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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진정한 봄은: 미얀마의 친족 활동가 치리 자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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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23 ㅣ No.503

[인권 세상 사람들] 미얀마의 진정한 봄은 - 미얀마의 친족 활동가 치리 자하우

 

 

미얀마(버마)는 오랜 기간 군부 독재 아래 있다가 2010년 총선이 끝난 이듬해 군부 정권이 물러나면서 민주화의 길로 한 걸음 내디뎠다. 아니, 내디뎠다고 생각했다. 미얀마 인권의 상징이었던 아웅산 수치 여사가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고, 그녀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2012년 선거에서 승리해 드디어 봄이 찾아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다양한 민족 간의 갈등, 무엇보다도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은 미얀마의 인권과 민주화의 길이 여전히 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미얀마 친(Chin)족의 정체성

 

미얀마의 인권 활동가 치리 자하우(Cheery Zahau)는 미얀마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는 다수 종족인 버마족이 아닌 친족 출신이다. 미얀마에는 130여 개의 다른 민족이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친족은 그 가운데 하나다.

 

치리는 친족에 대한 미얀마 군부 정권의 탄압을 보며 인권에 눈을 떴다. 다양한 민족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민족을 ‘버마화’하려는 정책 때문에 어린 시절 친족의 역사와 언어를 배울 수 없었다. 그녀는 학생일 때 교사에게 이와 관련해 많은 질문을 했고, 이를 참지 못한 선생은 “이런 식이면 감옥이 네 코앞에 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99년, 치리는 친족에 대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국경을 넘어 인도로 갔다. 열일곱 살의 그녀는 그곳의 친족 여성 단체에서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2003년, 인도 정부는 2만 명이 넘는 친족 출신 미등록 난민을 다시 미얀마로 내몰았다. 그동안의 활동이 무력해지는 순간이었다.

 

친족은 군부의 탄압으로 자신들의 땅인 미얀마에서도 살지 못하고, 겨우 몸을 피한 인도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당시 국제 사회는 친족이라는 종족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치리는 친족의 이러한 현실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도에서 이어 가던 학업을 중단하고 인권과 캠페인, 정치에 대해 공부하며 인권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2004년, 그녀는 각기 다른 친족 여성 단체를 모아 ‘친족 땅의 여성 연합’(Women’s League of Chinland)이라는 연대 조직을 만들었다. 이 단체는 여성들에 대한 리더십 교육과 친족 공동체 대표들에게 인권 교육을 진행했으며, 국경 넘어 친 지역 사람들에게 인도적 지원을 했다. 무엇보다도 강제 노역, 종교 탄압, 특히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와 성폭력 등 군부정권이 친족에게 가하는 인권 침해를 기록하는 활동을 이어 갔다. 미얀마 국민 대부분은 불교 신자이지만 친족은 대다수가 그리스도교 신자이기 때문에 종교탄압도 만만치 않았다.

 

 

국제 사회에 친족의 상황을 알리다

 

치리가 친족 문제를 외부에 알리기 시작한 것은 2004년, ‘버마에 대한 대안 아세안 네트워크’(Alternatives ASEAN Network on Burma)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면서부터다. 그녀는 아시아 지역 시민단체가 모여 있는 태국의 방콕에서 활동하며 인도-미얀마 국경 지역인 미조람과 미얀마 내 친족 지역의 상황을 알리기 시작했다. 망명 중인 미얀마 출신 정치인이나 다른 나라의 정치인도 만났다.

 

2007년에 치리는 다른 친족 지도자들과 함께 영국 의회에서 친족의 상황에 대해 발언했다. 이것은 친족 활동가가 영국 의회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알린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친족의 상황을 알리는 일이라면 국제 연합(UN)과 유럽 연합(EU), 미국 등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미얀마-태국 국경의 치앙마이에서 인권 교육과 유엔 권리 옹호활동에 전념했다. 국경을 몰래 넘어 미얀마에 있는 사람들을 교육하기도 했고 사람들을 국경 너머로 데려오기도 했다. 국제 사회에 친족의 현실을 알리려면 현장과 떨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국제’보다 ‘현장’과 ‘인권’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친족의 역량 강화에 힘쓰던 치리는 2007년에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을 마주한다. 인도에서 난민으로 사는 친족 여성이 자신의 아이들을 그녀가 운영하는 장학 프로그램에 보낸 것이다. 길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며 연명하는 그 여인은 하루에 20루피(300원)를 벌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저녁을 주지 못했다. 그런 날이면 그 여인은 아이들을 이웃집에 보내 아이들을 불쌍히 여긴 이웃들이 음식을 나눠주게 했고,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곤 했다. 정부도 국제 사회도 버린 친족 난민 여성, 가난이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녔지만, 그녀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키고 싶다고 했다.

 

치리 자하우는 인권 활동을 하면서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이 여인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13년 만의 귀국, 달라지지 않은 현실

 

조국을 떠난 지 13년 만인 2012년, 치리는 다시 미얀마로 돌아갔다. 군부 정권이 물러난 조국에 희망을 안고 돌아갔지만, 현실은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날이 갈수록 언론의 자유는 통제되었고 정치적 자유도 제한되었으며 경제 상황도 나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난날의 인권 침해와 관련해 가해자들이 처벌받지 않는 현실은 인권 친화적인 미래로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언젠가, 미얀마에 민주화가 찾아오면, 그때 같이 손잡고 태국 국경을 걸어서 미얀마로 가자.”

 

2009년 어느 날, 태국-미얀마 국경 도시 메솟에서 만났을 때 치리와 한 약속이다. 망명 생활을 접고 치리는 미얀마로 돌아갔다. 하지만 국경을 넘어 함께 미얀마로 걸어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는 날, 미얀마에 진정한 민주화가 찾아오는 그날은 아직도 까마득해 보인다.

 

“오늘 최선을 다하면 내일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믿고 활동한다는 치리는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한국사회의 연대와 지지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미얀마에 진정한 봄이 찾아오는 그날까지 연대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 백가윤 요세피나 - 제주의 4·3사건을 세계에 알리는 다크투어 공동 대표.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교에서 인권학, 워릭대학교에서 인권법 석사 학위를 받았다. 태국에 있는 아시아 인권 단체인 포럼 아시아 동아시아 담당관과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8년 4월호, 백가윤 요세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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