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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공소 이야기: 광주대교구 땅끝공소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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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5-08 ㅣ No.1158

[공소 이야기] 두 번째 - 광주대교구 땅끝공소를 가다


땅끝에서 보았다, 시련 속에 더 단단해진 믿음을

 

 

- 2015년 6월 새로 지어진 광주대교구 해남본당 땅끝공소.

 

 

한반도 최남단 땅끝마을, 그곳에도 공소가 있다. 

 

종종 태풍으로 집이 상하기도 하지만 광주대교구 해남본당 땅끝공소 신자들은 역경을 넘어가면서 공동체의 결속을 더욱 다져왔다. ‘공소이야기’ 두 번째로 땅끝에 있는 공소를 찾아갔다.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한반도 최남단 마을을 일러 ‘땅끝마을’로 부른다. 땅끝공소는 마을로 들어서는 초입, 산정리에 위치해 처음에는 산정공소로 불리웠다가 후에 땅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태풍으로 무너진 마음

 

1990년, 3명의 할머니가 소박하지만 땅끝공소를 세우고 가족 같은 공동체를 키워 왔다. 그런데 가끔 찾아드는 태풍이 위협적이었다. 2012년 8월 27일 밤, 태풍 볼라벤이 땅끝을 때렸다. 불안함에 밤을 새운 이성은(프란치스코 하비에르·62) 선교사는 새벽 3시30분경, 공소 지붕이 무너져 사택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스름 동이 튼 후 달려 나간 이 선교사는 폐허가 된 공소 건물을 마주해야 했다. 

 

예수성심상은 땅에 떨어졌고, 공소 지붕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공소 터에 의자 몇 개만 뒹굴고 있었다. 형체도 없이 지붕과 담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50명 남짓 공소 어르신들의 마음도 함께 무너졌다. 20년을 함께했던 공소 건물이었으니, 모두가 망연자실했다. 

 

쓰러진 마음은 잠시였다. 어떤 이는 “하느님 집이 왜 무너졌나?”며 비아냥대기도 했지만 공소 식구들은 바로 다시 일어섰다. 하느님의 집을 새로 지어야겠다며. 

 

해남본당 주임 김양회 신부가 신자들에게 공소 신축 기금 약정을 부탁하고 생활비를 내놓았다. 이 선교사도 많은 몫을 내놓았다. 신자들이 형편대로 약정을 했고, 서로 격려하면서 기금 마련에 나섰다.

 

2012년 태풍 피해 당시 모습.

 

 

땅끝공소의 역사는 태풍 전과 후로 나뉜다

 

어떤 이는 건축 헌금을 위해서 한 달 동안 인근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고령의 어르신들이 마늘밭, 대추밭에서 일하고 품삯을 받았다. 성당 텃밭 오이부터 시작해 곱창 돌김, 멧돌호박을 팔았다. 3년간의 노고와 주위 도움에 힘입어 2015년 6월, 새 공소 축복식을 가졌다. 이 선교사는 복잡했던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섭리라는 생각도 들어요. 무너진 건물은 진즉에 새로 지었어야 할 조립식 패널이었습니다. 1993년 완공해서 10년 정도 쓸 걸 예상했는데 20년을 사용했으니 이 참에 새로 지으라는 하느님 뜻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다시 세워진 건 건물만이 아니었다. 공동체가 새로 태어났다. 원래 한 가족 같았지만 역경을 딛고 다시 서기 위해 애쓰면서, 서로를 더 깊이 아끼게 됐다. 냉담하던 신자들도 공소를 찾아왔고, 고난에도 불구하고 더 명랑해진 신자들을 신기하게 여긴 새 신자들도 생겨났다. 

 

그래서 땅끝공소의 역사는 태풍 전과 태풍 후로 나뉜다.

 

이성은 선교사(왼쪽)가 4월 24일 사목회 간부들과 공소 성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공소는 가족이다

 

여느 공소들처럼 땅끝공소는 한 가족이다. 

 

공소회장 김금복(요한·76)씨는 이곳이 고향이지만 타지로 나가 살다 2002년 귀향했다. 서울에서 생활했으니 큰 도시 본당을 두루 경험했다. 그는 공소의 좋은 점을 이렇게 말했다.

 

“숫자가 워낙 적으니 서로 안 친할 수가 없지요. 서로 식구고 형제지간으로 여깁니다. 그러니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함께 해결할 수 있지요.”

 

울산에서 살다가 한반도를 가로질러 해남으로 귀촌한 이복례(아가타·69)씨는 선교분과장답게 땅끝공소 홍보에 입이 마른다. 

 

“울산에서 큰 본당에 다녔는데, 공소에 오니까 가족 같은 분위기가 정말 좋습니다. 공소가 불편하긴 하지요. 하지만 콩 한쪽도 나누는 공소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선교사의 기여

 

공소 창립 당시 초대회장을 맡았던 용준호(그레고리오·69)씨는 공소 지도자의 역할, 특히 평신도 선교사의 몫을 강조했다.

 

“공소를 세우고 자리를 잡기까지 선교사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공소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대소사를 잘 꾸려나가려면 구심점이 필요하지요.”

 

그런 면에서 이성은 선교사의 몫이 크다. 이 선교사는 땅끝공소와 1990년부터 3년 동안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2010년 다시 부임해 온 이 선교사는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는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에서 전교수녀를 파견했었다.

 

본당에 비해 열악하지만 교육이나 피정, 연수 등 신앙교육 프로그램은 비교적 탄탄하다. 이 선교사의 나름 소신은 가능한 모든 교육의 기회가 마련돼야 하고, 신자들 역시 열의를 갖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비신자 교리에는 예비신자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재교육 차원에서 참여한다. 특히 새 신자들은 2년 동안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한다.

 

공소 성당 내부.

 

 

젊은 피, 귀농과 귀촌 지원

 

3명으로 시작한 공소 신자 수는 현재 70여 명 정도다. 고령화는 모든 공소의 어려움이다. 하지만 ‘땅끝마을’의 명성으로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꽤 되고, 귀농과 귀촌 인구도 늘어나 희망은 있다. 빼어난 경관, 저렴한 농토와 주거비용이 장점이다. 이 선교사는 귀농과 귀촌 희망자들을 지원하는 것이 공소의 새로운 역할 중 하나라고 말한다.

 

“시골과 도시 신자들 간의 소통에 공소가 기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골에 와서 살고 싶어 하시는 분들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귀농을 원하는 신자를 위해서 거주할 집을 수소문하고 리모델링 공사를 돌봐 주고, 신자들을 포함한 지역 주민들과의 친교를 돕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소가 지원하고 있다. 귀농, 귀촌자 증가로 공소 공동체가 젊어져 40대 신자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무너진 성당을 다시 세운 땅끝공소는 시대와 지역의 특성에 맞는 새로운 공소의 생명과 사명을 고민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9년 5월 5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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