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성경자료

[성경] 히브리어 산책: 옐레드, 나아르(아기,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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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31 ㅣ No.3766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옐레드, 나아르


여성들이 구한 ‘희망의 아기’가 바로 모세

 

 

요드로 시작하는 ‘옐레드’는 ‘아기’란 뜻이고, ‘나아르’는 ‘소년’ 또는 ‘젊은이’의 뜻이다.

 

옐레드. ‘아기’라는 뜻이다. 본디 ‘낳다’(YLD)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다.

 

 

교차하는 부성애와 모성애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 그 이후 옐레드(아기)는 그 자체로 사람에게 큰 기쁨이자 복이고 반대로 아기가 없는 것은 불행으로 여겨졌다.

 

구약성경에는 옐레드(아기)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교차한다.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는 그에게 자식을 낳아 주지 못하였다.”(창세 16,1) 사라이는 이 불행을 극복하고자 여종 하가르에게서 아이를 얻게 하여 이스마엘이 태어났다.(16,11) 훗날 사라이도 아들 이사악을 낳았다.(21,4) 하지만 두 아내는 갈등했고 집안에는 다툼이 일었다. 하지만 두 옐레드 모두를 사랑하는 “아브라함에게는 이 일이 무척이나 언짢았다.”(21,11)

 

생각해 보면, 두 아내의 갈등은 각자 자신의 옐레드를 향한 큰 모성애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두 옐레드 모두를 사랑하는 부성애를 지녔지만 갈등을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부성애와 모성애는 인간의 본능적이고 숭고한 감정이지만, 나약한 인간은 때로 그런 순수한 사랑 때문에 서로 갈등할 수 있는 존재다. 결국 하느님께서 두 옐레드 모두에게 큰 민족이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심으로써 이 갈등은 해결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크고 실효적이다.

 

 

희망인 옐레드

 

아기(옐레드) 모세가 나일강에서 극적으로 구출되는 이야기는 탈출기 2장에 나온다. 모세의 어머니는 잘생긴 옐레드를 낳았지만 키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옐레드를 왕골 상자에 두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내려왔다가 옐레드를 보고 불쌍히 여기자, 옐레드의 누이가 꾀를 내어 유모를 불러오게 하였다. 공주는 모세의 어머니에게 옐레드를 데려다 젖을 먹이면 삯을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 나아르. 청년, 젊은이, 종, 하인 등을 의미한다. 여성에게도 쓰인다. 구약성경에 무척 자주 쓰이는 데, 스스로를 나아르로 일컬으면 겸손의 표현이다.

 

 

구세사 전체에서 오직 여성의 힘과 지혜에 의지해서 위기가 극복된 경우는 흔하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여성이, 곧 인간적 편에 상관없이 여성의 사랑과 지혜가 모세를 구한 것이다. 여성들이 구한 옐레드는 장차 이스라엘을 구하는 희망의 옐레드였다.

 

이사야 예언자의 “우리에게 한 옐레드(아기)가 태어났고 /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 9,5)는 말씀에서도 역시 희망의 옐레드를 볼 수 있다. 그 옐레드로 말미암아 인류가 구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겸손의 나아르

 

옐레드가 자라면 나아르가 된다. 나아르는 ‘소년’, ‘아이’라는 뜻이지만 ‘젊은이’나 ‘청년’도 된다. 여성을 지칭할 수도 있기 때문에 ‘소녀’나 ‘처녀’로 옮길 수도 있고, 때때로 ‘종’이나 ‘하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스스로를 나아르라고 일컬으면 겸손의 표현이다. 일찍이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나타나 처음으로 예언자의 임무를 맡기셨을 때, 예레미야는 “아, 주 하느님 저는 나아르(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라고 겸손하게 물러서려고 했다. 이 표현은 마치 스스로를 ‘소인’(小人)으로 일컫는 우리말의 겸손된 표현과 비슷하다.

 

- 나아라. 특히 젊은 처녀나 갓 결혼한 여성을 의미한다. 나아르에 여성형 어미(-a)가 붙은 것이다.

 

 

오늘 1독서를 보자. 왕위에 오른 솔로몬의 꿈에 하느님이 나타나시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1열왕 3,5) 하고 물으셨다. 솔로몬은 “저는 나아르(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3,7)라고 겸손되이 대답했고, 다만 ‘듣는 마음’과 ‘분별력’을 청했다.(3,9) 이 겸손한 대답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 하느님은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3,11-12)고 말씀하셨다. 이후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부강한 시기를 맞는다. 스스로를 나아르로 낮추는 겸손과 듣는 마음과 분별력은 지도자가 갖출 최고의 덕목이리라.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7월 30일, 주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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