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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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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15 ㅣ No.654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상)


초기 교회 정신으로 돌아가려 노력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설립자 요셉 안토니오 마르케셀리 신부(왼쪽)와 안젤라 마리아 델 질리오 수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제공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부와 명예를 버린 채 가난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의 삶에 매력을 느껴 찾아온 많은 이들과 평생을 복음적인 생활양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르는 순례자로 살았다.

 

성인과 동료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은 당시 시대 안에 청빈 운동을 일으켰고 세상에 머무르며 프란치스코 영성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재속 3회, 즉 ‘프란치스코의 회개자(보속자)들 운동’을 태동시켰다.

 

1702년 수도 생활이 약화해 가던 시대적 상황 안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자취가 배인 아시시(아씨시)는 다시 한 번 쇄신의 바람을 일으키는 중심이 된다.

 

이곳에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요셉 안토니오 마르케셀리 신부(1676~1742)와 당시 재속 3회 회원이던 안젤라 마리아 델 질리오 수녀(1658~1736)는 재속 3회 회원들의 ‘작은 모임’을 출발시켰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의 시발점이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3회 회칙을 완전히 준수함으로써, 3회를 쇄신하여 성녀가 되게 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갈망’하는 것을 통해 교회와 세상에 표징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설립자들 계획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3회 회칙을 따라 프란치스칸 삶의 근원으로만이 아니라 초기 교회 삶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미 성인의 영성을 따르던 그들은 하느님 안에서 더 작은 자, 더 작은 삶을 주창했다. 그래서 설립자들은 첫 공동체 ‘작은 모임’ 혹은 ‘거룩한 집’을 처음부터 프란치스칸적이고 복음적인 가치, 즉 ‘작음과 가난’을 실천하는 길로 받아들였다. 이는 일상생활 안에서 만들어지는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화의 길로 풀이된다.

 

마르케셀리 신부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조화시키는 활동 수도회 생활양식을 택했다. 이로써 공동체는 반 관상 생활 형태로 운영됐다. 그는 첫 공동체 회원들이 자신이 작성한 회헌과 1289년 니콜라오 4세 교황이 인준한 프란치스코 제3회 회칙에 따라 살도록 했다.

 

1810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이탈리아 내 많은 수도회가 폐쇄됐을 때, 공동체는 당시 교육 사업을 하며 군인 자녀들을 가르쳤기에 수도복 없이 계속 공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후 1860년 이탈리아 정부의 억압 등 여러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도 수도자들은 200여 년 동안 아시시에서 현존하며 젊은 여성들을 교육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활동을 벌였다.

 

1902년 전교 수도회로 전환한 수도회는 성좌 설립 수도회로 인정받았고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 수도 3회 회칙을 공포했다. 회헌은 1934년 인준됐다. 1977년 총회까지 델 질리오회로 불렸던 수도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과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수도회 명을 변경했다.

 

현재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17개국에 진출해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9월 13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중)


하느님만을 갈망하는 삶

 

 

- 아씨시 성프란치스코 대성당 전경.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는 프란치스코 성인과 설립자들의 정신 안에서 복음을 삶의 규칙으로 삼아 그리스도를 따르며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과 일치하려 노력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요셉 안토니오 마르케셀리 신부와 안젤라 마리아 델 질리오 수녀가 설립한 첫 공동체 ‘작은 모임’은 특별한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일정한 활동이나 사업에 얽매이지 않았다. 단지 완덕을 추구하기 위해 거룩한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 하느님만을 뜨겁게 원하는 이들 모임이었다.

 

마르케셀리 신부의 영성은 ‘가난한 작은 자’였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에 바탕을 둔다. 무엇보다 그가 강조한 것은 ‘매일 안의 성화(聖化)’였다. 매일매일 삶 안에서 작고 평범한 것들이 성화의 기회라고 봤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과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매일의 작은 길을 수도회를 통해 교회와 세상에 제공하고자 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말 것’, ‘외적으로 가난함이 드러나도록 할 것’, ‘모든 일을 자기만족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하도록 노력할 것’, ‘우리의 마음이 살아있는 성령의 궁전이 되게 할 것’ 등 영성을 실천할 수 있는 지침을 제시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매우 깊은 관상을 지닌 사람이었으며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평가됐다. 강론과 영적 지도에 탁월하여 깊이 있는 권고로 사람들을 지도했고 이로써 하느님의 위로를 전했다. 1742년 아시시에서 선종할 때까지 수녀회 회헌과 책 여러 권을 집필했다.

 

한편 안젤라 마리아 델 질리오 수녀는 겸손과 사랑으로 수녀들을 지도했다. 지역의 가난한 이들 불쌍한 이들을 돌보며, 젊은 여성 교육에 헌신했다.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업적은 함께 살았던 이들을 통해 전해질 뿐이다. 그는 ‘이 사람은 거룩한 혼의 주인공이며, 이 지상의 것에서 이탈한 사람이며 완전한 창립자로서 주께서 준비해 주신 사람’으로 불렸다.

 

수녀회는 프란치스코 성인과 이런 설립자들의 정신 안에서 복음을 삶의 규칙으로 삼아 그리스도를 따르며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과 일치하려 노력한다.

 

예수님께서 일생을 통해 드러낸 하느님에 대한 사랑, 하느님만을 갈망하는 삶이 유일한 생활양식이다. 이 가운데에 바로 작고 평범한 것들 안에서 성화의 기회를 발견하고 성덕을 이뤄가는 ‘매일의 성화, 성덕’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회원들과 함께 이루는 형제적 삶, 형제적 사랑의 바탕 위에서 이뤄진다.

 

초창기의 정신을 이어가는 가운데 모든 회원은 오늘날에도 형제애와 가난, 보속과 회개, 지속적인 기도와 영성적 물질적 자선 행위 실천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성화의 여정을 함께 살고 있다. 작음과 단순성과 가난의 가치가 주는 기쁨 안에서 모든 봉사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9월 20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하)


가난과 노동 속에서 기쁨 체험

 

 

- 지난 5월 11일 한국진출 40주년을 기념해 회원들이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 제공.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한국 진출은 1980년 이뤄졌다. 부산교구 초청을 받은 4명 회원이 당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지부장 황만용(M. Fabriz) 신부 도움으로 입국했다.

 

이들 중 한 명인 김숙녀(효임 골룸바) 수녀는 수녀회 최초 한국인 수녀다. 그는 입회 전인 1963년부터 약 5년간 부산 대연동에 위치한 성프란치스코의 집에서 한센인 자녀를 돌봤다. 아이들을 돌보며 더욱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김 수녀는 이탈리아 선교사 범 프란치스코 신부 권유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이탈리아 모원에 입회했다.

 

김 수녀와 함께 한국 땅에 발을 내디딘 회원들은 서울 종암동에 첫 공동체를 마련했다. 그리고 이듬해 성프란치스코의 집에서 사도직을 시작했다.

 

진출 초기 다방면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여러 수도회 도움으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형편이 어려워 삯빨래, 초 만들기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바쁨 가운데에도 기도 안에 하느님과 일치하며 가난과 노동 속에서 기쁨을 체험했다.

 

아울러 회원들이 하느님 뜻을 알고 그분을 따를 수 있도록 양성 작업을 진행하면서 성당 안에서 드리는 기도만이 아니라 어렵고 가난한 이와 함께하는 구체적인 참여로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도록 인도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선택하신 그리스도 삶을 본받아 한센인과 행려자들을 보살폈다.

 

1983년 본원을 잠시 서울 장위동으로 옮겼던 수녀회는 1987년 10월 수원시 우만동으로 이전하고 한국교회 안에서 본격적인 카리스마 구현에 나섰다.

 

1985년 춘천교구 주문진본당에 처음 파견돼 본당 사도직을 시작했던 수녀회는 이후 본당, 나환우 정착촌, 장애인, 청소년, 노인 사목, 교육, 피정 및 영성 지도, 해외선교(미국·멕시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데레사 유치원 등 교육 사업 안에서는 주입식 교육보다 아이들 참여와 자발성, 창의성을 존중하며 공동체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또 장애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세상 안에서 존엄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여성장애인 그룹홈과 주간보호시설을 운영 중이다.

 

젊은이 사목팀은 ‘몸에서 사랑을 배우다’ 주제로 매년 2회 ‘젊은이 몸 신학 피정’을 준비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영적 유산인 ‘몸 신학’을 토대로 자신의 몸과 성을 ‘가톨릭 청년’으로 살아가도록 동행한다.

 

또 필리핀,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 선교사를 파견해 수녀회 카리스마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며 살아간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9월 27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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