 자기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순전히 속아서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에사우는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게 될 날도 멀지 않았으니, 그때에 아우 야곱을 죽여 버려야지.”(창세 27,41)라고 생각했지만, 야곱이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다가 20년 후에 돌아올 때에 이사악은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이사악의 나이 백여든 살(창세 35,28), ‘한껏 살다가 숨을 거두고’ 죽었습니다. 야곱이 돌아왔을 때 아마 이미 기력이 전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때에 이사악이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죽었다는 것뿐입니다. 

 

결국, 이사악은 한 일이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무슨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일어나는 일들에 맞서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야곱이 그를 속였을 때에도, 에사우는 비통에 차 큰 소리로 울부짖었지만 이사악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다음에는 평온합니다. 

 

이사악은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후손의 약속은 이사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후손이 귀한 왕조에서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이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사악은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 중요한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스스로 한 일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를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나게 하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이사악의 다음 대에서 맏아들 에사우가 아닌 작은 아들 야곱을 선택하신 것도,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도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종종 그런 예외적인 선택들을 하시지요. 그 선택은 중요하지만, 이사악은 아무 것도 모르고서 그일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한 일은 속은 것뿐이었습니다.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모리야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때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묶어…”(창세 22,9). 유다교에서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묶었다’는 데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한다고 합니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묶었다’라는 말에 대해 저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묶여 있는 이사악은 꼼짝할 수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그에게서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일들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이 그를 성조 이사악이 되게 했습니다. 

 

이런 이사악을 보고 불평을 할 수 있을까요? 한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런 자리를 차지했느냐고 그를 탓할 수 있을까요? 그에게서 일하신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묶여 있는 이사악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루신 업적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이룩한 사람들의 업적들보다 더 위대했습니다. 누가 스스로 노력해서 하느님께서 한 민족을 불러일으키는 데에서 그 약속을 실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라는 성모의 노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들에 비하면, 우리가 스스로 애써서 한 일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 작은 일들일 것입니다. 이사악이 나서서 한 일이 없다 해도, 그 안에서 일하신 하느님 때문에 이사악은 이스라엘의 성조가 되었습니다. 

 

[땅끝까지 제81호, 2014년 5+6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성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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