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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시복 대상자 약전: 솔라노 헤르만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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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18 ㅣ No.1599

[시복 대상자 약전] 솔라노 헤르만 수사

 

 

덕원 수도원, 1909년 5월 19일 생,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교구 출신

세례명 : 루돌프

첫서원 : 1933년 5월 13일

한국 파견 : 1936년 10월 11일

소임 : 건축 담당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12월 13일, 만포 관문리 수용소

 

 

솔라노 헤르만(Solanus Hermann, 1909-1950) 수사는 1909년 5월 19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교구 일러베르크(Illerberg) 부근 탈(Thal)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철공 기술자 피우스 헤르만(Pius Hermann)과 어머니 마리아 린더(Maria Linder) 슬하에는 그를 제외하고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루돌프(Rudolf)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는 가정과 학교에서 충실한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1931년 2월 10일에 작성되어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수도원에 제출한 자필 이력서에는 그의 청소년 시절이 간략히 요약되어 있다. “1923년 6월 25일부터 비이센호른(Wiessenhorn)의 도장(塗裝) 장인 하베레스(Haberes) 씨에게서 도제 수습을 시작했습니다. 도제 수습을 마치고 1926년 9월 17일 기능사 시험을 통과한 후, 1927년 11월까지 하베레스 씨의 조수로 일했습니다. 1928년 5월부터 지금까지는 도장 장인 빌헬름 가이슬러(Wilhem Geissle)r 씨 댁에 있습니다. 이제 저는 수도소명을 선택하기 위해 저의 직업을 포기합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한 솔라노 헤르만 수사는 1932년 5월 12일 동료 스물세 명과 함께 수련기를 시작했다. 그는 이듬해 5월 13일 첫서원을 했고 1936년 6월 7일 종신서원을 발했다. 그는 평소 아프리카 선교를 꿈꾸었으니 1936년 10월 11일에 한국으로 선교 파견되었다. 그는 상트 오틸리엔 기차역에 걸린 ‘환송! 머나먼 한국 땅의 독일 문화 전달자들’이라는 현수막을 보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고국과 이별했다. 덕원 수도원에 도착한 그는 제화공 루도비코 피셔(Ludwig Fischer, 裵, 1902-1950) 수사에게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덕원 수도원의 독일인 수도형제들과 익숙한 라틴어 전례 그리고 적합한 소임은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덕원 수도원의 건물들은 아주 조급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도장 장인이 해야 할 일은 늘 많았다. 1941년 3월 21일 그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후고 라인하르트(Hugo Reinhart, 1884-1969) 신부에게 보낸 엽서에 그의 고충이 엿보인다. “선교지역 일은 신부님께 보고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 무엇을 이루어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좋은 자재도 부족하고 노임도 3년 전에 비해 서너 배 올랐습니다. 그저 제가 건강하고 날마다 할 일이 있으니 더 바랄 게 없습니다.”

 

후일 덕원 수도원의 농장 관리인 에지디오 아이히호른(Agidius Eichhorn, 方, 1905-1995) 수사가 솔라노 헤르만 수사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수도생활을 이렇게 적혀 있다. “솔라노 수사는 모두에게 늘 친절하고 남을 도와주려고 애쓴 형제였습니다. 특히 저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전시에는 선교 지역에서 건축 공사를 못했기 때문에 도장공들은 한가한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동안 솔라노 수사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농장 일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특히 과실수 가꾸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그가 가꾼 과실수들은 작황이 좋았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평온한 시간이었습니다.”

 

잠시 누렸던 평온의 시기는 깨졌다. 해방 이후 북한에 소련의 붉은 군대가 진주하고 공산주의 세력이 득세했다. 1948년 9월 9일 북한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자 사람들은 덕원 수도원의 최후가 가까워졌음을 예감했다. 1949년 5월 8일과 10일 두 차례에 걸쳐, 야음을 틈타 수도원에 들이닥친 정치보위부원들은 독일인 선교사 전원과 한국인 사제들을 체포했고, 같은 달 14일에는 나머지 한국 수사들과 덕원 신학교의 신학생들을 해산하고 수도원을 폐쇄했다. 솔라노 헤르만 수사도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 인민교화소에 구금되었다가 8월 5일 자강도 전천군에 위치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작달막한 체구였지만 튼튼하고 강인한 인상을 가졌던 그는 수용소에서도 숯 굽는 일같이 가장 힘든 작업을 맡았다. 매일 저녁 지친 몸으로 돌아온 그는 제일 먼저 경당으로 향했다. 그의 남루한 옷차림과 깊고 고요한 평정을 간직한 검댕투성이 얼굴은 옥사덕 수용소의 상징으로 후일 생존자들에 기억에 오랫동안 남았다.

 

1950년 전쟁을 일으켜 초반에 승기를 잡던 북한 인민군은 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압록강까지 후퇴하자, 그와 동료들은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겪었다. 죽음의 행진은 10월 25일 만포에 이르렀다가 압록강을 건너 10월 27일 집안(集安)에 멈추었고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쟁에 개입함에 따라 다시 압록강을 건너 만포로 이어졌다. 만포 관문리 수용소에서 보낸 시간은 극한의 절망과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1950년 11월 6일 카누토 다베르나스(Canut d’Avernas, 羅國宰, 1884-1950) 신부, 11월 15일 그레고리오 조르거(Gregor Sorger, 金, 1906-1950) 신부, 12월 12일 힐라리오 호이스 수사(Hilarius Hoiß, 許喜樂, 1888-1950), 그리고 이튿날 솔라노 헤르만 수사가 선종했다. 당시 의사였던 디오메데스 메퍼트(Diomedes Mefert, 1909-1998) 수녀는 그의 최후를 이렇게 전한다.

 

“솔라노 수사님은 방공호 구석 자리에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그나마 먹을 만한 것을 좀 구할 수 있는 부엌에서 일을 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그런데 부엌에서 무언가 해로운 것을 먹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장 점막에 심한 염증을 일으켰고 약한 심장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12월 13일 이른 아침에 수사님이 그르렁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급히 가 보니, 이미 의식이 없고 병자 성사만 겨우 받았습니다. 솔라노 수사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서운 충격이었습니다. 바로 전날 힐라리오 호이스 수사님을 땅에 묻었기 때문입니다. 솔라노 수사님의 죽음은 당시 아무런 희망이 없던 우리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 셈이었습니다.” 

 

* 자료 출처 -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북한에서의 시련(분도출판사, 1997년), 분도통사(분도출판사, 2010년), 덕원의 순교자들(분도출판사, 2012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6년 겨울호(Vol.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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