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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 교회사 여행: 교회의 삶에서 보는 초기 일치 공의회들(4~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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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16 ㅣ No.937

[세계 교회사 여행] 교회의 삶에서 보는 초기 일치 공의회들(4~5세기) (1)

 

 

신경의 형성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철학이나 신학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증언했다. ‘예수께서는 성경에 나타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다(사도 2,36). ‘주님’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하느님께 붙여진 호칭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이름을 당신의 아들 예수에게 주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하느님과 가까이 계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잠언 8장에서 나오는 지혜처럼, 그분은 인간이 되시기 전에 이미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콜로 1,15). 요한복음서의 서문에는, ‘예수께서는 육화하신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이 말씀으로 인해서 세상이 창조되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말씀은 그리스어로 ‘로고스 λoγοs’, 라틴어로 ‘베르붐 verbum’이다. ‘로고스’라는 단어는 성경적인 용어로, 구약에서는 종종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자들은 로고스를 ‘생각’ 또는 ‘신적의지’라고 말했다. 거기에는 하나의 접합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신약성경 안에서 신경의 윤곽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 고백을 발견할 수 있다. 세례 예식과 성찬례에는 신앙 고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따온 구절들로 신앙을 천명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신앙을 이해시켜야만 했다. 그들은 먼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유일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일 수 있는가?’ ‘모든 변화를 초월하는 분이 하느님이시다라고 굳이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대체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은 분이 어떻게 하느님일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이 생겨났다. 그러나 신학적인 사고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런 다양한 사고들이 서로 일치되어야만 했다.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이 공의회였다. 공의회는 교회의 지도자인 주교들을 한데 모이게 했다.

 

주일마다 성당에서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한다. 이 신경은 신학적인 사고들이 서로 평화롭게 교환되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격렬한 논쟁을 통해서 정립된 것이다. 그런데 격렬한 논쟁이 반드시 교의 문제만을 가지고 발생했던 것은 아니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형성된 배경에는 민족과 문화와 지역 간의 갈등, 유배, 유혈 사태, 군대와 경찰의 개입 등도 있었다. [2017년 11월 12일 연중 제32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교회의 삶에서 보는 초기 일치 공의회들(4~5세기) (2)

 


아리우스 위기의 시작

 

2세기부터 그리스도교 사상이 다양한 방향으로 박차를 가하면서 전개되었다. 즉, 성경에 나타난 유일신 사상과 세례 때에 고백하는 삼위일체 신앙을 모두 보호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은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이들은 성부는 성자와 마찬가지로 수난을 받으셨다고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성부와 성자를 구분하고, 성부와 그분의 말씀(로고스)을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성자는 하느님이지만, 성부와 똑같은 하느님이 아니다. 성자(로고스)는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다. 예수는 인간이었는데, 성부에 의해 양자로 입양되어 하느님이 되셨다.” 몇몇 성경 구절들이 이런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저술가들은 그리스어와 라틴어 단어들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상당한 혼란을 초래시켰다.

 

교회에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같은 불일치는 지역적으로 매우 한정된 문제였다. 그러나 313년 이후에는 이런 용어상의 혼란이 로마제국 전역으로 급속하게 확대되어 나갔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발생한 하나의 위기가 곧장 동방에 있는 모든 교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본당 신부로서 많은 존경을 받던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아리우스는 앞선 시대의 많은 사람들처럼, 자신도 유일신 하느님(시작이 없으신 유일한 하느님)의 관념을 고수하려고 했다. 아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만일 이 하느님이 성부라면, 그것은 성부께서 어느 특정 시기에 성자를 낳으셨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성자에게는 시작이 있다. 그러므로 성자는 성부와 본성에 있어서 완전히 똑같지가 않고 성부에 종속되어 있다.’ 아리우스는 잠언 8장 22절과 요한복음서 14장 28절을 이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결국 예수는 사람들에게 그 자신의 모범을 따르라고 촉구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 인류는 언젠가 예수와 함께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주교는 이런 신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는 성부와 한 본성으로서 영원으로부터 계시는 분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말씀이 완전한 하느님이 아니라면, 인간은 완전하게 신화(神化, deficatio)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으로 육화하신 분이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

 

아리우스와의 만남과 토론이 효과 없이 끝나 버리고,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 열두 명이 파문당했다(318년). 물론 아리우스는 이 같은 단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리우스는 자신의 지지자들이 많이 있는 동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아리우스의 견해를 교회의 전통으로 간주했다. 그러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논쟁의 불길이 삽시간에 확 타올랐다. 신학 논쟁에 있어서 있을 수 없는 무례한 행동들이 극장과 장터에서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아리우스는 자신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서 글을 쓰고 노래도 지었다. 로마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에서 평화가 회복되기를 원했다. 아리우스 논쟁으로 인해 혼란이 가라앉지 않고 계속되자, 콘스탄티누스는 대규모의 공의회를 개최하기 위해서 주교들을 소집하기로 결심했다. [2017년 12월 3일 대림 제1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교회의 삶에서 보는 초기 일치 공의회들(4~5세기) (3)

 

 

니케아 공의회

 

앞선 세기에 몇 차례 시노드가 개최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로 모든 주교를 소집했는데, 니케아는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약간 남쪽에 위치한 비티니아 지방에 있었다. 그는 교회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제도인 ‘일치 공의회’를 수립했다. 바로 니케아 공의회가 최초의 일치 공의회이며, 20세기에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21번째 일치 공의회다.

 

니케아 공의회에 약 300명의 주교들이 참석했고, 그중 220명의 이름이 지금도 기록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주로 그리스 문화의 배경을 가진 동방에서 온 주교들이었다. 그들은 교의 논쟁에 대해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다. 니케아 공의회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전에 이렇게 많은 교회의 저명인사들이 동시에 한자리에 모인 적은 없었다. 주교들은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박해의 흔적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 그들은 격세지감을 느꼈다. 대부분의 주교들은 아리우스를 단죄하는 것을 승인했다. 하지만 주교들은 교의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해야만 했다. 그러자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는 자기 교회의 신경을 주교들 앞에 제시했다. 니케아 공의회는 이 신경을 받아들였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요청과 호시우스의 조언으로,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에 ‘동일 본질(homousios)’이라는 형용사를 추가시켰다. 다시 말해,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 동일한 본체라는 것, 즉 성자는 성부와 본체로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용어로 성부와 성자가 절대적으로 같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수정을 제안한 사람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였기 때문에, 아리우스와 함께 추방당한 두 명의 주교를 제외한 나머지 주교들은 모두 이 신경을 확증했다.

 

또한 니케아 공의회는 교회 규범의 몇 가지 조항들을 정리했다. 부활 대축일 날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지내고 있는 날짜로 채택하겠다고 공의회는 결정했다. 또한 공의회는 부인과 함께 사는 성직자들에 대해 몇 가지 규칙을 달았다. 5세기 초의 교회 역사가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주교들은 결혼한 성직자들에게 결혼 생활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스페인 지역에서 이러한 규정이 도입되었던 것 같다. 파프누티우스 주교는, 비록 자신이 독신 생활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교들의 이 같은 요구를 반대했다. 결국 니케아 공의회는 이 문제에 대해 주교, 사제, 부제들이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허락했다. 공의회는 박해로 인해 생겨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즉, 이단자들의 화해 문제(이단자들을 교회로 받아들일 때, 세례를 다시 주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 참회 예식 문제(배교자들에게 어떤 참회 절차를 밟게 하느냐 하는 문제) 등이 그것이다. [2017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교회의 삶에서 보는 초기 일치 공의회들(4~5세기) (4)

 

 

니케아 공의회 이후 혼란기

 

니케아 공의회에서 합의된 사항이 얼마 가지 않아서 위기를 맞았다. 많은 사람들이 ‘동일 본질’이라는 용어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어떤 사람들은 성부와 성자를 전혀 구별하지 않았던 이단자들이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곧이어 동방 교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니케아 신경을 거부했다. 328년부터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아타나시우스만 동방에서 유일하게 니케아 신경을 찬성했다. 그러나 서방 교회는 일반적으로 니케아 신경에 충실했다. 니케아 신경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왔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니케아 신경을 지지하면, 동방 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폭력 사태가 발생했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취해졌다. 아리우스를 복직시키는 것에 찬성하지 않던 아타나시우스는 티루스 시노드(335년)에서 면직되어, 게르마니아(독일)와 접경 지역인 트리어로 유배를 갔다. 니케아 신경을 온몸으로 수호했기 때문에, 아타나시우는 이후에도 네 차례나 더 유배 생활을 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이 재위하고 있을 때, 니케아 신경을 둘러싼 불협화음이 더욱 증폭되었다. 342년에서 343년까지 열렸던 사르티카(소피아) 시노드에서는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주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시노드 참석자들이 격노해서 갈라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351년부터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티우스는 일방적으로 아리우스주의만을 편애했다. 바로 이때, 로마의 리베리우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코르도바의 호시우스와 같은 서방 교회의 주교들이 동방으로 유배 갔다. 아리우스 문제로 인해 여러 차례 시노드가 열려 수많은 교령이 반포되었지만, 만족할 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359년,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성자는 성부와 유사하다.’라는 상당히 애매모호한 정식을 강압적으로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에 대해 히에로니무스는 “온 세상이 불평하고 신음하고 있다. 유사 본질이라는 단어 안에 아리우스 주의가 들어 있다니 참으로 경악스럽다.”라고 말했다.

 

아리우스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지역 교회마저도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당시 안티오키아에는 다섯 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 공동체들에서는 제각기 아리우스주의와 관련된 미묘한 차이가 있는 신학 용어들이 난무했다. 또한 로마 교회가 로마의 리베리우스 주교의 후임 주교를 선출해야 할 때, 아리우스주의로 인해서 분열되어 문제가 아주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두 명의 후보가 서로 주교가 되기 위해 싸웠는데, 결국 다마수스가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선거 투쟁의 결과는 엄청났다. 37명이 선거 투쟁 과정에서 죽었다. [2017년 12월 24일 대림 제4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교회의 삶에서 보는 초기 일치 공의회들(4~5세기) (5)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 아리우스 위기의 해결

 

아리우스주의로 야기된 혼란으로 인해 상당한 수준의 신학 발전이 이루어졌다. 신앙 정식을 표현하는 신학 용어들이 더욱 명백해졌다. ‘우시아 óυσια(본질)’와 ‘휘포스타시스 úπωστασιξ(위격)’에 대한 구별이 분명해졌다. 한 본질이라는 점에서 성부와 성자가 동일하다는 것과, 두 위격이라는 점에서 성부와 성자가 동일하다는 것 이 두 전문 용어로 인해 가능해졌다.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 주교는 신학적인 사고를 통해서 일차적으로 일치점을 도출해 냈다. ‘성령이 하느님인가?’ 하는 하나의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아리우스파들은 성령은 하느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 때문에 그들은 ‘성령에 대항해서 싸우는 사람들’이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바실리우스는 자신의 저서 『성령론』에서, 성령도 또한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는 점을 논증했다. 그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도 바실리우스와 같은 노선에서 글을 썼다. 바실리우스는 동방 교회의 다른 주교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설득했고, 아타나시우스에게 서방 교회와 긴밀한 유대를 맺으라고 요청했다.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주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방 교회가 겪고 있는 혼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로마의 다마수스 주교는 화해를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리우스파 발렌스 황제가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자(378년), 사람들은 그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서로마제국의 그라티아누스 황제와 동로마제국의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결국 신학적인 논쟁을 종식시키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그 논쟁으로 인해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소동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했고(380년),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동방만을 위한 공의회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선포된 신앙 정식을 수호하고, 최근에 일어난 여러 이단을 반대하기 위해 소집된 공의회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니케아 신경을 다시 확인하고, 니케아 신경에 성령에 대한 언급을 추가했다. “우리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는다. 성령께서는 성부로부터 발하시어, 성부와 성자와 함께 흠숭과 영광을 받으신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매 주일에 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작성되었다. 8세기에는 라틴 교회의 주교들이 여기에 그 유명한 ‘필리오퀘 filioque(그리고 성자에게서)’를 첨가시켰다. 그런데 이것이 11세기에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 교회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 교회를 갈라서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018년 1월 7일 주님 공현 대축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교회의 삶에서 보는 초기 일치 공의회들(4~5세기) (6)

 

 

그리스도론 논쟁의 시작

 

그리스도론에 대한 숙고와 토론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성부와 성자, 성령이 동일하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이루자, 사람들은 말씀의 신성과 예수의 인성이 어떻게 일치를 이루는지에 대해 설명하려고 고심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한데 반해, 예수님은 태어나서, 고통 받으시고 죽으셨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태어나시고, 배고프시고, 고통당하시고 죽으셨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지나치게 구별한다면, 말씀이 육이 되신 육화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시리아에 있는 라오디케아의 주교이며 아타나시우스와 절친한 친구였던 아폴리나리우스는 자신이 아주 복잡하고 난해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동시대의 인간학적 관점으로 예수를 이해한 그는, 예수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육체(살이 있는 몸)와 정신(영혼)으로 이루어졌지만, 예수 안에 있던 정신의 자리를 말씀(로고스)이 차지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했다. 예수 안에는 죄를 짓고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인간의 영혼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아폴리나리우스의 이 같은 생각이 그리스도 구원론을 크게 손상시킨다는 사실을 즉시 깨달았다.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대로라면, 그리스도가 취한 것만 단지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의 영혼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이 아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아폴리나리우스는 단죄를 받았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신학적인 흐름 또는 경향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도의 일치성을 강조하면서, 신학의 출발점을 로고스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리스도는 육을 취하신 말씀(하느님)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신성화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반면에 안티오키아에서는 그리스도 자체 안에 들어 있는 두 측면을 강조했는데 신학의 출발점을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두고서, 두 본성의 일치성을 신학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안티오키아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당시 전문 용어가 아직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퓌시스(Φυσις, 본성)가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안에는 단지 한 본성만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예수 안에 두 본성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서로 다른 관점의 차이가 곧바로 두 경쟁자의 날카로운 대립으로 이어졌다.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총대주교와 콘스탄티노플의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다. 약 428년경, 안티오키아 출신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느님을 낳으신 분, 하느님의 어머니, 천주의 모친)라고 부르는 대중적인 신심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테오토코스라는 용어가 성경에 나오는 용어가 아니었다. 따라서 마리아를 단지 인간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하여, 키릴루스가 그리스도의 일치성과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부르는 보편적인 신심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키릴루스는 그리스도 안에는 단지 한 본성만 있다고 주장하며 로마의 켈레스티누스 주교와 손을 잡고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했다(430년). [2018년 1월 14일 연중 제2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교회의 삶에서 보는 초기 일치 공의회들(4~5세기) (7)

 

 

에페소 공의회

 

이 시대의 역사가들은 격렬했던 에페소 공의회의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키릴루스 총대주교는 자신의 경쟁상대인 네스토리우스를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제거해 버려야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에페소에 도착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를 반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하고 위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키릴루스는 자신의 주교좌를 위협하거나 자신의 교리를 위협하는 자에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물리쳐 버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집트의 주교 50명을 대동했다. 그리고 엄청난 뇌물도 함께 가지고 왔다. 교회가 키릴루스를 비록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지만, 그의 모든 행동이 다 거룩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에페소 공의회를 개최하기로 한 날짜가 되었지만, 아직 많은 주교들이 에페소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래서 황제 사절단과 약 60명의 주교들이 공의회를 개최하는 것을 연기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공의회 개최를 반대했다. 그러나 키릴루스는 에페소 공의회를 개최했다(431년).

 

에페소 공의회에 참석한 200명의 주교들은 네스토리우스를 가리켜 ‘새로운 유다’ ‘이단자’라고 비난하면서 단죄했다. 그러자 군중들은 기뻐하면서 횃불을 들고 주교들의 숙소까지 행진했다. 순박한 민중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단자를 물리쳐 주셨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에페소에 도착한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은 대립 공의회를 개최하여 키릴루스를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키릴루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단죄했다. 상황이 아주 복잡해지자, 황제의 사절단은 양측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결국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루스를 동시에 면직시켰다. 그러나 키릴루스는 몰래 에페소를 빠져나와 승리자처럼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유배지에서 여생을 보냈다.

 

에페소 공의회가 결정한 교의 내용은 그야말로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에페소 공의회가 공식적으로 내린 결정이란 고작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단죄뿐이었다. 사실 에페소 공의회가 한 일은 니케아 공의회의 정통성을 재천명한 것과 그리스도의 일치성을 강조한 것뿐이다. 에페소 공의회는 당시 논란이 되었던 테오토코스1)  칭호에 대해 논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인정했다. 한편, 키릴루스를 반대했던 안티오키아의 요한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화해하기 위해 ‘일치와 화해 신조’를 제안했다(433년).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본성의 일치가 이루어졌다. 이 일치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동정녀를 테오토코스라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육이 되시고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

 

키릴루스는 요한이 제시한 ‘일치와 화해 신조’에 대해 열렬히 환영했다. 로마의 식스투스 3세 교황은 두 사람의 화해를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433년의 일치 신조’를 승인했다.

 

1) 테오토코스 : 하느님을 낳으신 분, 하느님의 어머니, 천주의 모친. [2018년 1월 21일 연중 제3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교회의 삶에서 보는 초기 일치 공의회들(4~5세기) (8)

 

 

칼케돈 공의회의를 개최하게 만든 논쟁

 

433년의 일치 신조에 대해 알렉산드리아뿐만 아니라 안티오키아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에 있던 극단론자들은 433년 일치 신조에 불만이 많았다. 세월이 지나자 에페소 공의회의 주역들이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시리아의 키루스 주교 테오도레투스와 콘스탄티노플의 나이 많은 수도자 에우티키우스가 다시 논쟁에 불을 지폈다. 테오도레투스는 ‘혼합 없는 일치’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이 있다는 주장만 계속해서 되풀이했다. 그리고 에우티키우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이 인성을 흡수해 벼렸다고 주장했다. 에우티키우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 인간과 똑같은 실체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플라비아누스 총대주교가 소집한 시노드에서 단죄받고 파문당했다. 그러자 에우티키우스는 로마의 레오 교황과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루스 총대주교에게 상소했다. 에우티키우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에우티키우스의 지지자들과 로마의 레오 교황만을 초대했다. 레오는 자신을 대신할 사절단에게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교의 서간』을 딸려 보냈다. 레오 교황의 교의 서간에는 주님 강생에 관한 자신의 견해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리스도는 어머니의 인간적 본성과 똑같은 인성을 지닌 참인간의 육신을 지녔다.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완전하게 지켜졌으며,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하나의 위격 안에서 일치되었다.” 라틴어로는 본성(natura)과 위격(persona)이라는 단어가 이미 오래전부터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었지만, 그리스어로는 이것이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았다.

 

에페소에서 개최된 공의회(449년)에 참석한 이들은 주로 에우티키우스의 지지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루스도 있었는데, 그는 날뛰는 수도자들의 무리를 대동하고 왔다. 그리스어를 할 줄 모르는 교황 사절단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험악하고 소란스러운 공의회의 한 회기 중에, 콘스타티노플의 플라비아누스는 총대 주교좌에서 면직을 당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는 두 본성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모두 면직을 당했다. 회의 중에 발생한 난동으로 인해 플라비아누스는 부상을 당했다. 결국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치안관들이 개입했으나 플라비아누스는 며칠 뒤에 사망했다. 테오도레투스는 이러한 사실을 로마에 호소했고, 레오는 크게 격노하며 이 공의회를 ‘에페소 강도 회의’라고 표현했다.

 

새로운 황제 마르키아누스는 종교 정책에 있어서 변화를 시도했고 레오 교황에게 공의회에 참석하여 사회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레오는 사절단을 특사로 보냈고 칼케돈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다(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처음으로 로마의 주교가 사회를 맡은 일치 공의회였다. [2018년 2월 4일 연중 제5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교회의 삶에서 보는 초기 일치 공의회들(4~5세기) (9)

 

 

교회의 조직과 교회들의 관계

 

일치 공의회가 단지 교의 정식만 선포한 것은 아니었다. 일치 공의회는 로마제국 안에 있는 모든 주교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각 지역 교회는 이미 자신들만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4~5세기에 개최된 공의회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조직화하는 표준 법령을 제정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주교의 서임과 관련된 법령, 개별 교회들 사이의 관계 규정과 관련된 법령 등이 논의됐다. 그러나 이런 작업이 항상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교회 조직이 정치적·행정적·경제적 조직을 모델로 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주교는 한 도시에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수장이었다. 각 도시들이 모여서 하나의 속주가 되었다. 속주의 수도의 주교는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행사했다. 대도시의 주교는 속주 시노드를 소집할 수 있었고, 속주에 있는 주교들을 인준하고 임명했다. 이 결정은 주교 선출에 있어서 주교들의 동료성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주교직에 있어서도 지역에 따라 주교들 사이에 서열이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주교좌를 바꾸고자 하는 유혹이 있었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는 이런 행위를 금지시켰다. 그리스도의 모상으로 세워진 주교직은 교회의 남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주교는 자신의 주교좌를 버리고 다른 주교좌를 찾아갈 수 없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바로 이 같은 규칙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좌를 포기해야 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중간 규모 도시의 주교였기 때문이다. 이 규칙은 후에 폐지되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주교좌들이 대주교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어떤 주교좌들은 특별한 역할을 해 왔다. 로마제국 내의 주요한 도시의 주교좌들은 복음화를 위한 전진 기지이기도 했는데, 그 도시로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카르타고가 있었다. 이 도시의 주교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던 속주 문제뿐만 아니라 속주를 초월한 훨씬 더 넓은 지역의 교회 문제에 개입해서 시노드를 소집하고 주교들을 임명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속주들은 더 큰 지역으로 그룹을 이루어 교구로 불렸다(4세기 말에는 교구가 15개). 동로마제국의 교구들 가운데서 수위권을 갖는 주교(때때로 총대주교라고 불림)들은 특권적인 역할을 갖고 있었다. 이런 역할을 갖고 있었던 교회가 바로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안티오키아 교회였다. 이 교회들은 대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정치적인 중요성 때문에, 로마의 주교 다음가는 명예로운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결정은 로마를 견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렉산드리아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오랜 시간 동안 로마제국과 교회 안에서 로마 다음으로 두 번째로 주요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주교좌는(모교회로서) 예루살렘 교회가 갖는 종교적인 역할 때문에, 특별한 영예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칼케돈 공의회는 콘스타티노플 교회에 방대한 지역을 다스리는 관할권을 줌으로써 콘스탄티노플의 입지를 확고하게 해 주었다. [2018년 2월 11일 연중 제6주일(세계 병자의 날) · 2월 18일 사순 제1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교회의 삶에서 보는 초기 일치 공의회들(4~5세기) (10)

 

 

로마와 수위권 강화

 

6세기까지는 오늘날 의미하는 ‘수위권’이나 ‘교황’이 없었다. ‘교황’이라는 단어는 모든 주교에게 통상적으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주교가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바로 ‘교황’이라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서방 교회에서 로마의 주교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이집트와 리비아 지역에서 갖고 있는 지위와 필적할 만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 교회는 처음부터 보편 교회 안에서 특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베드로와 바오로의 현존 때문이기도 했고, 또한 로마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로마의 주교들은 다른 교회들의 문제에도 직접 개입했다. 클레멘스 주교가 분열을 일으킨 코린토 교회에 질서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던 일(96), 빅토르 주교가 로마 교회와 같은 날에 부활 대축일을 지내지 않는 주교들은 파문했던 일(190년경), 스테파누스 주교가 이단자들에게 세례를 베푼 키프리아누스를 비판했던 일 등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로마 주교의 개입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왔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레네우스는 빅토르 주교가 취한 행동에 대해 좋지 않게 말했다.

 

다른 한편, 동방의 모든 교회는 항상 로마 교회에 영예로운 위치를 부여해 주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항상 로마 교회에 호소했다. 예를 들어, 아리우스 주의로 인해 위기가 닥쳐왔을 때(바실리우스), 또는 그리스도론 논쟁이 발생했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로마의 레오 교황에게 호소).

 

로마의 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위상이 부상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로마가 정치적으로 쇠퇴해 가는 것이 교회의 쇠퇴로 이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4세기 중엽부터 로마의 주교들은 자신들의 수위권이 베드로 사도로부터 기원한다는 것을 상기시켰고, 로마의 주교좌를 ‘사도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베드로 사도가 레오를 통해서 말했다.’ 칼케돈 공의회는 교의 결정에 있어서 로마 주교가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382년, 이미 로마 시노드가 했던 것처럼, 레오도 마태오복음서 16장 18~19절의 말씀을 이용해서 수위권에 대한 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전체 교회를 통치하는 자신의 권한과 의무를 인식했다. 다른 주교들은 그가 지닌 충만한 권한에는 못 미치지만, 단지 그의 사목적 관심을 함께 나누기 위해 요청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오에게 있어서, 로마의 주교는 보편 교회의 주교이며, 주교들의 주교이고 주교 권위의 원천이었다. 후대에 대 그레고리우스는, 교황은 주교들의 으뜸으로서 다른 주교들 가운데서 주교직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는 ‘주교단(collegiality, 동료성)’ 신학에 대해서 말하는데, ‘주교단’ 신학이란 오히려 동방 교회에서 말하는 ‘집단 지도 체제’ 신학이라는 표현과 더 가깝고, 이 표현이 훨씬 더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18년 3월 4일 사순 제3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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