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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36: 청주교구의 새로운 기틀을 다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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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12 ㅣ No.432

[추기경 정진석] (36) 청주교구의 새로운 기틀을 다지며


하느님의 집 하나씩 짓고 성가정도 꾸준히 늘고

 

 

- 교육사업에 관심을 두었던 정진석 주교는 유치원 증설에 앞장섰다. 1973년 2월 진천본당 부설 성모유치원 제1회 입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정진석 주교.

 

 

정진석 주교의 사목 목표는 교구와 본당의 재정 자립이었다. 아무리 좋은 지향을 둬도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정 주교는 외국의 원조를 받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필요하다면 외국에 여러 번 편지를 보내는 일도 적지 않았다. 1974년 1월부터는 메리놀회의 교구청 운영 지원금이 중단됐다. 

 

정 주교는 어려운 사정을 신자들에게 직접 호소하고, 주보나 교계 신문을 통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외국의 원조를 받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재정 자립에 관한 신자들의 생각이 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신자들의 협조와 희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교구는 오랫동안 22개 본당에 머물러 있었다. 신자 수가 늘어 성당을 건립해야 했지만 사제가 부족한 것은 물론 새 부지 매입과 건축 등 재정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정 주교는 신부들에게 교구 사정을 소상히 설명했다. 그리고 한 사제가 하나의 성당을 건립하자는 제안을 한 뒤 이를 신부들과 논의했다. 맨 먼저 나서 성당을 짓겠다고 한 이들은 정 주교의 동창이었다. 동창 신부가 나서자 후배들도 이어서 성전 건립에 뛰어들었다. 최고참 사제들이 성전 건립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으니 후배들도 자연스레 선배들의 뒤를 따라 애를 썼다. 정 주교는 그 점이 너무너무 고마웠다. 청주교구 설정 20주년과 30주년 사이에 본당이 많이 늘어난 이유는 이렇게 사제들이 자발적으로 성당을 짓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당 수가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 정진석 주교는 착좌 초기 교구 재정이 많이 어려웠지만 사제단과 함께 성당 건설에 힘썼다. 1976년 12월 교구 가톨릭회관 축복식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는 정진석(가운데) 주교.

 

 

그중 하나가 가난한 무극본당이었다. 무극본당은 오웅진 신부가 건립했는데, 정 주교는 무극본당 신자들 앞에서 호소했다.

 

“식사 때 보리밥에 풋고추에 된장 찍어 드시지요? 오 신부도 꽁보리밥에 풋고추에 된장 찍어 먹으면서 삽니다. 오 신부도 굶어 죽지만 않게 해주세요.”

 

그러면 신자들도 어려운 살림에 십시일반 나누고 도우며 성당을 건립했다. 그 당시 참 어렵게 살면서도 하느님의 집인 성당을 짓는 데는 신자들이 두 팔을 걷고 나섰다. 정 주교도 돈이 조금씩 생기면 성당 짓는 데 보태라고 보내줬다. 

 

정진석 주교는 부임 초부터 몇 가지 숙제를 안고 있었다. 그 내용을 교구장 취임 2주년을 맞아 ‘경향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밝혔다. 정 주교가 교구장의 중책을 맡고 처음 염두에 둔 것이 교육사업이었다. 그래서 먼저 유치원을 증설했다. 교구 내 몇 개의 교구 재단 학교가 있었지만 새로 시작할 교육사업은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교회 학교의 육영사업은 내외 여건으로 봤을 때 시의(時宜)를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 대신 일본에서도 크게 활용되고 있는 본당 부속 유치원 교육에 중점을 두기로 방침을 세웠다. 가톨릭 유치원에 대한 일반의 평이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본당 유치원은 평생 가톨릭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기에 성장한 후에도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23개 본당 중 5개 본당에 있던 유치원을 10개 본당으로 늘렸다. 

 

또 하나는 병원 운영 문제였다. 옥천의 성모병원은 청주교구 최초의 가톨릭 종합병원이었다. 1720㎡(520평) 규모의 건물을 미완성인 채로 인계받았는데, 교구에서 운영할 형편이 못돼 고심하던 중 다행히 서울대교구 가톨릭중앙의료원에서 적자를 감수하고 운영을 맡기로 했다.

 

교구 묘지도 신자들의 숙원이었다. 정 주교가 교구장에 부임하자마자 노년층 신자들이 묘지 설립을 부탁했다. 그래서 묘지 부지로 46만 3000㎡(14만 평)의 산을 매입해 연령회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정 주교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은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장호원 매괴초등학교를 사정상 폐쇄하는 것이었다. 교육청의 협조로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을 한 사람의 실직자도 내지 않고 모두 공립학교에 흡수시킨 것이 큰 보람이었다.

 

1980년 12월 신축 교사 축복식을 위해 충추 성심농아학교를 방문한 정진석 주교가 아이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충주 성심농아학교에는 현대식 기숙사 건물을 세웠다. 정 주교도 불우한 농아들을 위해 사재를 털었다. 그리고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더욱 충실하고자 옥천의 ‘천당의 문 양로원’을 청주의 ‘예수성심원’(양로원)에 흡수시켰다. 옥천 양로원 자리에는 청주교구 최초로 분원(分院)이 아닌 수도회 본원(가르멜회)이 진출했다. 이는 전임 교구장 파디 주교의 염원이기도 했다.

 

정 주교는 무엇보다 먼저 평신도 재교육에 힘을 쏟았다. 평신도 지도자 교육과 성가정 운동이 두 축을 이뤘다. 평신도 교육은 ‘처음부터 다시!’ 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보자는 의미였다. 각 본당과 공소 회장들을 대상으로 한 재교육이 큰 성과를 거뒀다. 평신도 지도자 교육을 마친 후에는 성가정 운동을 전개했다. 성가정 운동은 가족 전체가 신자인 가정의 경우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을, 외짝 신자 가정은 가족 전체의 신자화를 목표로 했다. 

 

정 주교가 신경 쓴 것 가운데 하나가 순교자 현양 사업이다. 충청북도에서 순교자가 많이 나왔으나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 정 주교는 전담 신부를 임명하고, 순교자 현양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고자 했다. 신자들에게 신앙인의 선조를 찾는 것은 의무이며, 신앙은 교리 지식이 아닌 순교 정신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부들에게는 청주교구 관할 지역에서 12년간 악전고투하며 전교하던 최양업 신부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대학이 다섯 개나 있는 교육 도시 청주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학생운동은 각 단위 대학 학생회가 조직될 만큼 발전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모일 장소가 없었다. 가톨릭센터 건립이 과제로 떠올랐다. 

 

당시 보좌 신부가 필요한 본당은 11곳, 새 본당이 필요한 곳도 5개였다. 당장 16명의 사제가 필요했다. 사제 부족 현상을 해소하는 것은 여전히 청주교구 최고의 과제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2월 12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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