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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중국에서의 성모성심회(Schent) 선교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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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1 ㅣ No.1127

중국에서의 성모성심회(Schent) 선교 약사1)

 

 

성모성심회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모두 쉔트(Schent, 斯搆德)선교회라고 부르며, 1862년 페르비스트(Verbiest, 南懷仁) 신부가 창립하였다. 페르비스트 신부는 원 소속이 벨기에 마이린(麥林)교구의 신부였다.

 

페르비스트는 벨기에 안럴스(Anrers, 중국명: 安凡)에서 태어났는데, 때는 1813년 6월 12일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아주 먼 국가로 가서 복음을 선교하고자 하였다. 이후 어렸을 때의 꿈속의 일이 실현될 기회가 왔고, 그는 베르사이유(Versailles, 중국명: 布魯塞爾)에서 교무를 돕고 있었다.

 

성영회(聖孾會)와 연계를 갖고 있었으며, 꿈속에서도 구체화시켰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Bruxelles, 布京)에서 3명의 보좌 사제를 모집하였고, 그런 후에 서로의 계획에 따라, 벨기에서는 하나의 선교수도회를 만들었는데, 그 주요한 목적은 중국에 가서 선교하는 것이었다. 입회한지 1년 후, 회장은 로마로부터 허락을 한다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 시기는 1863년이었다. 정식으로 업무 범위가 결정되었던 것은 1864년 9월 1일이었다. 선발대 ‘원정군’은 페르비스트 신부의 지도아래에서 1865년 8월 25일이었으며, 베르사이유를 떠나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은 당시 몽골(蒙古) 지방으로 광활한 지방 대목구의 중심점이 되었으며, 때는 1866년 2월 6일이었다.

 

당시 이 선교 사업 활동 구역은 새롭게 구성된 선교회에 위탁하였고, 이 수도회의 설립자는 대목구의 대리주교에 임명되었다. 그는 총명하고 기민하였으며, 지혜롭게 이 어려운 선교임무를 맡게 되었다. 27개월의 시간을 친히 선교 사업을 관장하였고, 친히 선교지구를 둘러보았으며, 또 후대를 이을 제자들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교회에서 거두어들인 성과는 이상적이지 못하였다. 제1차 선교 순찰도중, 페르비스트 신부는 홀로 몽골(蒙古) 동부의 작은 진(鎭)인 노호구(老虎溝)에서 1868년 2월 23일에 사망하였다.

 

성모성심회 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3월 27일에 친히 쓴 서신을 이 수도회의 총회장에게 보내, 100주년 축하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페르비스트 신부 및 그 수도회의 사적에 대하여, 교황은 아래와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씨 뿌리는 사람이었으며, 이미 그가 뿌린 종자가 큰 나무가 되었고, 가지마다 과실이 열렸다. 또 그러한 녹음의 빛은 여러 먼 나라에까지 파급되었는데, 파급된 국가는 중국, 콩고, 필리핀 군도, 미국, 인도네시아, 아이티, 도미니카, 일본, 과테말라, 홍콩, 말레이시아 등으로 모두 중요한 구역이며, 중요한 도시이다. 이 수도회의 선교 공적으로 진리의 광명과 성총의 보고(寶庫)를 상급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페르비스트 신부가 창건한 수도회는 모두 2천 여 명의 선교사를 보유하고 있고, 그중 1,300여 명이 원방(遠方)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중국은 가장 먼저 이 수도회 창설자 및 그의 제자들의 은혜를 입은 곳이다. 1865년을 시작으로 선교 신부를 중국으로 입국시키지 못할 때까지, 중국에서 선교를 담당한 이 수도회의 선교사는 선후로 모두 667명이었다. 1948년에는 또 239명의 성모성심회(쉔트회, 斯搆德會) 선교사들이 만리장성 부근에서 업무를 보았고, 최후의 성모성심회 선교사가 국경 밖으로 추방되었을 때는 1955년 말이었다. 그들은 7개 선교구역을 관리하였으며, 대주교구 1곳과 두 개의 현지 성직자 관리 교구가 있었다. 중국 신부는 250여 명, 10여 명의 수사가 있었고, 3백 여 명의 수녀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성모성심회 선교사의 지도로 배양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업무 범위는 몽골인과 한족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당시의 교우는 약 23만 5천 여 명이었고, 광활한 변경지역에 분포하여 있었다.

 

앞의 축하 내용에서 교황 요한 23세는“역사를 뒤집어 보면, 당신들의 수도회 창설자인 페르비스트 신부가 창립한 이러한 사업의 발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경이로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하의 간단한 보고에서 우리들은 성모성심회의 중국 선교 역사[傳敎史]를 간단한 도형으로 볼 수 있다.

 

가장 먼저‘원정군’(遠征軍)이 도착한 지방의 인민 및 천주교 교무에 대한 상황을 설명하고, 우리들은 그 발전과정을 서술하면서, 선교 및 선교사들의 업무를 설명하겠다. 이후, 다시 그들의 선교업무에 대한 몇 가지 특징을 설명하겠다. 본문에서 묘사하는 간단한 내용은 자연히 아주 간단한 설명이 될 것이고, 상세한 내용은 역사가들이 조망할 것이다. 이 간단한 역사를 읽은 후, 독자들은 성모성심회 선교사들이 압박을 받으면서도, 충군(充軍)의 다리가 되었으며, 그 종도들이 사업의 위치를 떠날 때, 그들은 다시 화교들의 구역에서 선교 업무를 하였다. 성모성심 선교회는 또 중국인에 대한 서비스를 하였던 것이다.

 

성모성심회는‘중국묘포’(中國苗圃)라고 하였다. 이 명칭은 이 회에서 최초로 건립한 수도원 대문 위에 걸려는 있는 휘호였으며, 조각되어 있어 변하지 않는 휘호이었다.

 

몽골(蒙古) 대목구는 지리상으로 말하면, 내몽골(內蒙古)대목구라고 칭한다. 이 변경구역은 한인과 몽골인이 공동으로 거주하는 지방인데, 현재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볼 때에는 열하(熱河), 찰합이(察哈爾), 수원(綏源), 영하(寧夏) 4개의 성(省)이었다. 이 광대한 지역은 모두 거의 해발 7백에서 2천 미터 이상의 산지 위에 있었다. 위치는 만리장성 이남으로, 3면이 산맥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이러한 지방의 기후는 아주 특별하여, 겨울에는 아주 춥고, 여름에는 아주 더웠다. 겨울과 여름 사이의 기온이 어떤 때에는 70도나 차이가 났다. 약간의 광활한 지대는 산곡(山谷) 사이의 평원이었고, 기타는 약간의 동산만을 볼 수 있는 광야였으며, 이 지역은 일반인들이 중국에서 가장 빈곤하고 척박한 지대라고 생각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곳은 척박하였기 때문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아주 적었으며, 19세기 중엽에도 인구는 겨우 250만 명에 불과하였으며, 주민 대부분은 몽골의 유목민족이었으며, 남쪽 일부분에만 한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농지를 경영하는 농민들이었다. 대부분의 구역은 실제로 궁벽한 지역이었다. 이곳에서의 의원, 학교, 진료소, 양로원 등의 사업은 당시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였다. 몇몇 대도시들은 당시 생산물을 물물교역 하는 정도의 상업중심이었다. 도시 이외에서 거주하는 사람들 중 한인은 농업에 종사하였고, 촌(村)에 분산되어 살았으며, 주거형태는 토방(土房)이었고, 생활은 아주 간단하고 가난하였으며, 노동은 매우 힘들었으며, 도시와는 거의 왕래가 단절되어 있는 상태였다.

 

나는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성모성심회 선교사의 업무 기지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빈첸시오회 선교사들이 그곳에 기지를 만들어 놓았었던 것을 이용한 것이다. 성모성심회 선교사들은 1865년 빈첸시오회 선교사들의 업무를 인수인계 받았던 것이다.

 

이곳에 대목구는 1840년 이미 성립되어 있었으므로, 주교 그리고 중국 및 외국국적의 신부가 이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성좌에서는 이 구역의 선교업무를 원동(遠東)에서 가장 어려운 선교구역중의 하나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약 7, 8천 명의 교우가 몇 개의 아주 먼 구역에 분산되어 있었고, 피차 서로 간의 거리가 10일에서 15일이나 소요되는 정도의 거리였다. 중심점은 서만자(西灣子)로 빈첸시오회 선교사인 슈에(薛) 신부가 1829년 선교에 착수하였다. 그때는 사막 중의 고요한 곳이라 하여 녹주(綠洲)라고 하였으며, 당시에는 약 1천 명의 교우가 있었다. 이곳에는 성당이 한 곳 있었으며, 한 곳의 남녀가 함께 배우는 소학(小學)과 육영원(育嬰院)이 있었다. 최초의 선교수도회 선교사가 도착한 후 곧 바로 성직학원(聖職學院)이 설립되어졌으며, 약간의 사제가 이곳을 관리하였는데, 모두 빈첸시오회 선교사였다.

 

성모성심회 선교사가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이 대목구는 11명의 빈첸시오회 선교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중 8명은 중국국적, 3명은 외국국적이었으며, 나머지 2명은 교구사제였다. 성직학원에서 학업을 마친 수 명의 신학생이 있었으며, 6품과 5품의 학생들도 있었다. 이 지역을 성모성심회에 관리를 위탁할 때, 빈첸시오회 선교사들은 모두 그들의 회장이 있는 곳으로 함께 이동하여 갔으며, 2명의 교구사제는 여전히 본 교구에 남아 있었으며, 신임 대목주교의 지도아래 업무를 계속 보았다.

 

 

Ⅰ. 중국에서 성모성심회(쉔트회, 斯搆德會)의 진면목(1865~1900)

 

처음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성모성심회 신부들은 선교 사업에 대하여 아무런 경험이 없었고, 언어, 인정, 풍속 등에 대하며 모두 낯설었으므로, 조용히 1년을 기다리며 먼저 온 사람들로부터 선교방법을 배워나가고자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 도착 수주일 후, 그들의 어깨 위에 이 지역 전 교구의 3분의 1에 대한 선교임무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1866년 9월, 대목구 전체에 대한 업무 범위를 접수받았다. 4명의 벨기에 신부들은 동서로 뛰게 되었으며, 각자의 능력에 의지하여, 모든 선교 업무를 담당하였다. 빈첸시오회 선교사들이 남겨놓은 몇몇 빈자리를 처음부터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이것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인류복음화성에서도 그곳이 너무 컸고, 너무 어려운 선교구라서, 새로 설립된 선교경험이 없는 수도호이 그곳을 넘겨준다는 것은 무척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모성심회 선교사들은 거의 아무도 이겨내지 못한 곳에서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후에 사람들은 이 수도회의 창시자의 서신중에서 아래와 같은 글귀를 보게 되었다. “기도, 용기!”1866년, 부활절은 그에게 아주 기쁜 날이었다. 왜냐하면, 당일 중국 국적의 4명이 사제 서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유럽 각지에서 중국으로 오는 선교사가 나날이 늘어났다. 이로써 인사(人事) 방면은 해결이 되었으나, 또 다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갑자기 두 명의 신부가 계속해서 사망하였는데, 이 수도회의 창설자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또 기타 몇 명의 신부가 병으로 귀국하였으므로, 상황은 아주 암담하였다. 그들은 중국의 교무를 정돈해야 할 뿐만 아니라, 벨기에가 주관하는 새로운 선교회를 필요로 하였다.

 

오래지 않아 점점 광활하고 무한한 지역을 인식하게 되었다. 교무 중심이 서만자(西灣子), 관동(關東), 열하(熱河)와 서구(西口) 등 밖의 지구로 선교 중심지를 이동시켰다. 선교 사제 역시 모험성적인 여행을 시작하였다. 약간의 신부들은 선교수도회 선교사들이 남겨놓고 떠난 지역으로 들어갔고, 일부분의 신부들은 몽골어를 학습하기 시작하여, 유목민족에 대한 선교를 준비하였다. 서부(西部) 회교도의 반란이후, 두 명의 신부가 모험적으로 서부로 들어갔는데, 곧 바로 영하성(寧夏城) 내로 들어갔다. 일단 정착한 후, 그곳에서 신강(新疆)에서 무역을 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신강의 교우 후예들의 서신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신부들에게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와달라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수 년 동안 1명의 신부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서신상의 왕래로 몽골과 섬서(陝西)의 대목들은 한 차례 회의를 열어 중요한 결의를 하였다. 4년 이후, 인류복음화성(포교성성)에서는 감(甘, 감숙), 몽(蒙, 몽골), 장(藏, 서장)에 대목구를 성립하게 되었는데, 시간은 1878년의 일이었다.

 

1879년 정월부터, 성모성심회 선교사들은 감숙성(甘肅省)의 중심부에 이미 있었다. 3년 후, 그들은 이미 이리(伊犁)의 무종교지대를 장악하였다. 3명의 감숙성 신부들은 회교도들이 대부분인 신강으로 들어가 십자가를 그 중심부에 세웠다.

 

성모성심회 선교회 선교사의 선교구역이 이미 아주 커졌다. 바트(J. Bad, 중국성: 巴) 주교는 아주 일찍이 몽골(蒙古)교구를 세 개로 나누려고 생각하였다. 성부에서는 그의 희망대로 비준하였고, 이로써 파(巴) 주교는 그 휘하의 선교 신부 두 명을 주교로 축성하였다. 때는 1884년 5월 18일이었다. 그는 자신은 몽골(蒙古) 중부의 대목이 되었다. 이 시기에 성모성심회 선교사들이 관리하였던 선교지 내에는 이미 9명의 중국 신부가 있었으며, 37명의 성모성심회 선교사가 있었다.

 

성부는 이러한 결정으로 성모성심회의 선교 지구는 축소되었다. 선교 지구의 축소로 인해 선교사들이 이곳으로 집중적으로 들어왔다. 1880년부터 1889년까지 이곳에 거주하던 신부들은 모두 46명이었으며, 1890년부터 1899년까지는 신부가 85명으로 늘어났고, 이미 선교 노선은 점점 완정을 이루어갔고, 서로 간의 연락 역시 아주 긴밀하였다. 신부들이 거주하였던 성당에는 신부들이 돌보는 작은 공소와 같은 본당이 있었는데, 역시 신부의 관리아래에 있었다. 그들은 전력을 다해, 교우들을 예수께 돌아오게 하였으며, 성사로 교우들의 생활을 제고시켰다. 각기 작은 소성당에도 남녀 학교를 설립하였고, 고아들의 교양(敎養)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재속교우 즉 선교원은 현지에서 수절한 처녀들의 도움아래, 적지 않은 효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재속교우의 임무는 열심한 사람은 더욱 열성적으로, 냉담자는 열성적으로, 교외 인사들은 점점 교회의 품으로 끌어오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목한 사업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직학원(聖職學院) 육성사업이었다. 성직학원은 선교사들의 지도아래 성립되었다. 길게는 1865년 최초로 4명의 신부가 중국에 와서 각 지역으로 분산되어 파견가기 이전에, 4명중 1명이 서만자(西灣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1891년 변란이 발생하고, 1892년에서 1893년까지는 가혹한 기근이 들었으며, 1900년에는 의화단 사건이 발생하여, 성직자를 양성하기에는 외부적인 여건이 좋지는 못하였다. 이 해에 성모성심회의 선교지구에는 이미 18명의 중국신부가 있었으며, 112명의 성모성심회 선교사가 있었고, 그들의 관리아래 교우는 이미 3만 명을 넘고 있었다. 본당은 모두 63곳이나 되었다. 같은 해 박해가 일어났는데, 8명의 성모성심회 신부, 중국국적 신부 1명과 거의 2천 명의 교우가 살해당하는 가혹한 박해가 일어났다.

 

약간의 구역에서 교우가 분리되고 흩어지게 되자, 선교 사업도 상당한 타격을 받으며 거의가 훼멸되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신부들의 용기로 일부 교우들은 동요되지 않았다. 1900년 몽골(蒙古) 방면의 교무는 확실히 어려운 시기였으나, 천주의 강복으로 평소와 같이 지낼 수 있었다. 먼저 성부에서는 성모성심회의 회장(會章)을 비준하였고, 이때부터 뜻있는 젊은 사제들이 이 지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더욱 선호하여 지원자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Ⅱ. 1900~1922년 시기

 

점차 각 본당 특히 현재의 수원성(綏源省) 지역에서는 각종 재난이 발생하였다. 교무의 진척은 아주 완만하였으나, 위험 속에서도 교무는 발전하였고, 상당히 공고한 기초를 다져나갔다. 일찍이 1900년 이전에는 선교를 담당하던 신부들은 영적인 복지도 중요하게 생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지 주민의 물질 복지도 소홀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신체방면에 대한 체력을 향상시켰다. 당연히 사회복지사업은 차등의 임무였고, 정신감화 업무가 당시로서 가장 중요한 업무였다. 교우의 정신 감화와 영적인 충만함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무형중의 영향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여졌고, 이러한 영향은 상당한 효과를 나타냈다. 친히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거나, 혹은 은혜를 입은 사람을 본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교화되는 등 선교의 수준이 향상되었다.

 

중국 인사들은 변경 지역이 점점 발전하는 것을 보았고, 장성 이남의 광대한 지역이 점차 농촌으로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것은 모두 선교 사제들의 원조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제들은 정부의 격려를 받으면서, 변방 주민들의 농업을 개량하는데 앞장섰으며, 그들에게 몽골 기후, 토질에 대한 적응 훈련을 시켰다. 또 그들에게 새로운 농기구를 주었고, 종자를 개량시켰으며, 황무지 개간을 지도하는 등 이로써 생산을 증대시켰다. 이로써 사회사업의 큰 발전을 이루었다.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종의 새로운 형태의 선교방식이 형성되었는데, 그것은 현지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이전에 내지에 있을 때에는 선교사 자신들의 부모와 고향 친지들의 도움이 있었으나, 이러한 변경지대로 선교사들이 이주해 오면서부터는 그들은 지역민들에게 더욱 열렬한 지지를 받았는데,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보다 더한 환영을 받게 되었다. 선교사들 자신은 원래의 환경을 떠나, 소수의 교우들이 사는 곳에서 함께 생활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이러한 생활방식을 받아들였다. 농부는 선교사들의 선진 방법에 의해 농작물 재배에 성공을 하였고, 비록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질병이 유행할 때에 그들은 업무를 중단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파산하게 두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선교 신부들은 그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농사짓는 토지에 건물을 들여 세를 놓았고, 점점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쌓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하였고, 병자들은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신부들은 그들에게 하천의 물을 끌어다 농사에 사용하는 즉 관개하는 것을 알려주었고, 그들에게 서로 돕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며, 재난에는 서로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의 물질생활은 크게 향상되었다. 주민들은 고상한 정신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도덕관으로 양호한 그리스도의 신자가 되었고, 국가와 민족의 복지향상으로 양호한 국민이 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연히 이러한 업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주 궁핍한 촌락에서부터 성공을 거두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선교방법은 아주 오랜 희생정신을 요구하고 있었고, 매년 끊이지 않는 투쟁을 극복해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헛되지 않았다. 선교 신부들은 옛 선교방식을 고집하지 않았고, 앞에서 말한 방법으로 직접 그들과 부딪히며 선교하였다. 그들은 자비로운 마음과 직접 몸으로 행동함으로 백성을 위해 서비스한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알게 되었고, 이로써 주민 및 사회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게 된 것이다.

 

선교업무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현지의 기후와 지방성 질병으로 어려웠고, 또 변경지대의 치안문제가 큰 어려움 중의 하나였다. 외국인 신부는 자주 콜레라에 감염되어, 아주 높은 사망률을 나타냈다. 1906년에서 1920년 사이(광서 32년~민국 19년) 130명의 성모성심회 선교사가 사망하였는데, 그중 88명은 바로 콜레라로 인해 사망하였다. 어떤 사람은 환자를 간호하다 감염되어 사망하였고, 어떤 사람은 강도의 수중에서 촌장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망하였다. 비록 이와 같았으나, 1900년에서 1922년 사이 성모성심회 신부는 229명으로 증가하였다. 현지의 성직학원에서 배양한 몇 명의 중국국적 신부가 그 대열에 참가하였다. 1925년 몽골(蒙古) 지방에는 187명의 성모성심회 선교사가 있었고, 30여 명의 중국국적 신부가 있었으며, 13만 8천 명에 이르는 교우가 있었으며, 신부가 상주하는 126곳의 성당이 있었다. 오래지 않아, 중국에서 오랜 선교생활을 하였던 뤼떵안(呂登岸) 신부는 당시 수도회 총회장으로써 인류복음화성(포교성성)과의 담판으로 이곳의 선교지구 사무를 한 차례 전반적인 조정을 준비 하였다. 당시 감숙성(甘肅省)은 이미 3구역으로 나뉘었는데, 숙북(肅北)대목구와 숙남(肅南)감목구는 1905년 이미 성립되었고, 또 다른 독립 선교구는 1888년에 역시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 이 세 구역은 모두 다른 선교 사제들에게 위탁 관리되었다. 몽골(蒙古) 방면의 3개 대목구 역시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성모성심회는 찰합이(察哈爾), 열하(熱河), 수원(綏源), 세 곳의 대목구를 담당 관리하게 되었으며, 인류복음화성에서는 다시 영하(寧夏)대목구와 대동(大同)대목구를 분리시켰다.

 

이번 변방의 분리 후, 신부들의 활동 범위는 비교적 축소되었으나, 인사(人事)의 운용은 충분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교 사업이 번성하였고, 본당이 증가하였으며, 교우의 숫자 역시 증가되었다. 그러므로 더 많은 신부가 이곳에 투입되지 않는다면, 실로 이러한 선교지구를 운용할 수 없었다. 다음 기간의 업무 중에 우리들은 신부들의 수준을 증명할 수 있으며, 확실하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숫자가 되었으나,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가장 유효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언급하는 소위 두 가지 어려운 문제는 교외인사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느냐와 교우들을 어떻게 다시 성교회로 인도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Ⅲ. 1922~1945년 시기

 

제1차 세계대전이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까지,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가장 혼란한 시기였으며, 중국에서는 더욱 심하였다. 그러나 교회 전체의 선교 사업을 위해서 이 시기는 아주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 발전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왜냐하면 교황청은 이 시기에 각종 자선사업을 창설하였으며, 중국국적 신부와 외국국적 신부들은 아주 오랫동안 자선사업에 종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 사업은 나날이 열기를 더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성부 문헌에 아주 많이 잘 나타나 있다.

 

성모성심회 선교회의 창설이후, 그들은 성좌의 적자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으며, 성좌의 어떤 결의와 어떤 지시가 있다면 조건을 불문하고 무조건 수행하였다. 제1대 교황대사3)가 중국에 왔을 때, 그들은 열렬하게 교황대사를 환영하였다. 1922년 다른 사람들에 의해 홀시되던 옛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는데, 그것은 그들의 선교중심지에 각 교구와 연합하여 성직학원을 건립하였으며, 몇몇 지구에는 소수도원을 건립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인재를 양성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이곳에서는 아주 양호한 신학생들을 배출해 내었다. 당연히 그들은 인재를 각 선교지구에 건립한 철학원과 신학원에 모두 파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인재를 집중 육성한다는 견지에서, 연합 신철학원 제도로 인재를 배양하였다. 대동연합신철학원의 성립은 이러한 목적에서 건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래지 않아 성모성심회 선교사들이 지구의 신학생들을 직접 양성하였는데, 모두 이곳의 신철학원내로 학생들을 모아 집중 교육시켰다.

 

동시에 총회장은 중국에 와서 선교할 사제의 학부(學府) 건립을 결정하였고, 전문적으로 중국 언어, 역사 및 영성과 사목(靈牧) 학식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먼저 북평(北平)에 중국어[華語]학원을 성립하였으며, 후에는 천진(天津), 상해(上海) 등지에 선후로 성립하였으며, 최후로는 북평에 집중시켜 교육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학부가 성립된 후, 인재가 배출되었고, 점점 중등학교로 바뀌었고, 사범학교 등으로 발전하면서 어려웠던 모든 것들이 해결되었다. 이 시기 동안은 자연히 전쟁으로 인하여 여러 어려움이 나타났으나, 중국에 와서 선교한 성모성심회 신부들은 213명이나 되었다. 인력은 이미 충분하였으며 선교 사업에 충실하였다. 선교 사업은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발전을 보였고, 물질적인 측면의 사회복지 및 교육 사업 방면에서도 나날이 발전하였다.

 

선교업무는 꾸준히 발전하였는데, 수원성(綏源城)에 천주교의원[公敎醫院]을 건립하였다. 1899년 몽골지방에는 이미 외국국적 수녀가 선교 업무를 보고 있었으며, 그 이후 계속해서 수녀들의 숫자가 증가되었다. 그녀들의 선교 사업에 대한 도움은 홀시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또 그녀들은 여자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졌으며, 안로원(安老院), 고아원 및 기타 자선사업을 돌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선교업무에 대한 이상을 알고 있었고, 자기들의 선교업무의 목표를 의식하고 있었으므로, 선교사들은 남은 여력을 중국국적 신부를 양성하는데 온 정열을 쏟았다. 그들은 일정한 지역에서는 현지 중국 주교가 교무를 관장하게 하고자 하였다. 대동(大同) 신철학원은 1936년에 수원(綏源)에 철학원을 분설하였다. 1927년에서 1929년 사이에 집녕(集寧)에 상당히 좋은 선교원지(傳敎園地)를 준비하였다. 1929년 교황청은 중국국적 신부에게 그곳을 관리하도록 결정하였다. 3년 후, 동몽골(東蒙古, 즉 熱河省 현재의 산서성)에는 감목구가 설립되었다. 그 중심지역은 적봉(赤烽)이었으며, 중국국적 성직자가 관리하였고, 외국국적 선교사들은 현지 주교의 청에 따라 서비스하였으며,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서 업무를 보았다.

 

성모성심회 선교사는 열하(熱河, 현재의 承德)교구 내에 남자수도회를 설립하였고, 동시에 주교들은 또 중국국적 여자 수도회를 건립하였으며, 그들은 수년 후에 적지 않은 사업을 전개하였다.

 

선교사들은 증가한 교우의 숫자에 만족하지 않았고, 뒤쳐져 있던 교무로 인해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우들을 강화시키고 사업을 발전시켜, 일종의 완전하고 강건한 조직을 만들었으며, 그들이 조직한 이러한 단체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후 우리들은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다.

 

1945년의 통계에 의하면, 233명의 중국국적 신부가 있었고, 239명의 성모성심회의 선교사가 있었으며, 이들이 모두 23만 5천명의 교우를 관할하였으며, 신부는 224개의 성당을 관할하였으며, 동북에서 영하(寧夏, 현재의 영하회족자치구)까지가 모두 이 범위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몇 년 동안 성모성심회 선교사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먼저 일본군들에 의해 유린당하였고, 뒤에는 팔로군 유격대에 의해 유린당하였다. 1941년에서 1943년까지 , 외국국적 2백 명의 신부가 일본군에 의하여 집중 관리되었고, 어떤 사람은 심양(瀋陽)까지 압송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북평(北平)으로 이송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다른 현으로 피신하는 등 전체 선교업무가 모두 중국국적 신부의 어깨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용맹하였고, 신앙의 변함없는 마음[恒心]을 지니고 선교업무를 수행하였으며, 그러는 동안에 말로 표현하지 못할 어려움을 겪었다. 외국국적 신부가 비록 집중 수용되어 관리를 받고 있어 직접 업무를 도와주지는 못하였으나, 그들은 여전히 기도로 그들을 도와주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중국국적 신부들이 교무를 주관하였으며, 항전 승리 후 외국국적 신부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들은 해당 지역 교무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으며, 아래와 같은 피의 역사[流血史]를 기록하게 되었다.

 

 

Ⅳ. 1945년~1955년 시기

 

전쟁으로 인해 선교사들이 집중 관리된 생활은 일종의 시련이었으며, 선교사들은 이 시기에 적지 않은 선교생활의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선교 업무를 보던 지역에서 멀리 떨어졌으나, 선교사업의 음성은 계속 그들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중국국적 신부의 복무 정신, 자신들의 교우들에 대한 추억 등 모두는 그들의 눈과 마음에서 하나하나 떠올랐고, 이러한 것들이 선교사들에게는 일종의 정신적 건강이 될 수 있었다. 수년 이내에 각성에 분산되어 있던 각종 수도회와 여러 국적의 선교사들이 모두 한 곳에 집중되어 장관을 이루었고, 또 각종 선교문제에 대한 토론이 일어났으며, 각 전문분야 연구에 대해 서로 상의하고, 서로 비교하여 보았다. 그들은 이미 지난 일을 돌이켜 보았으며, 미래의 기회를 기약하며, 전후의 선교방침에 대하여 성숙한 연구를 하였으며, 혁신적인 방법을 찾아내었다. 일단 항일전쟁에 대한 승리의 종성이 울리자, 모두 집중 관리된 곳에서 나왔으며,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으며, 동지들과 함께 선교 업무를 맡게 되었다.

 

약간의 선교사들은 상사(上司)의 격려로 북평(北平) 성내에서 새로운 업무지역을 찾았다. 그것은 현대화된 도시에서 선교를 하는 것으로, 광범위한 현대적인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전화, 전람, 강연 등이 선교를 위한 도구였다. 오래지 않아, 회인학회(懷仁學會)가 성립되었고, 그들의 선교 업무는 지식분자, 교수, 대학생들로 대상을 옮겼다. 천주교 교무협진회(天主敎敎務協進會)는 상해에서 성립된 이후,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선교방법을 전국 선교사들 사이에 퍼뜨렸다. 교계제도의 건립 이래로 중국에서의 선교방식은 모두 바뀌게 되었다. 북평(北平) 성내에 있던 약간의 성모성심회 선교사들은 티앤껑신(田耕莘) 추기경의 격려로, 대학생들을 그들의 연구조직내로 흡수하는 것과, 그들의 새로운 본당(堂口)내로 그들을 흡수하는 일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북평(北平) 혹은 기타 도시에서 학계에 희망적인 사조

(思潮)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변경의 선교업무와 도시의 선교업무는 새롭게 희망적인 변화로 이어져 가는 과정에서 비통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여전히 위험한 호랑이의 입에서 아주 오랫동안 버텼으며, 아무도 자신이 맡고 있던 선교지역의 범위를 떠나지 않으려 하고 하였으나,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감시하는 사람이 있게 되고, 공개적으로 처형되는 사람이 있었으며, 최후에는 중국 도처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대부분의 신부는 북평, 심양, 외현(外縣) 등지의 집중관리지역에서 벗어 난 후, 자신들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으나, 그들이 돌아가서 본 옛 선교 지역은 이전과는 상황이 아주 달라져 있었다. 무정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선교사들을 대하였다. 그들이 발로 뛰어 선교지역을 만들어 놓았던 몽골지역은 이미 팔로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신부들은 그곳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의심 분자’, ‘인민의 공적’(公敵)이라며 멸시받게 되었다. 그들은 1개월의 ‘감시’를 받은 후, 공산당의 각종 학대를 받았고, 교회 사업이 훼손되는 것을 보고만 있었을 뿐, 그러한 것을 막을 한 가지 방법도 없었다. 더욱 심한 것은 선교사들은 각종 모욕을 당하고, 인민재판을 거친 후, 또 몇 개월 감옥 생활을 한 후에 결국은 국경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일부는 옥중에서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중국국적 신부와 열성적인 교우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은 자가 상당히 많았다.

 

1946년에는 또 55명의 청년신부가 도착하였다. 그 사이 총회장의 순시가 있었으며, 동시에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온 의연금이 상당히 낙관적으로 도착하였다. 이 모든 것은 선교사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 방면의 태도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며, 어떠한 신부도 그들의 독수(毒手)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955년 말, 최후 1인 선교사가 대륙에서 홍콩으로 나왔다. 이후 그는 프랑스의 베르사이유로 돌아갔다.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의 장막은 점점 더 굳게 닫히었다. 이전의 교무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어렵게 죽의 장막에서 나온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 그것은 중국국적 신부의 용맹함과 교우들의 강인함으로 교무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둠속에서 교무의 발전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많은 신부들이 옥중에서 고문을 당하였고, ‘노개’(勞改: 노동을 통해 개조되는 것)되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신부로서 죽는 영광을 입었다. 일부 일찍 중국에 도착한 성모성심회 선교사는 몽골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길 수 없었고, 죽의 장막내의 신부와 교우는 그리스도의 원수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조용한 몽골사막 중에는 244기(基) 묘지가 있어, 중국국적 신부와 교우들에게 신앙을 증거 하는 힘이 되고 있다.

 

 

Ⅴ. 중국에서 성모성심회 선교사 선교사업의 특징

 

앞에서의 소개로 1명의 천주교 선교 신부가 초월적인 사명을 짊어졌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 이러한 천직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먼저 그리스도의 손안에서 사제의 신품을 받았고, 다시 교회에서 지정한 임무를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사제 역시 교회의 신성성(神聖性)에 대한 창시자로 그러한 면에서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전 세계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것을 본업으로 하고 있으므로, 선교 업무 방면에서 나누어서 합작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선교사의 업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다시 반복하는 것으로 무한한 선량한 마음을 가지고, 지고(至高)의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추호의 개인적인 욕망은 없어야 한다. 그들의 업무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될 때, 모든 사람들은 은혜를 입고, 먼저 영혼을 구원하고, 또 그 육체를 구원하며, 가정과 사회 및 모든 생존하는 여건에서 은혜를 입게 된다. 신부는 정신적인 임무를 수행할 때, 동시에 물질적인 복리에 대한 임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자선 및 정의의 이름의 유일한 목표는 복리(福利)이며, 모든 사람들의 평안과 각 가정과 사회의 진보와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다시 돌이켜 생각한다면, 그들이 하는 사업은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발전을 가져다주는 것이며, 그들의 사업이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중시와 동경을 받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각 개인적으로 살펴본다면 선교사들도 각자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다. 단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들은 대의적으로 그들의 사업을 살펴보아야 한다. 인사방면에서는 항상 시행착오적인 여지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약사(略史)는 너무 간단하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내용에서 화북(華北)에서 전개한 교회 사업이 얼마나 아름다웠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업무 중에서도 효과를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으며, 얼마나 많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으며, 얼마나 많은 쓰림과 아픔을 겪었는가! 그러나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것이므로, 영원한 마음과 용기를 가지고 현지 신부와 교우들의 협력으로 그들은 결국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선교 생활의 성공은 피를 땀과 맞바꾼 것이었다.

 

성과는 그 원인이 있게 마련으로, 이러한 선교사들의 항구적인 노력과 기묘한 방법으로 이루어낸 것을 어찌 수주대토적인 효과라고 폄하할 수 있겠는가? 수 십 년의 경작, 수백 명의 노력과 전 세계 교우들의 끊임없는 지원과 기도로 이러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원인이 된 것이다.

 

선교사들은 중국 변경에서 선교의 목적을 이루었는가? 그들은 변경에 십자가를 세우고, 교우 단체들을 육성하였는가?

 

그들이 벌인 역사성적인 특징은 모두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진행한 것이었다. 교우단체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활의 견고함이 우선되어야 하였는데, 그들은 사회 복지적인 방면과 물질적인 방면에서 모두 완전하게 이루어 내었다. 끝으로 또 그들은 교우의 지식수준을 향상시켰으며, 중국국적 성직자를 양성하였다. 중국국적 성직자들로 하여금 교회 전체 사무를 유지할 능력을 갖추게 하였다. 또 그들 중국국적 성직자들은 교우들에게 생활에 모범을 보였고, 각종 교회 사업을 주관하였다.

 

아래 몇 줄에서는 특별히 중요한 것을 언급하겠다.

 

일찍이 1868년(청 동치 7년), 페르비스트 신부가 대목 대리로 있을 때, 한 편의 문장을 발표하였는데, 교우들의 모범적인 생활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으로, 교육은 다음 세대를 위한 중요한 책임이라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미래 신덕(信德)의 시금석(試金石)이며, 선교를 위한 좋은 방법이며, 외교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역설하였다.

 

몽골지방의 교우는 오랜 기간 동안 교회의 원조를 받지 못하였으며, 이로써 빈곤하여 흩어져 잃어버린 것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오래지 않아, 교회의 업무에 지도자가 나타났고, 이전의 어려움은 이후 크게 호전되었다. 성모성심회 선교사와 교우들은 함께 생활하고 함께 죽었다. 신부는 점차 증가하였고, 선교중심 역시 비온 후에 대나무 순이 자라듯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부근의 교우들은 경축일이나 축일에는 함께 모였으며, 선교요원을 훈련을 엄격하게 시켰으며 교우와 하나의 단체를 이루었고, 신부가 없는 본당에도 교우의 신덕에 광명을 비쳐졌으며, 애덕의 불길이 교우들이 있는 지역 골고루 비치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처음 중국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은 현지 언어 소통이 쉽지 않았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선교사들은 먼저 통하지 않으면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선교사들이 변하는 것의 가장 좋은 방법은 해당지역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었다. 결과 결국에는 이러한 종류의 곤란을 극복하였다.

 

종합적인 교리를 알려주는 방법으로 그들은 핵심적인 약간의 교우들을 먼저 중점적으로 교육, 훈련시켜, 교리적으로 상당한 수준을 확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많은 수절 처녀들은 자기 가정을 떠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100km 혹은 150km 밖의 지방으로 다니면서, 교회 사업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고아원의 잡다한 업무를 마다하지 않았고, 여자아이들의 교육사업도 그들이 친히 담당하였다. 또 그들로부터 훈련 및 교육을 받은 여자 아이들이 일단 결혼을 하게 되면, 모두 교우 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일부 가정에서는 전 가정이 신부들과 연결되어, 외적인 발전을 하게 되어 새로운 농촌단위를 건립하고, 새로운 교우단체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신부들이 주관하던 약간의 본당은 매년 유동적으로 전문 신부들이 가서 강연을 하였으며, 교우들에게 성사를 집행하였으며, 이러한 것들은 교우들에게 아주 유익한 것이었다. 만약 우리들이 주마간화(走馬看花)의 방법으로 교우들의 생활을 관찰한다면, 현지 교우들의 생활 규율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매년 4차례의 고해와 사규성사를 지키면서 완전하고 충만한 무결점의 행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릇 선회(善會: 자선사업)에서 그들을 필요로 할 때면 그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크고 작은 축일에는 예절 교육에 참여하였다. 어떤 때에는 몇몇 가정 혹은 몇몇 종족이 교회의 애덕(愛德)행사에 도움을 주었는데, 사람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큰 도움을 주었다. 신부는 정신적으로는 자애로운 아버지이며, 종교적으로는 지도자이었으므로, 교우들이 어떠한 곤란이 처해 있을 때에는 신부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해 주거나 어려움을 풀어주었으므로, 신부는 진정한 교우들의 보호자였다. 교우들의 눈으로 볼 때, 신부는 잘못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였으며, 신부는 영혼의 보호자라고 생각하였으며, 가깝거나 먼 교우들의 일상생활은 모두 신부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교우촌내의 천주당은 일반 여행자들이 쉽게 알 수 있게 특별한 표식이 되어 있다. 사방 네 주위에는 푸른 잎의 나무들이 둘러 쌓여있고, 종탑 위의 십자가는 그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몽골지방에서 아주 외딴 벽지의 깊숙한 곳에 첨탑과 십자가가 있는 것은 동서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떠한 민중 집단도 교우 집단과 같은 풍요로운 생활력을 가진 것은 없었다. 교우 촌에서 사람들은 천주당을‘쌍애당’(雙愛堂)으로 불렀는데, 이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천주당내의 사람들은 두 가지의 사랑을 실천하였는데, 즉 위로는 천주를 사랑하고, 아래로는 민중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두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민중은 교회의 안과 밖을 막론하고, 대부분은 모두 이곳 교회 안에서 아름다움의 과실을 얻었다. 만약 환경이 허락한다면, 이러한 방법의 선교방법을 보편화시켜 자선사업을 발전시키고, 아울러 문화 방면의 업무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한다면, 교우들의 생활은 안정되고, 미래의 큰 성취에 대하여 어찌 제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의심할 여지없이, 이러한 성취는 하루아침의 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역시 선교사들의 업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었으나, 모든 업무가 아주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떤 때에는 신부가 환경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약간의 교우들이 신부에게 협력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은 선교업무를 진행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확정된 행동이 있다면 즉, ‘우리 주의 가장 큰 영광을 위하여, 인민의 가장 큰 복지를 위하여’라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만자(西灣子)의 예를 볼 때, 약간의 숫자가 우리들에게 하나의 개념을 심어주었다. 1937년 주민 총수가 4천 명을 넘지 않았고, 초급 소학교에는 470명의 학생이 있었으며, 고급 중학교에는 72명의 학생이 있었다. 예비 수도원 학생은 68명, 고아원의 고아 총수는 328명이었으며, 양로원에는 16명의 노인이 있었고, 진료소는 매년 환자 진료 횟수가 17, 355차례였다. 숫자로는 한 몽골 촌락의 교우간의 사랑하는 정도가 아주 이상적인 정도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몽골지방의 촌락은 지리적으로 말할 때나 경제적으로 말할 때, 하늘에서 내린 혜택을 받는 곳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한 사건으로 이곳에서의 휘황한 결과를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서만자(西灣子)의 경우로, 이곳은 겨우 몇 십 년 내에 40여 가구 가정의 자제가 고급교육을 받고 신품을 받았다. 1933년에서 1951년까지 로마 교황은 두 명의 서만자(西灣子) 아이를 선발하여, 주교의 자리에 앉혔다. 이 둘은 판헝안(樊恒安) 주교와 짱지아씽(張家興) 주교이며, 이외에 수 십 명의 서만자(西灣子)의 여아들이 수녀의 생활을 받아들였고, 수 백 명의 여아는 집안에서 정절을 지키면서 자선사업과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다. 서만자(西灣子)의 일반민중의 윤리 수준 역시 아주 낙관적이었다.

 

신부들은 내몽골에서 종교적인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에는 사회 복지의 큰 권한도 장악하고 있었다. 천주교는 한 방편으로는 사람과 천주와의 관계를 조정하여, 사회관계에 협조적인 종교가 되어, 모든 사람들의 심신 발전과 사회조직의 발전이 있기를 희망하였다.

 

선교사업에 있어 성모성심회 신부들의 특수한 한 면은, 왕쇼우리(王守禮) 주교가 그의 《몽골사회에서 천주교의 활동》(天主敎在蒙古社會的活動)이라는 책에서,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신부가 어떻게 토지를 개량하는지에 대해 서술하였고, 신부들이 어떻게 사람들과 하나로 어울리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아주 빠르게 인민을 영도하는 새로운 단계로 부상하였고, 교우 촌을 건립하고, 방어 업무도 마련하였다. 그들은 교우 촌을 건립하였으나,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안전만이 제공되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새로 지역이 개발되면,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더욱이 변방지역의 치안문제는 아주 열악하였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모든 인간 세상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게 되었다.

 

몽골에서 그들이 매일 부딪히는 것은 농경문제로, 그곳 사람들 모두가 토지에 의존하여 생활하던 사람(80%이상이 농민)이었으므로, 자연히 농경문제가 그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한 것은 새로운 농경방법(耕種), 새로운 종자, 조림(造林), 도구[工具], 관개(灌漑), 현지 공업, 합작사업 및 기타 사회 서비스 등이었다. 더욱이 황하유역 일대는 체계화된 관개(灌漑)사업으로 수십 km의 하상(河床) 토지가 생겨났고, 그 부근의 토지는 옥토로 바뀌었으며, 수 천 명의 인민이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되었다.

 

우리들이 가장 가치 있게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수재(水災), 인화(人禍), 기황(饑荒)의 시기 내에 교회는 그러한 재민(災民)들에게 자선사업을 베풀었고, 아울러 그러한 사업은 종교와 무관하지는 않았다. 의료와 약품상의 서비스에 대해서 신부들은 교우이거나 혹은 교우가 아닌 사람들을 모두 동일시하였다. 페스트가 유행하자 세상이 어수선해졌고, 사람들은 신부들이 있는 곳에서 안전과 원조를 얻을 수 있었다.

 

총체적으로 볼 때, 조금도 과장된 것이 없다. 무릇 몽골지방에서 어떠한 재난이 일어났다면, 신부들은 그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서 도와주었으므로, 현지인의 자애로운 아버지이었다. 이로써 우리들은 왜 신부들의 주택 가운데 높은 곳에 감사의 편액이 걸려 있는지를 알게 되었고, 이러한 편액은 모두 지방 인사들이 백성을 인솔하고 와서 전달해 준 것이다.

 

교우의 숫자가 나날이 증가하였고, 교우의 생활이 나날이 좋아졌으며, 향촌 생활도 보장을 받게 되었고, 자연히 날로 흥성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것이 신부들의 사회활동에 대한 성과가 아니겠는가? 이것은 본 세기 성모성심회선교사들의 몽골지방 업무의 전체적인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우리들은 반드시 세 번째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모두 노력으로 얻은 월계관이라는 것이다.

 

선교사는 상당한 학식으로 그들 업무 범위내의 일반 백성들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선교사 중에 한문과 몽골어에 대한 전문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리, 역사, 민족기원, 고고학 및 중국 예술 등에 있어서, 연구자들의 이름을 나는 한 명, 한 명 거론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저작으로 일부 선교사들은 자신의 업무지역의 민족성과 지방풍속을 연구하여, 적지 않은 도움을 주게 되었으며, 자기 휘하 교우들의 개성에 대해서는 더욱 깊이 있는 연구를 하였다.

 

1세기 이전에 성모성심회 선교사는 선교 구역 내에 학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수의 교우들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아주 작은 경언요리(經言要理)학교를 건립하였고, 오래지 않아, 정식의 소학교가 건립되었다. 그 후 중등학교도 생겨났고, 사범학교 및 직업학교 등이 생겨났다. 이러한 교육사업의 발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높은 건축 건물도 먼저 기초를 닦은 후, 한 층 한 층 높아지게 된 것이다.

 

1906년 통계에 의하면, 남학생의 소학교가 125곳이 있었으며, 학생 수는 2,925명이었다. 여학생 소학교는 114곳으로, 학생 수는 2,815명이었다. 또 1,844명 여학생은 고아원내에서 수업을 받았다. 중학은 모두 9곳으로 남학생은 264명이고 여학생은 73명으로 나누어서 학생을 받았다. 1911년 이래, 중국 정부는 학교에 대해 새로운 규정을 제정하였다. 1925년 통계에 따르면, 학교는 638곳이나 되었으며, 학생은 19,206명(남학생이 8,626명, 여학생이 10,580명)이었다. 1937년 학교는 937개소로 증가되었는데, 학생은 25,390명(남학생 13,925명, 여학생 11,465명)이었다.

 

여자 수녀회가 설립된 이후, 교육인재 배출되었고, 선교 대오는 즉각 새로 가입하여 활력을 불어 넣는 인원이 적지 않았고, 교우 남녀 교원들 역시 인재가 수두룩하였으며, 진정으로 기상이 화려하고 변화가 많았다. 1942년 한 해 동안 일본군에 점령당하게 되자, 환경도 좋지 않아, 계속 곤란이 잇달아 일어났으나, 교회에서 세운 학교 내에는 여전히 학생이 27,724명이었다. 적지 않은 교우교원은 국내 대학에 보내지거나, 혹은 외국으로 나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자연히 그들은 학업을 마친 후, 그들의 공헌은 학문이나 기능에서 보통이 아니었다.

 

이것은 일반적인 교육사업의 개황이었는데, 선교 인재 즉 신부를 양성하는 문제는 자신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였다. 그것은 바로 성직학원 설립, 사제 배출의 후보인원 양성 등이 그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사업은 이미 휘황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미래를 위한 계획으로 반드시 오랜 계획을 세워야 하였으며, 이로써 중국 국적의 성직인재 양성의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의 두 방면에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다수의 열심한 교우가정을 기초로 하였고, 그 다음으로는 행동을 확대시켰다. 남자 청년들은 신부가 되려는 뜻을 품었으므로, 먼저 소학교육을 받은 후에, 6년간의 중등교육을 받고, 다시 6년제 신철학원에 들어가 훈련을 받으면, 일반대학의 수준에 부합하였다.

 

장기간의 분투를 거치면서, 이러한 두 가지의 교육 사업은 점차 성과를 거두었다. 신학 예과(預科)학교는 이미 정상궤도에 올랐고, 성직학원 역시 1922년 이후로 건립이 시작되었다. 1940년, 서로 다른 선교구역에서 이미 신학예과학교 학생 280명이 있었고, 대동(大同)과 수원(綏源)의 신학생은 모두 98명이었다. 로마에서 수업을 마친 중국 신부도 역시 수 명에 이르렀다.

 

교육사업의 성취는 수준이 있는 현지 중국 성직인원을 양성하는 것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로마에서도 이미 중국국적의 주교가 나오게 되었으며, 교구를 지정받았고, 중국국적 신부와 함께 교무를 담당 하였으며, 외국국적 신부들은 새로운 구역으로 밀려났으며, 그 옛 친구의 어깨에 업무가 떨어졌다. 당연히 이것은 큰 기쁜 일이었으나, 인간의 정에 의해 말한다면, 정이 남아 있어, 떠나기가 아쉬웠으나, 외국국적 선교사의 임무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주 기뻐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성공하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미 선교의 중요한 임무들이 모두 현지의 중국 성직자에게 넘어갔는데, 이것은 오랜 기간 일해 온 것이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임무는 후에 오는 형제들의 가슴에 새겨졌으며, 교우들의 마음속에 새겨지게 되었다. 후에 오는 똑똑한 사람들이 사업을 계승하였으며, 그들은 이미 이루어 놓은 사업을 보존해야만 할 뿐 아니라, 더욱 노력하여 크게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들은 성모성심회 선교사의 중국 선교역사에 대한 결론을 말하고자 한다.

 

회의 설립자가 당시 입회의 목적은 중국 선교 사업이었다. 그 자신 본인 및 제자들이 모두 한마음 한 뜻으로, 자기의 육체와 영혼을 헌신하였고, 성좌에서는 그들에게 지구내의 업무를 위탁하였다. 그들은 전력을 다하여 선교하였고, 그들은 죽음으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지켜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공산당에 의해 대륙에서 축출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장 곤란한 시기였던 1949~1955년까지였으며, 또 34명의 중국국적 신학생이 사제가 되었다. 같은 시기 내에 성모성심회 선교사들은 선후로 국경 밖으로 축출 당하였다. 현재 유일한 중국국적 성모성심회 선교사가 북평(北平)에 남아 있다. 그는 유일한 씨앗이며, 그는 적당한 시기가 오면 싹이 틀 것이며, 잎이 자라고, 꽃을 피우고, 많은 과실을 맺을 것이다. 이 중국국적 성모성심회 신부는 중국국적 주교와 중국국적 신부들 및 모든 교우들이 이전 사람들의 공덕으로 이 어려움을 이겨낼 것이다.

 

성모성심회는 중국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에서 선교하였던 ‘옛 중국인들’이 모두 선후로 기타 성모성심회 선교구내로 업무 파견되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국인이 많이 있는 곳으로 갔다. 예를 들면, 대만, 홍콩, 싱가폴(중국어로는 星嘉坡라 함) 등이다. 대만과 홍콩에서 그들의 업무는 아주 낙관적이다. 영하(寧夏) 주교 왕쇼우리(王守禮)는 교황청에 의하여 동아시아 교황청 시찰원에 임명되었고, 싱가폴(星洲은 星嘉坡의 별칭)에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일일을 하고 있으며, 1,500여 만 명의 화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성모성심회는 중국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며, 미래의 휘황한 시기를 다시 우리들에게 알릴 것이다. 성모성심회의 중국 선교 신부들은 여전히 힘을 다하여 그들 수도회의 제1 선교구로 중국의 복지실현을 생각하고 있다.

 

교황 요한 23세의 바램을 들어 우리들의 글을 마치겠다. “우리들의 눈을 미래로 돌릴 때, 우리들은 당신들이 다시 사도들의 사업인 원래의 포도원으로 돌아가 포도원을 경작하기를 바란다. 당신들은 비록 불행히 그곳에서 추방되어 그곳을 떠났으나, 당신들은 기회를 잡아 당신들의 업무를 계속하기를 희망한다. 당신들의 뜨거운 마음으로 가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시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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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내용은 P. V. Rondelez, 羅星塔 중문번역, 〈聖母聖心會在華傳敎簡史〉(1865년), 《天主敎在華傳敎史集》, 光啓出版社等聯合出版, 1966년판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2) 신의식(申義植) 충북보건과학대학교 중국비즈니스과 교수.

 

3) 현재의 용어로는 교황대사라고 할 수 있다. - 국문역자 주.

 

[학술지 교회사학 vol 9, 2012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P.V. Rondelez 저, 羅星塔 중문번역, 신의식2) 국문번역]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190684&Page=14&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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