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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7: 마카오에서 조선 선교를 희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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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05 ㅣ No.801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7) 마카오에서 조선 선교를 희망하다


조선의 양떼가 목자 원한다는 이야기에 “조선으로 가겠다”

 

 

- 조선 신자 암브로시오와 동료들이 교황에게 올린 탄원서 한문본. 1824년 혹는 1825년 조선 신자들이 교황 레오 12세에게 교황에게 쓴 편지로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대목구 설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중요한 편지이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6년 2월 5일 아시아 선교를 위해 보르도 항구에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출항했다. 1658년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교황청 포교성성 직할 사도생활단으로 설립된 파리외방전교회는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던 중국과 인도, 코친차이나(현 베트남 남부) 등지에 설정된 대목구를 주로 관할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선교 활동을 보다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여러 대표부를 운영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교황청 포교성성과 연락 사무를 맡은 ‘로마대표부’와 해외 선교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극동대표부’였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는 1685년 중국 광동성에 제일 먼저 설치됐다가 1732년 포르투갈 식민지인 마카오로 이전했다. 이후 1847년에는 영국 식민지인 홍콩으로 이전했다. 이때부터 홍콩대표부는 총대표부로 승격해 싱가포르(1856년)ㆍ상해(1864년)ㆍ사이공(1901년)대표부를 설치, 운영했다. 또 1867년 이집트 수에즈 운하가 개통하면서 선교사를 태운 배 출항지가 프랑스 마르세유로 일원화돼 이곳에 1879년 대표부를 설치했다. 마르세유대표부는 선교사들의 출항 업무를 전담할 뿐 아니라 아시아 각지에서 보내온 선교사들의 우편물들을 접수하는 역할을 했다.

 

수에즈 운하 개통 이전 프랑스에서 마카오로 가는 뱃길은 보르도와 르 아브로 항구에서 출항하는 두 경로가 있었다. 브뤼기에르와 페레올 주교 등은 보르도 항을 통해, 베르뇌 주교와 모방ㆍ메스트르 신부 등은 르 아브로 항을 출항해 마카오로 갔다. 비록 두 항구에서 달리 출항했지만, 선교사들을 태운 배들은 아프리카를 우회해 희망봉을 돌아 인도 고아를 거쳐 동남아시아 말라카 해협을 지나 마카오에 도착하는 해로를 이용했다. 항해 기간은 계절풍의 영향에 따라 평균 7~9개월이 걸렸다.

 

“저는 무사합니다. 더 이상 뱃멀미를 하지 않게 됐습니다. 이제 토하지도 않고 위 통증도 사라졌습니다. 처음 배를 타면 누구나 겪는 고통을 잘 견뎌냈습니다. 육지에 상륙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제대로 걷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배가 심하게 움직이는 까닭에 저희는 게처럼 옆으로 걸어 다닙니다. … 우리 배는 직항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거친 후 목적지에 닿을 것입니다. 제 글씨가 비뚤비뚤하지요. 배가 흔들려서 그렇습니다. … 목적지까지 아직 먼 길이 남아 있습니다.”(브뤼기에르 주교가 1826년 4월 10일 항해 중 부모에게 보낸 편지)

 

이처럼 선교사들의 고생스러운 항해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확연히 줄어들었다. 1867년 수에즈 운하 개통 이후 선교사들은 마르세유에서 출항해 지중해를 가로질러 수에즈 운하를 거쳐 홍해와 인도양, 말라카 해협을 지나 홍콩으로 갔다. 항해 기간도 1~2개월로 단축됐다. 수에즈 운하 개통 이전에 이 해로를 이용해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가 있다. 바로 성 시몬 마리 안토니 유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Bretenieres, 1838~1866) 신부였다. 그는 파리에서 기차로 마르세유에 간 후 배를 타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도착, 기차로 수에즈를 지나 그곳에서 홍콩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가 마르세유에서 홍콩까지 걸린 기간은 40일이었다.

 

현재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선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자리.

 

 

브뤼기에르 신부가 마카오에 언제 도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826년 12월 11일 마카오를 떠나 선교 임지인 페낭에 1827년 1월 12일 도착했다고 하니 분명 1826년 12월 초에는 마카오에 도착한 듯하다. 따라서 브뤼기에르 신부는 보르도 항에서 마카오까지 7~8개월간 항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마카오에서 소임지인 페낭으로 가기 전에 인도네시아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 잠시 기착한다. 여기서 그는 카르카손교구 총대리인 귀알리 신부에게 편지를 써서 처음으로 “조선 선교를 하고 싶다”는 속내를 밝힌다.

 

“제가 마카오에서 만나 뵌 포교성성 경리부장(움피에레스 신부)이 새 서신(1824년 조선인 신자 암브로시오와 동료들이 레오 12세 교황께 올린 탄원서)에 관해 제게 언급했습니다. 경리부장은 매우 열심하고 용감한 프랑스 신부가 조선으로 갔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조선행 성소를 받은 선교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많이 고생하는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을 많이 개종시키고 몇 해 안 되어 순교의 영예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선 교우들을 도우러 가고 싶은 열망이 여러 번 있었지만, 제게 맡겨진 소임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선으로 가려고 제 소임을 버리는 것은 변덕스러운 게 아닐까요? 그렇지만 포교성성에서 유럽 신부들에게 호소하듯이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호소한다면 저는 즉시 조선으로 출발하겠습니다.”(브뤼기에르 신부가 1826 말~1827 초 바타비아에서 카르카손교구 총대리 귀알리 신부에게 보낸 편지)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파견될 때 본부 장상들로부터 선교 임지를 통보받기도 하지만 마카오까지 온 다음 극동대표부가 배정한 임지로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모방 신부처럼 선교 임지에 도착한 후 자원해 임지를 바꾸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마카오에 도착해 보면 막상 자신이 배속받은 선교지가 박해로 갈 수 없는 상황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또 극동대표부의 판단에 따라 선교사가 긴급히 필요로 하는 선교지로 발령을 내릴 수 있었기에 선교사들의 임지는 항상 바뀔 수 있었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신부도 샴대목구로 발령을 받았지만, 마카오에 도착한 다음 조선 교회의 상황을 듣고 임지를 바꿔 조선으로 가길 희망한 것이다.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 교회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으나 조선 선교를 희망한 것은 1826년 마카오 포교성성 극동대표부(경리부)에서 1824년(혹는 1825년) 조선 신자들이 성직자 영입을 호소하는 레오 12세 교황에게 올린 탄원서 내용을 움피에레스 신부로부터 들은 후부터임을 확인할 수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2월 5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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