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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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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2-22 ㅣ No.662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상)


‘가난한 자매들의 학교’로 시작, 1830년 요셉 블룸 신부가 창립

 

 

- 스위스 캄에 있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의 모원 성 십자가 수녀원 전경.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제공.

 

 

19세기와 20세기 교회 안에 생겨난 수도회 수는 이전 세기에 일어났던 수도회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이는 당시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세상의 탈 그리스도교화라는 도전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830년 요셉 블룸 신부는 스위스 루체른 주 발덱에 ‘가난한 자매들의 학교’라는 이름으로 공동체를 창설했다. 당시 호호도르프의 성 베드로 바오로 대성당에서 사목하던 블룸 신부는 정치적 박해와 산업혁명 영향으로 도시로 몰려든 소녀들을 지도할 목적으로 공동체를 세웠다. 이들의 공동생활은 1841년 수도 생활로 변모돼 1844년 10월 5일 교구장 주교에 의해 회헌이 인준됐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스위스 연방 의회 결정에 따라 발덱에서 추방돼 추크(Zug) 주 캄으로 공동체를 옮겨 수도 공동체 생활을 새롭게 시작했다. 이곳에서 1859년 수녀원을 완공했다. 인근에 성 십자가(Heiligkreuz) 순례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하일릭크로이츠 수녀원’, 즉 ‘성 십자가 수녀원’이라 불렸다. 이 수녀원은 바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의 모원이 된다.

 

수녀회는 1887년부터 베네딕도 규칙을 선택하면서 베네딕도회 수도승 생활 전통 안에 살고자 결정했다. 그리고 1892년 9월 11일 이탈리아 시에나의 성 베네딕도회 ‘몬테 올리베또 성 마리아 수도원’과 성 십자가 수도원 사이에 정식으로 연합회 가입 수락서가 교환됐다.

 

베네딕도회 몬테 올리베또의 성모 마리아 연합회는 베르나르도 똘로메이(Bernardo Tolomei, 1272~1348) 성인에 의해 설립됐다.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태어난 그는 깊은 회심을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41세가 되던 1313년에 모든 것을 버리고 두 동료와 함께 아꼬나 골짜기에 들어가 철저한 가난과 금욕, 침묵 가운데 기도에 전념하는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거룩한 삶이 알려지며 제자들이 모이자 몬떼 올리베또에 수도원이 세워졌고 1319년 아레초의 주교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다. 이때 수도원은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선택해 회수도승 생활양식을 따르게 됐고 1344년에는 클레멘스 6세 교황에 의해 몬떼 올리베또의 성모 마리아 연합회로 인준됐다. 연합회는 본래 봉쇄 안에 살며 관상 생활을 지향하지만 시대 환경의 요구에 따라 활동적인 사도직에 참여하는 수도공동체도 가입돼 있다.

 

성 십자가 수녀원은 외방 선교를 본래의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나 시대와 환경 요구에 따라 1931년 9월, 6명의 수녀를 중국 연길에 파견함으로써 오늘날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초석을 놓았다. 이후 1981년 9월 14일 성 십자가 수녀원은 한국 진출 50주년을 맞아 한국 수녀원을 완전히 자립시켰다. 이로써 두 수녀원은 동등한 자립수녀회(Priorat)로 ‘성 십자가’ 연합을 맺어 현재까지 동행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12월 20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중)


‘십자가 영성’ 공동체 삶으로 구현

 

 

- 시간 전례에 함께하고 있는 회원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회원들은 베네딕도 규칙서에 따라 ‘하느님의 일’(Opus Dei), ‘성독’(Lectio Divina), ‘일’(Labor)을 중시한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제공.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는 복음 정신에 따라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고’(성규 4,21), ‘하느님만을 찾는’ 성 베네딕토의 수도 규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일에서 하느님 영광을 찾으며(1베드 4,11;성규 57,9),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약함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수녀원 공동체 생활 안에서 또 세상과 연대하는 봉사와 애덕 활동 안에서 구현(회원 1장 2항)하려 한다.

 

이를 위해 복음 권고에 따라 그리스도를 따르고 교회 구원 사명에 참여하며 사랑으로 하느님과 공동체를 섬기고 봉사와 애덕 의무를 수행하는 소명을 살고자 노력한다.

 

수녀회 영성은 회헌 1부 ‘수도 생활의 영적 기조’에서 드러난다. 회헌 1부는 캄 수녀원의 회헌과 같으며, 2부는 법적 규정으로 수녀회 고유 회헌이다. 이 모두는 베네딕도회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수녀회의 특은과 현시대 요구에 상응하도록 구성돼 있다.

 

수녀회 문장의 십자가는 회원들이 살고자 하는 ‘십자가 영성’을 잘 대변해 준다. 이 십자가 영성은 성 베르나르도 톨로메이의 정신과 ‘성 십자가 수녀들은 이 세상 순례자로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의 발아래 꿇어 기도한다’는 스위스 캄 성 십자가 수녀원의 정신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 뜻에 순명하여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회원들은 회헌 2항에서처럼 ‘무엇보다 먼저 십자가의 약함 안에 드러난 하느님 사랑을 우리 삶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다. 이로써 사랑으로 기꺼이 짊어지는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힘과 지혜’를 통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한다.

 

모든 회원은 베네딕도회 회원으로서 수도승 영성, 즉 ‘세상을 떠나 기도와 고행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에 이르는 것’을 본받고자 한다. 「베네딕도 규칙서」에 따라 수도승의 시간 즉 ‘하느님의 일’(Opus Dei), ‘성독’(Lectio Divina), ‘일’(Labor)을 중시한다.

 

이 생활은 은거가 아니라 한 수도원 안에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함께 하느님을 찾는 ‘공생 수도 생활’, ‘평화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공동체적 영성에 바탕을 둔다.

 

이런 정신은 회헌 2항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베네딕도 규칙서」에 제시된 대로 공동체의 삶을 통해 우리의 수도 소명을 실현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수도 공동체는 베네딕토 성인의 당부대로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 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어’ 살고자 힘쓴다.(규칙 72, 4~7) 이런 공동체의 삶은 세상을 향한 봉사의 삶과 연대로 이어진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1월 1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하)


복음 선포 위한 열린 자세 지향

 

 

- 브라질에서 선교 활동 중인 회원들이 빠우다코 공소 어린이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제공.

 

 

스위스 캄 성 십자가 수녀원 수도자들이 한국에 진출하게 된 것은 간도(間島)지역을 사목 관할 구역으로 설정된 연길지목구장 브레허(Theodor Breher) 신부가 1930년 수녀 파견을 요청하면서다.

 

당시 수녀원 총원장 아델하이드 슈비터 수녀는 선교 수녀회가 아니었음에도 이를 수락하고 1931년 6월 14일 연길지목구와 계약을 체결했다. 파견 계약서에는 ‘선교지에서의 사도적 활동이 중요하지만, 베네딕도회 생활양식 특징을 유지하며 사는 데 있어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로써 그해 9월 14일 베로니카 라우르 수녀 등 지원자 6명은 한국으로 출발하게 된다.

 

약 2개월이 걸려 11월 1일 제물포를 통해 입국한 이들은 11월 6일 연길에 도착했다. 11월 9일에는 ‘예수 성심’을 주보로 연길 수도원 옆에 4층 규모의 수녀원 축성식을 거행했다. 브레허 신부는 이에 앞서 4명의 한국인 지원자들을 받아들여 11월 11일 입회하도록 했다. 수녀원은 처음에 ‘캄 하일릭크로이츠 연길 수녀원’ 또는 ‘연길 성 십자가 수녀원’ 등으로 불렸다.

 

이후 캄 성 십자가 수녀원 수도자들은 연길수도원 수도자들과 함께 중국 복음화를 위해 일제 말기에 자행됐던 종교 박해에도 불구하고 시약소 개설 등 여러 사도적 활동을 펼쳤다.

 

1945년까지 7개 본당에 분원을 설립하고 18명 선교 수녀와 17명 한국인 수녀가 활동하는 등 활발하게 자리를 잡아가던 수녀회는 해방이 되며 중국 공산당이 들어서자 여러 차례 핍박과 수난을 받았다.

 

1946년 결국 수녀원은 해체되고 스위스 수녀들은 본국으로 강제 추방되는 한편 한국 수녀들은 38선을 넘어 남하했다.

 

월남한 수녀들은 경기도 소사에 본원 터를 마련하고 수도 공동체를 조성하려 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으로 내려가 처음 부평동에서 생활하던 회원들은 1951년 5월 초량동에 터전을 마련하고 성 분도 자선 병원을 개원했다. 이곳은 연길에서 나와 온갖 어려움 속에 남한에서 수녀회가 다시 수도 생활을 시작한 새 터전이 된다.

 

1953년 스위스에서 다시 한국으로 수녀들이 파견돼 왔고 공동체는 수도 공동체 모습을 가다듬게 된다. 계속해서 회원 수가 증가하며 다양한 활동 속에 성장을 거듭한 수녀회는 1972년 대리구 승격에 이어 1981년 교황청 설립 자립 수녀회 인가를 받았다.

 

수녀회는 1990년 캐나다 몬트리올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1991년 미국 볼티모어와 중국 연길 및 필리핀에 회원을 보내는 등 해외 지원 설립을 활성화했다. 특히 연길 진출은 수녀원의 첫 자리에 회원을 파견했다는 면에서 의미가 부각됐다. 2011년 수녀회 설립 80주년을 기념하며 2010년에는 회원 3명이 브라질 아마존강 인근 오지를 향해 떠났다.

 

2021년 현재 아시아 유럽 남미 등지의 해외선교를 비롯한 국내 13개 교구의 62개 본당과 기관, 병원, 유아교육, 사회복지 등 현장에서 영성을 구현하는 수녀회는 ‘어떤 특정한 목적만을 추구하지 않고 능력이 닿는 한 복음 선포를 위한 여러 가지 사명에 열려있는’(회헌 32) 자세를 지향한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1월 10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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