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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19: 가난한 신자들을 돕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탓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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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09 ㅣ No.1597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19) 가난한 신자들을 돕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탓하다


성사 베풀기 위해 3~4일 위험한 산길 여행도 마다치 않아

 

 

- 최양업 신부는 박해를 피해 산속 깊은 곳에서 곤궁하게 사는 신자들을 가엽게 여겨 신자가 단 2~3명뿐인 마을까지 찾아가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사진은 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을 묘사한 배티성지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리길재 기자.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방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 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

 

최양업 신부는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에 숨어 곤궁하게 사는 신자들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 박해를 피해 부모를 따라 강원도 김화 산골에서 화전 생활을 했던 최 신부는 누구보다 그 삶의 비참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통해 육신의 고단함을 잊고 신앙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려 자신에겐 단 한 시간도 쓰지 않고 교우촌을 찾아다녔다. 

 

신자들은 박해자들이 쉽게 근접할 수 없도록 높은 산으로 들어가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최 신부는 3~4일씩 기를 쓰고 험한 산길을 걸어 40~50명의 신자에게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했다. 최 신부는 이런 교우촌을 127개나 맡아 사목했고 해마다 6000여 명의 신자에게 성사를 집전했다.

 

최 신부는 방문하는 교우촌마다 꼬박 이틀을 머물렀다. 그는 상복 입은 양반 행세를 한 서양 선교사와 달리 늘 밤에 교우촌을 방문했다. 외교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는 교우촌에서 하루 동안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줬다. 그리고 다음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체성사를 거행한 후 새벽 동이 트기 전에 그곳을 떠났다. 최 신부는 단 한 명의 교우도 놓치지 않는 착한 목자였다. 그는 며칠을 걸어가 신자가 단 3명뿐인 마을을 찾아가 그들에게 성사를 베풀기도 했다.  

 

물론 최 신부가 혼자 사목 방문을 다닌 것은 아니다. 늘 복사와 함께 사목 여행을 했다. 병인박해 순교자 조화서(베드로, 1815~1866) 성인이 최 신부의 복사였다. 그가 처음부터 최 신부의 복사였는지 알 수 없으나 최 신부의 임종을 지켜본 마지막 복사임은 분명하다. 그는 최 신부가 1850년대 중후반부터 말을 타고 다녔기 때문에 마부 노릇까지 했다. 최 신부와 조화서는 사목 여행을 할 때마다 악인들 때문에 늘 경무장 상태로 다녔다. 최 신부 일행이 두려워한 악인들은 처음에는 신자들 사이에서 형제처럼 착하게 어울리다가 나중에는 약탈하는 이리로 변해 박해를 일삼는 이들이었다. “한 교우촌에서 걸어서 이틀 걸리는 다른 교우촌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눈이 많이 쌓여 걸음이 더디어져서 이틀이 지난 후에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 읍내로 들어가 주막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그 교우촌을 가기로 했습니다. … 우리는 한밤중의 매서운 추위를 피하고자 유숙했던 주막에서 쫓겨나 매를 흠씬 두들겨 맞았습니다. 옷이 찢겨 반나체 되어 강추위로 몸이 꽁꽁 얼어붙었고, 길은 쌓인 눈 때문에 무릎까지 푹푹 빠졌습니다. 능욕과 고통으로 몸과 마음이 기진맥진했습니다.”(1859년 10월 11일 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최양업 신부가 귀국할 당시 조선 교회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여파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방이 궁핍투성이였다. 많은 여성 교우들이 고향을 버리고 도망가 낯선 고장에 몸을 피했다. 또 정처 없이 방황하다 외교인의 첩이나 종이 되고만 경우가 허다했다. 기아와 추위로 산골 교우촌에서 죽어 나간 신자들은 헤아릴 수 없었다. 

 

최 신부는 귀국 후 스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조선 사회 상황을 “거룩한 우리 종교를 실천할 자유가 조금도 없다”고 알렸다. 그는 “신자들이 항상 전전긍긍 떨고 있으며, 사람들은 공연히 우리를 미워하고 마치 흉악범처럼 멸시한다”고 전했다. 

 

최 신부의 보고처럼 당시 조선 사회는 어느 누가 천주교를 믿으면 온 가족과 친척, 이웃들이 들고일어나 그를 공격하고 인간 중에 가장 부도덕한 자로 여겨 저주를 퍼부었다. 또 갖은 방법으로 천주교 신자를 괴롭혀 결국 그를 멀리 쫓아내고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여교우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악랄하고 노골적이었다. 천주교 신자를 제외하면 누구 할 것 없이 동정생활을 불효로 매도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이가 정결을 지키는 삶을 위선에 불과한 것으로 야유했다. 외교인들은 동정생활을 위해 결혼하지 않거나 박해로 남편을 잃은 여교우들을 대놓고 보쌈해 성폭행하거나 첩으로 삼는 몹쓸 짓을 했다. 그래서 천주교를 믿으려고 준비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입교를 망설였다.

 

최 신부는 당시 신자들의 고달픈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부모, 배우자에게서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속 골짜기로 들어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만이라도 마음 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 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

 

최 신부는 이처럼 곤궁한 처지에 놓인 가난한 신자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자신을 비관했다. 최 신부는 무능한 자신에 대한 원망을 가득 담아 스승에게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저 박해자들이 마침내 교회의 진리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양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주 하느님을 기쁜 마음으로 자유롭게 섬기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같은 편지에서)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월 8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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