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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려면: 대한민국의 구조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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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17 ㅣ No.1369

[경향 돋보기 -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려면] 대한민국의 구조악

 

 

구조악 하나. 헌법재판소

 

‘나치’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 끝난 독일에서 사회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그 흔적을 철저히 제거하는 데에 큰 공로를 세운 기관이 ‘연방 헌법재판소’이다.

 

2015년 독일의 작센 주,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던 한 남자가 ‘하일 히틀러’경례를 흉내 내는 동작을 하다가 무장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자동차 번호판에 차량 소유자가 원하는 알파벳 글자를 선택해 표기할 수 있지만 국가사회주의를 뜻하는 ‘NS’나 나치 친위대를 뜻하는 ‘SS’ 등의 글자는 사용할 수 없다. 나치를 추억하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한다.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의 성과는 그렇게 사회의 미세한 분야까지 영향을 미친다.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가 실제로 구성된 것은 제6공화국부터이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 헌법을 흔히 “87년 체제”라고 부른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가 정체성은 ‘5월 광주’와 ‘6월 항쟁’ 등으로 상징되는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성과로 1987년에 만들어진 헌법으로 뼈대가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유신’ 등 과거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 끝난 1987년 제6공화국 헌법을 제정하면서 우리도 같은 취지로 헌법재판소를 도입했다. 그러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대한 법외노조 합헌 해석 등에서 보듯 우리 헌법재판소가 지금까지 역할을 제대로 해왔는지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독일과 한국의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구조악 둘. 기부문화

 

2016년 국제통화기금(IMF)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11위다. 그러나 ‘인권’이나 ‘사회의식’ 등 선진국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많은 부분에서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정도로 취약하다.

 

그 예로,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각국의 ‘중산층’ 또는 ‘중간계층’에 관한 정의를 살펴보자.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에서 중산층은 “부채 없는 30평대 이상 아파트, 월 소득 500만 원 이상, 배기량 2천cc 이상 중형차, 예금 잔고 1억 원 이상, 해외여행 연 1회 이상”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그 반면, 영국의 옥스포드대학교가 내놓은 중산층의 기준은 “정당한 대결(페어플레이)을 할 것,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약자를 돕고 강자에 대응할 것, 불의 · 불평등 ·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등이다.

 

프랑스의 퐁피두 전 대통령은 공약집 「삶의 질」에서 중산층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하며,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남들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어 대접할 수 있어야 하고, ‘공분’에 의연히 참여하며, 약자를 돕고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며,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꾸짖을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폐해가 가장 심각한 나라로 알려진 미국에서도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하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고,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있어야 한다.”

 

한국사회의 기부문화는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해 매우 부끄러운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예를 들자면, 미국 사람 89%가 기부 활동에 참여한다. 그 반면, 한국 사람  60%는 기부금을 한 푼도 내지 않으며 50% 정도는 기부 활동에 일체 참여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다. 또한 미국은 국민 1인당 연간 기부금이 200만 원가량 되는데 우리나라는 10만 원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부자가 아니더라도 굶어 죽지 않을 만큼 사는 사람이라면 자기보다 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활동에 참여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이다. 하물며 어떤 지표로 비교하더라도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어릴 때부터 일등을 놓친 적이 없는 부유층 자제들이 조기 유학을 갔다가 헌혈이나 자원봉사 경력이 없어서 명문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자, 학교에서 봉사활동 시간 점수 제도를 만들어 강제로 사회적 약자를 돕게 하는 한국의 교육 제도가 외국에서는 코미디 소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국사회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구조악 셋. 경제

 

200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경제가 어려운 때일수록 노동자 서민의 경제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위기를 벗어나는 지름길이 된다. 노동자와 서민의 경제 수준을 높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일 뿐 아니라, 부자 감세보다 훨씬 더 경기 부양에 효과적이다.”

 

2007년 말 미국발 금융위기가 예견되자 각국 정부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노동자 임금을 높여 경제위기를 벗어나자.”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도 “기업 이윤의 3분의 1을 노동자에게 배분하자.”고 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경영진에게 돈더미를 안기는 것은 한 나라의 사회적 균형에서 신뢰를 파괴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각국 정상들이 노동자 서민의 경제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기에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집권 초기에 ‘전 국민 임금동결’ 정책을 구상했다가 한국개발연구원(KDI)으로부터 ‘무슨 바보 같은 발상이냐?’는 식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비지니스 프렌들리’(기업 친화) 정책을 선언하면서 집권 기간 내내 부유층과 투기꾼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감세정책을 추진했고, 취약한 사회 안전망을 더욱 후퇴시켰다. 또한 금산분리정책을 완화하며, 재벌기업의 방송 경영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등 최소한의 자본 통제마저 풀었다.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가운데 이와 같은 정책을 취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했다.

 

한국 경제는 ‘수출’보다 ‘투자’의 부가가치 유발계수와 취업 유발계수가 더 높고, ‘투자’보다 ‘소비’의 부가가치 유발계수와 취업 유발계수가 훨씬 더 높은 상황에 들어선 지 오래다. ‘기업이 얼마나 많이 수출하느냐?’ 하는 것보다, ‘국민이 얼마나 많이 소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경제 성장에 미치는 효과가 훨씬 더 커졌다는 뜻이다. ‘경제 민주화’나 ‘소득 주도 성장’ 논쟁은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는 다양한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노동시장 구조개혁’ 등 박근혜 정부의 정책은 정확하게 그 반대 방향의 시도라는 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이다. 전 세계가 서민의 경제력을 강화하는 거대한 흐름에 들어섰을 때에도 한국만 혼자 거꾸로 가고 있는 현상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구조악 넷. 지식인

 

한국의 지식인과 학자들은 다른 나라들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지나치게 보수적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대 경제학과 30여명의 교수들 가운데 비주류 경제학자가 단 한 명도 없고(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에 있는 경영학자 200여 명 중에 96%는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한국노동연구원장에 임명된 한 대학 교수는 “모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어야 한다.”거나 “헌법에서 노동삼권을 빼야 한다는 것이 제 소신”이라고 밝혀 문제가 되었다. 결국 박사들로만 구성된 그 연구기관의 노동조합이 파업을 벌이는 요인이 되었다.

 

2015년 초에는 한 경제 신문사가 마련한 좌담회에서 한국 경제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인 현 경제학회 회장과 차기 회장이 마주 앉아 “모든 근로자를 계약직으로 뽑아 한국 기업을 다시 뛰게 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한국의 지식 인프라는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시카고 학파 학자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보수적 성향 일색이다. ‘미국보다도 훨씬 더 미국적인’ 이러한 현상이 한국사회에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구조악 다섯. 보수

 

본디 ‘보수’는 아주 나쁜 개념이 아니다. 중세 서양 귀족들의 가치체계였던 ‘보수’의 특징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전통을 중요시하고, 지식을 존중하며, 예의범절을 지키고, 품위를 갖추며, 애국심에 불타는 사람들. 명문가일수록 전쟁이나 내란 등 나라가 위기에 놓였을 때 맨 먼저 달려나가 목숨을 바친 선조들이 많다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바로 그러한 정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 역사에서는 조선의 선비들이 이를테면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을 보면 임금 앞에서 과거를 치르는 장면이 나온다. 초시 등 몇 단계를 거쳐 대과 복시에서 선발되는 서른세 명에 포함되어야만 임금이 친히 주관하는 어전 과거인 ‘전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과거 시험장에서 써낸 화선지 답안의 길이가 대개 10미터가 훨씬 넘었다. 앉은 자리에서 한나절 동안 박사학위 논문 하나 정도를 써낼 수 있는 지식의 소지자들이었던 셈이다.

 

그 학문의 자부심으로 자연스럽게 품위가 우러나왔고 우국충절의 애국심에 불타는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순신 장군이나 김구 선생 같은 분들이 우리 역사 속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에서 스스로 보수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국가안보’를 가장 많이 강조하면서 누구보다도 병역 기피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보수라 칭한다. 국회의원 자제들의 병영 면제 비율은 일반인의 아홉 배나 되고, 일부 재벌 자제들의 병역 면제 비율은 열 배도 넘는다. 다른 나라들에서 볼 수 없는 비정상적 보수세력이 한국사회에 형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구조악 여섯. 역사

 

우리가 근대국가를 건설한 과정은 다른 나라들과 달랐다. 조선사회의 모순을 깨닫고 직접 사회제도를 고쳐가며 근대 민주 공화제 대한민국을 건설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제강점기라는 비정상적 방식으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었다.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제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평등한 시민사회를 건설할 기회를 빼앗겼다.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들은 해방된 뒤 과거 청산작업을 통해 훼손된 도덕성과 가치관을 바로 세우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우리는 해방된 뒤 분단과 전쟁이라는 비운의 역사를 거치면서 그 소중한 작업을 해내지 못했다.

 

인권의 상징인 프랑스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7천 명 이상의 나치 협력자들에게 사형선고를 하는 등 철저하게 과거를 청산했다. 독일도 역사적 과오인 ‘나치’에 대해 철저히 그 뿌리를 없애는 과정을 수십 년 동안 지속해 왔다. 하다못해 일본도 전쟁이 끝난 뒤 군국주의자 전범들을 처형하는 과거 청산작업을 거쳤지만(그들이 지금 있는 곳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이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해방된 뒤 구성된 경찰 간부들의 80%는 일제 경찰 출신들이었다.

 

식민지 협력자들은 해방 뒤에도 사회 상층부에 진입하여 정치, 경제, 언론,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를 장악한 반면에, 독립운동을 했던 정의로운 사람들은 어떤 권력도 갖지 못했다. 동족을 배신했던 식민지 부역자와 그 가족들이 해방 뒤에도 집권에 성공하여 근대화와 경제개발과 언론 · 교육 등 사회 모든 분야의 주역을 계속 담당한 근대국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 왜곡되고 비틀린 역사가 어느덧 한 세기를 지났다. 일제 식민지 40년, 분단 70년, 그 와중에 군사독재 정권 30년의 세월을 겪으며 건설된 나라가 어떻게 상식이 통용되는 정상적 사회일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설명한 많은 비정상적 현상의 중요한 원인은 왜곡된 역사 발전과정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전 세계에서 열한 번째로 큰 경제적 규모를 갖춘 경제 선진국에서 무당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에나 가능할 법한 국정농단 사태가 발생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그 왜곡된 역사의 발전과정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촛불의 열기는 단순히 이명박·박근혜 정부 몇 년 동안의 실정에 대한 국민의 분노 때문이 아니라 더 긴 세월 동안 우리 사회에 축적되어 왔던 역사적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여망의 분출이다. 촛불집회에서 ‘적폐청산’이라는 구호가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정치다. 그동안의 잘못된 정치가 한국사회의 교양인들에게 정치에 대한 냉소적 분위기를 만들어왔으나 사실 “정치적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만큼 강력한 정치적 입장도 없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경제학부 장하준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세계화의 주된 추진력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주장하듯 기술이 아니라 정치, 곧 인간의 의지와 결정이다.”라고 했다. 기술의 발달만으로 행복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선택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폴 크루그먼도 「미래를 말하다」에서 이렇게 밝혔다. “중산층이 중심이 되는 사회는 경제가 성숙해진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동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현재의 국면에서 사회 구성원 각자가 선택하는 정치적 실천이 우리가 후손들에게 어떤 사회를 물려줄 것인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 하종강 - 성공회대학교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23년간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으로 일했고, 연구소가 문을 닫은 뒤 대학으로 옮겨 강의를 하고 있다. 성공회대학교 제8대 노동대학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7년 3월호, 하종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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