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수도 ㅣ 봉헌생활

봉쇄의 울타리에서: 야훼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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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21 ㅣ No.620

[봉쇄의 울타리에서] 야훼 이레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최민순 신부, ‘두메꽃’).

 

 

내 마음을 온전히 채워 주는 곳

 

관상, 봉쇄, 침묵, 수도원…. 이 단어를 듣거나 떠올리기만 해도 내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천주교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하느님을 찾아 얼마나 많은 종교를 들여다보았는지 모른다. 교리는 그럭저럭 좋았지만 어느 하나 내 마음을 온전히 채워 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에 가게 되었는데 ‘아! 이곳이다.’라는 확신이 들어 무작정 매일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였다. 특별히 미사와 성체는 온전히 나를 사로잡았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본 본당 수녀님은 그해에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그 뒤 매일 미사 참례와 단체 활동으로 기쁘게 살긴 했지만,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계속되었다. 기도 모임을 통해 알게 된 활동 수도회의 성소 모임에도 나갔다. 솔직히 관상 수도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내가 꿈꾸는 것이 관상 수도원에서의 삶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 수도원을 처음 방문한 날, 나는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며 신나게 수도원 자랑을 했다.

 

“그곳은 한번 들어가면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아요. 그리고 미사와 영성체, 성체 조배도 날마다 할 수 있어요.” 그 순간 가족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식사를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너, 미쳤어?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야?” 어리석게도 나는 모두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 뒤로는 조용히 수도원과 접촉하며 입회 날짜를 잡았다. 가족은 내가 너무 어리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입회를 반대했다. 그럼에도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제 인생은 제가 살 거예요. 결혼하면 수녀원에 들어갈 수 없지만, 이게 내 길이 아니다 싶으면 수녀원을 나와서 결혼할 수 있잖아요.”

 

또 엄마에게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엄마, 내가 수녀원을 세모로 생각했는데, 동그라미면 나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제야 엄마는 “그럼, 갔다가 오너라.” 하시며 나를 놓아주셨다. 그렇게 시작한 수도 생활이 어느새 스물다섯 해가 되었다.

 

 

우리를 움직이는 시계

 

수도원 안에서 우리를 움직이는 시계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시계다. 모든 수도회가 그렇겠지만 특별히 우리 ‘도미니칸’에게 공동생활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모든 것을 공유하고, 함께 의논하며 같이 움직인다.

 

이를테면 수녀들은 개인 시계를 소유하지 않은 채 종소리에 따라서 움직인다. 종이 울리면 기상하고 성당에 가며, 식당에 가고 공동체 오락 장소에 모인다. 우리에게 종소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려 주는 하느님의 목소리다.

 

「성무일도」의 아침 기도 응송에 이런 성구가 있다. “당신 뜻 안에 우리의 평화가 있나이다.” 또 예수님께서도 복음에서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정말 그분의 뜻을 따르고 충실할 때 우리는 마음에 평화와 질서, 조화가 있음을 체험한다. 더욱이 수도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은 성화의 길로 나가는 지름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상눈에는 바보 같고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말이다.

 

우리 삶의 중심은 전례이다. 미사와 「성무일도」 기도뿐만 아니라 생활 전체가 전례를 따라간다. 식탁을 꾸미는 것이나 식단은 물론, 대축일 전례에는 가장 좋은 수도복으로 갈아입는다. 이렇게 작은 것에서조차 전례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수도원의 분위기는 전례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

 

 

먹구름 너머엔 언제나 태양이

 

한번은 문지기 소임을 하면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했다. 한 재미교포 자매가 수도원으로 전화를 했다. 아버님이 곧 임종을 맞으실 것 같다며 임종 전에 꼭 세례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사 부탁했다. 인간적으로 보아 가망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우린 희망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자고 했고, 정말 열심히 기도했다.

 

어느 날 다시 전화가 왔다. 마지막 순간에 기적같이 아버님의 마음이 바뀌셔서 임종 세례를 받고 선종하셨단다. 아직도 그날의 기쁨과 감격이 생생하다. 내 기쁨이 이 정도인데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흡족하셨을까? ‘주님, 감사합니다. 한 영혼도 잃지 마소서.’

 

먹구름 저 너머엔 언제나 태양이 빛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믿든 믿지 않든, 그분의 현존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분은 우리 인간의 감각과 조건 너머에 현존하시면서 당신 사랑의 빛을 모든 이에게 비추고 계신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에게 말했듯이 ‘야훼 이레’ 곧 그분께서 손수 마련해 주신다(창세 22장 참조). 이 말씀에 희망을 걸고 오늘도 한 걸음씩 내딛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기쁨과 희망과 감사로 채울 것인지, 절망과 불평과 미움으로 채울 것인지 말이다. 적어도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을 긍정적인 사고로 행복의 씨앗을 뿌리며 살아 보자. 그러면 주님께서는 내일도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나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갈릴래아로 먼저 가셨네.” 「경향잡지」 독자들 모두의 마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희망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 정영숙 마리아 엘리사벳 - 도미니코회 천주의 모친 봉쇄 수도원 수녀.

 

[경향잡지, 2019년 4월호, 정영숙 마리아 엘리사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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