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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신유박해(순조 시기): 성인이 될 궁녀와 성인이 된 궁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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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6-17 ㅣ No.1039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신유박해(순조 시기)] 성인이 될 궁녀와 성인이 된 궁녀

 

 

신유박해(1801년) 때, 조선 조정이 ‘너마저’라며 왕족만큼이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신자층이 있다. 바로 궁녀들이다. 문영인을 신문하던 관리가 소리쳤다. “궁에서 잘 교육받은, 너같이 젊은 여인이, 어떻게 법이 금하는 사교(邪敎)를 따를 수가 있느냐?”

 

 

조선 시대 여성 국가 공무원, 궁녀

 

궁녀는 조선 왕조에서 ‘직업을 가진 여성’으로 오늘날의 국가 공무원에 해당한다. 그들은 자신의 월급으로 친가의 가계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궁녀의 보수는 견습 나인의 경우, 다달이 백미 너 말과 해마다 명주와 무명 각 한 필이었다. 여름에는 베와 모시를 따로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궁녀 월급제가 실시될 때 상궁들은 고등관 대우를, 제조상궁들은 장관급의 대우를 받았다.

 

궁녀는 엄격히 선발되어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 궁녀는 담당 역할의 격과 차이에 따라 입궁 연령이 다소 달랐지만, 정식 궁녀는 대체로 어려서부터 궁에 들어가 수련을 쌓았다. 이를 테면, 왕과 왕비를 측근에서 모시는 지밀나인은 입궁 연령이 가장 낮았는데, 어림잡아 4-8세 사이에 궁에 들어갔다.

 

아이가 궁녀로 들어가면 해당 부서의 상궁이 양딸 삼아 교육시켰다. 그들은 한글, 소학, 여사서와 같은 기본적인 지식을 익히는 한편, 궁중 예의, 글쓰기까지 당대 여성으로서는 상당한 소양을 쌓았다. 그들은 입궁 뒤 15년이 되면 계례를 치러 정식 나인이 되고, 그 뒤 다시 15년이 지나야 상궁으로 승격했다.

 

조선 왕조 내명부에서 정1품부터 종4품까지는 왕의 후궁이고, 궁녀는 정5품인 상궁부터 종18품까지에 해당한다. 궁녀는 상궁, 나인, 견습 나인으로 나뉘며, 옷의 종류나 입는 방식, 머리 모양도 달랐다. 이들 외에도 나인 아래 하역을 맡은 사람들 곧, 궁중 각 처소에서 막일하는 무수리, 상궁의 개인 집에서 심부름하는 각심이(방아이, 방자), 후궁들이 데리고 온 하녀인 손님, 의녀들은 넓은 범위의 궁녀에 포함되었다.

 

궁녀는 조직과 위계가 엄중했다. 그들이 속해 있는 궁의 종류와 궁내의 각 부서에 따라 궁녀의 격이 달랐다. 또 궁녀 전체의 운영 조직도 치밀하게 구성되어, 총수격인 우두머리 상궁과 특별한 임무를 맡은 책임자들이 있었다.

 

재산을 관리하는 제조상궁, 창고 물품의 책임인 아릿고[阿里庫] 상궁, 왕의 측근에서 시위하는 지밀상궁, 궁녀들의 상벌을 담당하는 감찰 상궁 등은 대표적 임무였다.

 

궁녀는 종신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궁 안에서 죽음을 맞을 수 없고, 늙고 병들면 궁궐을 나가야 했다. 또 가뭄이 들어서 궁녀를 내보내는 경우와 모시던 상전이 승하했을 때 궁을 나갈 수도 있었다. 그들은 궁궐에서 나왔더라도 자유롭게 살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퇴궐한 궁녀들끼리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

 

궁녀는 어려서부터 훈련받고, 또 평생 단체의 한 사람으로 움직이는 집단이었다. 따라서 궁녀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동시에 궁녀는 신앙을 받아들이면 궁을 떠나야만 했다. 그들은 새 삶을 위한 버림조차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유인이 아니었다.

 

한편, 역설적으로 법에 뚜렷이 명시된 이 제도는 궁녀 순교자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궁녀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훈련받은 역할을 교회 일에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든든한 경제 기반을 모두 버리고

 

박해 100년 동안 이런 특수 훈련을 받은 궁녀 신자가 많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강경복(1762-1801년)과 서경의, 문영인(1776-1801년)이 있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는 박희순(1801-1839년), 김유리대(1784-1839년), 전경협(1790-1839년)이 궁녀 신자였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로 순교한 궁녀는 아직 드러나지 않지만, 궁녀 신자의 존재는 추측할 수 있다.

 

병인박해 이후에는 대원군의 운현궁에 궁인 신자들이 있었다. 신자 궁녀들은 뮈텔 주교에게 대원군의 부인을 안내하고 그의 소식을 전하는 일을 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전파 초기부터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궁녀들에게 이어져 왔다.

 

궁녀들의 신앙생활은 일반인보다 험난했다. 궁에서는 신앙 실천이 가능하지 않았다. 다만, 양제궁에서는 왕족 부인들이 신자였기 때문에 신앙인으로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신유박해 때 신문관은 강경복과 서경의를 현 궁녀라고 하고, 궁녀였다가 신앙 때문에 퇴출당한 문영인을 전 궁인으로 구별했다.

 

그 반면에, 기해박해 때 순교한 궁녀들은 신앙을 가짐으로써 모두 궁에서 나와야 했다. 교회가 재건을 위해 애쓰던 1830년 무렵, 궁에 있던 박희순이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전경협이 그를 따라 믿었다. 그들은 같은 궁의 궁녀였던 것 같다.

 

한편 전경협은 혼기가 되자 혼인을 뿌리치고 비교적 늦은 나이에 궁녀가 되었는데 본궁의 정식 궁인이 아니었을 수 있다. 다소 격이 낮으며 나이가 더 많은 전경협은 나인으로 들어간 박희순을 따라 신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박희순은 성품이 매우 고와서 순조가 그를 맘에 들어 했는데, 박희순이 이를 피했다고 한다. 신유박해 때 태어나 어려서부터 궁에서 살아온 박희순이 복음을 접하게 된 경로는 확실치 않다. 다만, 순교자의 소문이 이미 궁까지 퍼져 있었음을 단서로 볼 뿐이다.

 

그리고 김유리대는 신유박해로 부모가 냉담에 빠졌지만, 자신은 궁녀가 되어 궁에서 10년간 살았다. 성인이 되어 궁에 들어간 김유리대도 격이 높은 궁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았고, 결국 궁을 나와서 교우들 집안일을 해 주며 생활했다.

 

신유박해 궁녀, 기해박해 궁녀들은 마치 땅이 궁녀를 부르듯 모두 서소문 형장에서 순교했다. 이들의 신앙 고백은 그들이 속했던 궁과 궁녀 집단에도 충격적인 선포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새 삶을 위해 가진 것 모두를 버려야 했고, 버리는 데에도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애썼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조선 왕궁에서 변화를 시작했다.

 

그 기운으로 교회는 오늘도 새롭게 변화하는 데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해박해 궁녀들 가운데 박희순과 김유리대, 전경협을 성인으로 기린다. 신유박해의 궁녀 강경복과 문영인은 아직 ‘복자’이다.

 

주님의 말씀은 이처럼 교회 초기부터 조선 왕조 깊숙이 들어가 지탱되었다. 철옹성 같은 여인 집단으로 스며 들어간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궁녀들은 무엇으로 두꺼운 벽을 맞뚫었을까? 조선 왕조가 어떤 ‘가려운 곳’을 가지고 있었기에 궁녀들은 이토록 말씀에 목말라 했을까?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며 대구 문화재 위원과 경북여성개발정책연구원 인사위원을 맡고 있다.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임 연구원이다. 한국가톨릭아카데미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6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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