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자료

[성경] 히브리어 산책: 하이(생명,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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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3 ㅣ No.3637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하이


인간의 언어로 “나는 생명” 선포하신 하느님

 

 

하이. 명사로서 생명 또는 목숨이란 뜻이다.

 

 

생명

 

히브리어의 8번째 자음 헤트의 발음은 후두에서 나는 거친 숨소리다. 우리말의 ㅎ을 무척 세게 발음하면 비슷하게 들린다. 그래서 생명을 뜻하는 ‘하이’를 제대로 발음하면 그 자체로 생명의 거센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하이는 ‘살아있는’이란 형용사로도 쓰인다. 하느님은 하이의 하느님(살아 계신 하느님, 예레 10,10)이시다. 십계명을 주신 하느님도 하이의 하느님(살아 계신 하느님, 신명 5,26)이셨다.

 

하이의 복수형은 하임인데, 이 말은 ‘수명’이란 뜻으로 자주 쓰인다. 홍수가 나던 해는 “노아의 하임이 600년째 맞는 해”(노아가 육백 살 되던 해, 창세 7,11)이고, “아브라함의 하임의 햇수의 날들은”(아브라함이 산 햇수는, 창세 25,7) 175년이고, “야곱의 하임의 햇수는”(야곱이 산 햇수는, 창세 47,28) 147년이다. 이런 표현들을 직역하면 자칫 어색해지기 때문에, 우리말로는 의역할 수밖에 없다. 고대어의 번역은 지난한 일이다.

 

하임은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인상 깊은 역할을 한다. 그 이야기 첫머리에서 하느님은 동산 한 가운데 하임의 나무(생명 나무, 창세 2,9)를 두셨다. 그리고 이야기 말미에 뱀에게 “네 하임의 모든 날들 동안(네가 사는 동안)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창세 3,14)는 저주가 내렸다.

 

- 하임. 하이의 남성 복수형으로 ‘수명’, 또는 ‘생명들’을 의미한다. 초록색 글자 안에 찍은 파란 점은 그 글자를 두 번 겹쳐 썼다는 뜻이다. 그래서 y를 두 번 써서 옮겨야 한다.

 

 

생명을 건 맹세

 

하이는 맹세의 맥락에서 자주 쓰인다. 이집트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짐짓 모른 체하였다.(창세 42,7) 그는 꾀를 내어 막내를 데려오라고 요구했다. 그는 “내가 파라오의 하이를(생명을) 걸고 말하건대, 너희는 정녕 염탐꾼들이다”(42,16)고 다그쳤다. 결국 형들은 막내 요셉을 구박했던 과거를 반성했고 요셉은 남몰래 울었다.(42,21-24)

 

요셉이 파라오의 하이를(생명을) 걸고 맹세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보다 높은 분의 생명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그만큼 그 맹세가 엄중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스라엘에 가장 높으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야훼의 생명’을 두고 맹세하는 장면이 곳곳에 나온다. 몇 장면만 추려 보자.

 

이스라엘의 영웅 기드온은 제바와 찰문나를 잡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은 내 어머니에게서 난 내 형제들이오. 야훼의 하이를(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하는데, 당신들이 그들을 살려 주었더라면 내가 당신들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오.”(판관 8,19) 그는 형제의 하이를 앗아간 대가로 그들의 하이를 빼앗은 것이다. 사울은 아들 요나탄이 다윗을 감싸주자 “야훼의 하이를 두고(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1사무 19,6)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지존하신 분의 영원한 생명을 걸고 한 맹세를 저버리고, 여러 번 다윗을 죽이려 하였다. 이런 면에서도 사울의 신앙과 인간됨이 잘 드러난다.

 

생명 나무. 에덴동산의 생명 나무를 히브리어로 이렇게 쓴다. 에츠(es)는 나무란 뜻이다. 하임 앞에 붙은 하(ha)는 정관사이다.

 

 

주님의 맹세

 

흥미롭게도 하느님도 이런 식으로 맹세하신 적이 있다. 모세는 유언으로 남긴 마지막 노래에서 “나의 영원한 하이를(삶을) 두고 맹세한다”(신명 40,1)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일찍이 광야에서 백성이 하느님께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민수 14,1-9) 하느님은 “내 하이를 두고(내가 살아있는 한)” 맹세하시며,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민수 14,21-23)

 

하느님이 몸소 인간의 언어를 쓰시어 맹세해 주신 것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잘 드러낸다. 영원하시고 참되신 하느님이야말로 인간처럼 맹세하실 필요가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분은 스스로를 낮추시어 우리 인간의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큰 선물을 확실히 보여주셨다. 히브리서는 이 점을 잘 설명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히브 6,1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라자로에게 하이를 되돌려 주셨다. 그분은 스스로 ‘나는 생명(하이)이다’고 선포하셨다.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4월 2일,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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