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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 가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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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0-22 ㅣ No.49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 가이오(1914-1988)


(1) 돈보다 풍류를 좇던 가게 아저씨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는 김금룡(가운데).

 

 

김금룡은 1914년 전라남도 무안군 망운면에서 자작농인 김정선(金正善)과 김광임(金光任)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달리 호기심이 많아 늘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는 천성 때문에 한적한 고향 마을에서 농사짓고 살 수 없었다. 무안에서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0년대에 한창 번성하던 도시인 목포로 나가 장사를 시작했다. 스무 살이 되던 1934년에 독립운동가인 박내홍(朴來洪)과 신범사(아가타)의 딸인 박기남(朴欺南)과 혼인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 바친 장인

 

1897년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에서 한약국 아들로 태어난 박내홍은 3·1운동 직후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항일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박중래(朴重來)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 그는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기원필(奇元必), 허옥(許玉) 등과 함께 전라북도 남원에서 지역 유지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했다. 1920년 일제에 검거된 그는 참혹한 고문에도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고 버티다가 1921년 형무소에 갇혔다. 1922년 출옥한 그는 전라남도 하의도와 목포 등지를 전전하며 계속 투쟁하다가 1935년 또다시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린 뒤에 다시 징역 1년을 살았다.

 

3ㆍ1 운동 만세를 부를 때부터 1936년 출옥할 때까지 17년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고문 후유증과 형무소에서 얻은 병으로 1937년 6월 28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위인 김금룡이 목포시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가 김금룡이 천주교 신자가 된 뒤에 목포 산정동본당 묘지로 이장했다. 1995년 박내홍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자, 2000년 10월 19일 외손자 김성옥이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하고 부인 신범사를 합장했다.

 

김금룡의 장인 박내홍.

 

 

전라남도 무안 사람인 김금룡이 어떤 이유로 목포에 아무 연고도 없던 경상남도 하동 사람이자 당시로서는 기피 대상일 수밖에 없던 독립 운동가의 딸과 혼인했는지 알 수 없다. 당사자들은 물론, 양가 부모들도 이에 대한 그 어떤 말을 남기지 않았고, 후손들도 물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금룡은 일가가 몰락한 독립 운동가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지만,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신하거나 독립투사들을 특별하게 도와준 흔적 역시 남아 있지 않다. 자기와 가족이 굶주리지 않고 이 나라 서남단인 목포에서 서북쪽의 평양까지 찾아가 대동강에서 물놀이하는 사진까지 남길 정도로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그 시대의 보통 남자였다.

 

1935년 김금룡은 외아들 성옥(聲玉)을 낳았다. 박내홍의 유일한 손자인 성옥도 1995년 뒤늦게 자기 외할아버지가 국가로부터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을 때까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전혀 몰랐다. 이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 가족들은 일제의 강점기 내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으며, 해방 뒤에도 대우는 고사하고 멸시마저 받은 이들이 많았던 사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으리라…. 성옥의 이름은 친할아버지가 지었고, 한자는 외할아버지가 붙였다. 성옥은 이런 자기 이름 뜻대로 평생을 살고 있다. 김성옥은 1960~1970년대를 풍미했던 연극 배우다.

 

유리가게를 운영하던 김금룡은 일제 말기에 친척의 도움으로 광주 비행장 공사 감독이 됐으나, 일제가 곧바로 패망하는 바람에 무일푼으로 돌아왔다. 고향 무안에서 곡식과 고구마 등을 가져다 팔기도 했지만, 장사꾼으로 살기에는 천성적으로 부족한 사람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하면 해소될 때까지 매달리고 늘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놀기 좋아하는 그는 장사를 거의 아내에게 맡겨 놓고 밖으로만 나돌았다. 그는 신앙인이 되기 전에 목포 산정동본당과 같은 시기에 건립된 양동 예배당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새로 산 구두에 한껏 멋을 내고 그 예배당에 몇 번 가기는 했지만 그리 오래 다니지 못하고 그만뒀다.

 

 

장모의 영향으로 입교


- 김금룡의 장모 신범사(아가타).

 

 

그 이후 종교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김금룡이 천주교 신자가 된 데는 장모 신범사와 아들 성옥의 영향이 컸다. 신범사는 신혼 초에 잠시 남편과 함께 살았으나, 독립운동을 하려고 집을 떠난 이후 남편이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같은 집에서 산 적이 없었다. 사내다운 총각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신범사의 아버지가 관상(觀相)과 수상(手相)은 물론이고 버선을 벗기고 족상(足相)마저 보았다고 한다.

 

나라를 구할 인물이라는 판단이 들자 곧바로 그를 사위로 맞아들인 장인의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나라를 구할 인물이었기에 독립운동에 뛰어든 그는 1차 옥고를 치르고 출감했을 때 이미 결딴난 고향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국지사들의 도움을 받아 외진 섬인 하의도에 은거했다. 바람결에 아들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단신 무일푼으로 아들을 찾아가 육지로 데리고 나왔다. 고향에 있던 며느리와 손녀, 손자도 불렀다. 목포에서 한약방을 열었으나 늘 감시받고 수시로 잡혀가 고문을 받았으므로 제대로 운영될 리 없었다.

 

 

외손자 손을 잡고 성당 찾은 장모

 

오갈 데 없게 된 장모 신범사는 어린 아들과 함께 사위집에 얹혀살 수밖에 없었는데, 박내홍이 오랜 수감 생활과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죽고, 아들마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머나먼 하동에서 목포로 아무 대책 없이 왔기 때문에 친구도 이웃도 없는데다 남편도 아들도 일찍 여읜 외로운 그를 딸과 사위 부부는 극진히 모셨다.

 

그러나 밥을 굶지 않고 따뜻한 방에서 편히 잔다고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1897년 설립돼 1951년 경동본당이 분할될 때까지 목포에서 유일한 성당이었던 산정동본당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하여 매일이다시피 그곳에서 살았다.

 

그녀가 성당으로 향할 때는 늘 외손자 성옥의 손을 잡고 있었다.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 외에는 언제나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외할머니를 따라 외손자도 기도하기 시작했고, 이런 성옥은 열 살 때인 1944년 토비아로 다시 태어났다. 김금룡은 장모와 아들이 성당을 다니는 것을 반대하지도 않았지만, 천주님을 믿을 마음이 전혀 없었고 아내에게 성당에 나가라고 권유하지도 않았다. 가끔 장모와 아들이 성당에 함께 다니자고 간곡하게 청했지만,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았다.

 

이름 앞에 최초라는 수식어를 비롯해

다른 수식어가

여럿 붙는 성당이지

 

전남에 최초로 지어진,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발상지인

 

육이오 때 행방불명된

안 바드리시오,

고 도마, 오 요한의 순교비가 있는

 

이런

성스러운 성당이

나를 초대하다니

 

내가 다칠까 봐

나를 부드러운 손으로

받아내는

 

오십 년 전에

광주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이었다는

성당이지

 

- ‘산정동 성당’, 김재석

 

 

연재를 시작하며

 

김금룡은 대단한 경영인도 아니고, 전국적으로 알려진 활동가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찾아낸 문헌 기록은 이태호 기자가 1991년 11월 17일부터 12월 2일까지 평화신문에 연재한 기사가 전부였다. 1년 동안 그를 찾아다녔지만, 불행히도 아직까지 여전히 안개 속이다. 그러나 그동안 찾아낸 김금룡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이었다. 세례성사로 주님의 아들로 거듭 태어나고, 성모님의 마음을 깨달은 다음부터는 그분처럼 조용히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다가 기쁘게 죽음을 맞이한 착한 교우였다. 외아들 김성옥(토비아)과 인생 만년에 신앙의 아들 노릇을 했던 목포 용당동본당 안현균(시몬), 압해도 신장공소 정해영(루치오)과 김해준(마태오), 산정동본당의 산 증인 정성금(폴리나), 전 레지오 마리애 광주 세나뚜스 단장 김영대(루도비코) 등을 통해 김금룡의 삶과 죽음은 우리 가슴에 잔잔히 스며들 것이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23일, 박명진 시몬(프리랜서 작가, 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강사, 전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상근전문위원)]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 가이오(1914-1988)

 

(2)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

 

 

목포의 광주 지목구청 전경.

 

 

목포에 성당이 세워진 것은 1897년이었다.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Gustave Charles Marie Mutel, 閔德孝)가 1896년에 전라도 지방을 사목 방문하면서 나바위본당과 목포본당을 설정하기로 결심한 결과였다. 당시 목포는 본당을 설립할 정도로 교우들이 많았던 것은 아니지만, 제물포(인천), 원산, 부산에 이어 개항되었으므로 당장보다는 앞날을 바라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1911년에 조선대목구가 서울과 대구 대목구로 분리될 때 목포는 대구대목구 관할이 되었다. 1933년에 전라남도 지역을 아일랜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관할하기 시작하면서 목포본당이 감목대리구좌 성당이 되고 아일랜드인 선교사들이 사목하였다. 그러나 1941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아일랜드인 선교사들이 연금되거나 추방되자, 목포본당에는 김재석ㆍ박문규ㆍ최덕홍 신부 등 한국인 성직자들이 부임하였다. 이 한국인 사제들이 사목하던 시기에 장모 신범사와 아들 성옥, 김금룡 부부가 세례를 받은 것이다.

 

김금룡이 성당으로 발길을 내딛기 전까지 비록 자신은 비신자였지만, 장모와 아들의 신앙생활에 전혀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1944년에 산정동본당 주임이었던 박문규(미카엘) 신부가 제주본당으로 발령받아 목포를 떠날 때 김금룡은 아들 성옥의 손에 10원을 쥐어 보냈다. 당시 교회는 본당 신부들이 발령을 받아 다른 본당으로 떠날 때 각자 형편대로 성의껏 갹출하여 전별금을 드렸다. 그러나 자기 가족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지만 본인은 아니었고, 더구나 일제 말기의 극심한 경제난 때문에 장사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어려운 시절에 소상인에 불과한 그가 10원을 선뜻 내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당시 목포에서 가장 유명한 평신도 유지가 전별금으로 낸 15원에 이어 그가 보낸 액수가 두 번째로 많은 돈이었다고 한다.

 

 

장모 앞에 손을 든 사위

 

이런 김금룡의 속마음을 헤아린 아들 성옥과 장모 신범사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김금룡 부부의 천주교 입교를 권유하기 시작했다. 해방을 전후해서 아들 성옥이 몇 번인가 정색을 하고 아버지에게 간청했다.

 

“아버지 성당에 다니세요.”

 

장모도 옆에서 거들었다.

 

“자네, 이제 그만 뜸들이고 그만 가세나.”

 

거듭되는 재촉에도 금방 응답하지 않고 기나긴 시간 심사숙고하던 김금룡이 마침내 손을 들고 말았다.

 

“그래, 성당 다니면서 천주님을 믿겠다.”

 

김금룡은 아내를 데리고 장모와 아들을 따라 어색한 발걸음을 성당으로 옮겼다. 당시 예비신자들에 대한 교리 교수 방법은 오늘날처럼 교회가 예비신자들을 따로 모아 일정 기간 교리를 이론적으로 가르치고 나서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었다. 천주님을 믿고 성당을 다니려는 이들은 복음의 인도자들을 따라 성당에 들어갈 때와 안에서 갖추어야 할 태도부터 시작하여 신자로서 제반 예절을 배우고, ‘십이단’이라고 했던 주요 기도문과 함께 154조목으로 되어 있는 ‘성교요리문답’을 능숙하게 줄줄 다 외울 수 있어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이 몸에 배었을 때 사제로부터 ‘찰고’(察考)라고 하는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과정을 다 마친 김금룡과 아내 박기남은 1946년 8월 14일에 훗날 대구 대목구장이 된 최덕홍(요한) 신부로부터 가이오(카이오), 간지다(칸디다)라는 세례명을 받고 주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세례를 받은 김금룡은 천주교 신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천성이 부지런한 그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나면 바쁜 일이 있건 없건 곧바로 집을 나가 해가 진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신자가 된 뒤에도 이런 그의 습관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일어나자마자 아내와 함께 조과(아침 기도)와 묵주기도, 그 날의 특별기도 등을 다 바치고 나서야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갔다. 세례를 받은 뒤 몇 해 동안은 그의 존재가 산정동본당에서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천성이 부지런하고 가만있지 못하는 그의 성격 탓에 신자들과 서서히 친해져 갔으며, 일상에서도 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 쉬지 않고 움직였듯이 천주교 신자로서도 자기가 할 수 있고 꼭 해야 할 일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정치적으로 계속 혼란스럽고, 경제 사정은 날로 어려워지던 1950년 6월에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침하여 7월에는 목포까지 점령하고 말았다. 이해 여름 목포에는 인민군들의 총칼과 정치보위부원들의 매서운 눈길을 피해 산속 토굴이나 지하에 숨어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공산당원들은 자기들의 뜻에 반하는 이들을 찾아내어 단 한 번의 선동적인 재판으로 반동분자라는 낙인을 찍은 다음 죽창으로 무참히 찔러 죽였기 때문이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선전하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당시 광주 지목구청이 있던 목포 역시 벗어날 수 없었다.

 

 - 김금룡이 산정동성당 십자가를 지킨 공로로 현 하롤드 신부로부터 받은 십자고상.

 

 

양떼를 떠나지 않은 목자

 

위험한 목포를 떠나 피난가라는 동료 선교사들의 간곡한 권유를 제4대 광주지목구장 브레난(Patrick Brennan, 安) 신부는 단호히 거절했다.

 

“지목구장인 나의 사명은 나의 관할 지목구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사태가 급해지면 섬으로 피신할 터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악마의 발톱이 점점 그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와도 끝내 자기가 맡은 양떼를 떠나지 않았다. 산정동본당 주임 쿠삭(Cusak, 高) 신부, 보좌 오브라이언(J. O’Brien, 吳 )신부와 함께 인민군에게 끌려가 8월에 피살되고 말았다. 착한 목자인 그가 마지막으로 마실 잔에는 순교의 피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의 끊질긴 박해

 

공산당의 박해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십자가가 있는 성당이나 예배당은 미군 비행기들이 폭격하지 앉는다는 사실을 아는 인민군들은 산정동성당을 징발하여 막사로 사용했다. 교우들의 여론을 좌우할 원로 신자뿐 아니라, 인민군에 징발될 위험이 있는 젊은 남자 교우들도 그들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야 했다. 

 

중학생인 성옥은 어느 날 아버지가 없는 집에 들어와 무심코 벽장을 열어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모르는 사람들이 발가벗은 몰골로 벽장 안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성당을 접수한 인민군들은 거추장스러운 물건에 불과한 성당 안팎에 있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몸체를 뽑아 산 속에 팽개쳐 버렸다. 성당에 들어갈 수 없어 숨어서 몰래 지켜보던 교우들이 밤중에 이 예수님의 몸체를 찾아낸 다음 서로 돌아가며 감추었는데, 자신도 쫓기는 처지인 김금룡이 자기 집 벽장에 모셨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집에만 모시고 있으면 위험했으므로 8월에 다른 신자의 집으로 십자가를 옮겼다. 김금룡은 또한 산정동 본당에 파견되었던 수녀 가운데 한 명을 한복으로 변장시켜 자기 집에 감춰 둠으로써 인민군 치하를 무사히 넘기도록 했다.

 

1950년 10월에 목포가 수복되자 광주지목구장 서리 겸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에 임명된 현 하롤드(W. Harold Henry, 玄海) 신부가 산정동성당의 십자가를 지키고 수녀를 보호한 공로로 김금룡에게 아름답고 실용적인 십자고상을 수여하였다. 이 성물은 갈색 케이스 안에 야광 십자가가 들어 있는데, 금으로 도금된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혀 있다. 일정한 곳에 모셔 둘 때는 케이스 안에 있는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고, 케이스 양쪽 날개 끝을 촛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 아름답고 고귀한 십자가는 김금룡 집안의 가보 1호가 되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30일, 박명진 시몬(프리랜서 작가, 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강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 가이오(1914-1988)

 

(3) 전쟁의 상처를 치유할 새로운 군대

 

 

목포본당 성체거동.

 

 

목포항은 조선 세종 때 진(鎭)으로 출발한 군사 기지로 아주 적은 수의 어민들만 살고 있었다. 19세기 말에 개항지가 됐지만, 이 땅을 삼킨 일제는 본격적인 식민지 수탈에 필요한 항구로 변모시켰다. 목포는 유달산을 중심으로 산 아랫자락의 좁은 평지 몇 군데를 빼놓고는 가파른 바위 언덕이 대부분이다. 오늘날까지 주거지를 넓히는 방법은 인접 지역을 편입하거나 바다를 메우는 것이다. 그러나 바다를 메워 만든 평탄한 매립지는 모두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말았다. 이 땅의 주인이었는데도 그런 좋은 부지를 차지할 수 없던 조선인들은 유달산의 좁은 골짜기나 울퉁불퉁한 바위에 기대어 움막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거주지를 확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마저도 기댈 수 없던 이들은 공동묘지의 유골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목포는 인근의 무안, 영암 등지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있지만, 거의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이들이 섞여 살았다. 삼백(쌀, 면화, 소금)의 도시답게 면화공장과 정미소가 많았으며, 가까이는 압해도부터 멀리는 제주도까지 서남해 도서 지역의 중심지여서 다양한 일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날품팔이꾼뿐 아니라, 술집 접대부나 유곽의 창녀로 전락해 모진 목숨을 부지하는 이들도 많았다. 아무리 바위에 달라붙은 이끼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텼지만, 소수의 성공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늘 고달프게 살았다. 일제가 36년 동안 한반도의 모든 고혈(膏血)을 빨아냈기 때문에 광복이 됐어도 경제 사정은 쉽게 나아질 수 없었다.

 

설상가상 6ㆍ25전쟁으로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무리 우리가 근검한 민족이라고 해도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회생할 수 없을 만큼 빈사지경에 이르렀다. 한국 교회는 미국가톨릭구제회의 도움을 받아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밀가루, 옥수수 가루, 깨끗이 손질한 헌 옷들을 나누어줬다. 지난날 이 구호물자를 얻으려고 성당으로 몰려온 이들을 멸시하고, 천주교회가 구호물자로 신자들을 사고 있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36.40ㄴ).

 

아직도 “가난은 임금도 구제할 수 없는 일” 또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국민과 가톨릭 교회는 지난날 어쩔 수 없이 얻어먹었지만, 늘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를 가난하게 하고 아프게 만든 불행을 떨치고 일어섰으며, 이제는 우리보다 더 어려운 나라와 교회를 지원하고 있지 않은가?

 

- 산정동본당에서 거행된 봉헌식.

 

 

지역 사회의 빛이 된 목포본당

 

현 하롤드 신부와 동료 선교사들은 전쟁의 참화로 신음하는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을 사랑과 희생으로 치유했다. 늘 굶주림과 헐벗음에서 벗어날 수 없던 이들에게 식량과 옷가지만 전해 준 것은 아니었다. 몸의 양식뿐 아니라 마음의 양식도 결코 굶겨서는 안 될 소중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도 목포본당은 교우들이 계속 늘어나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아 모든 것이 어려웠던 1951년에 경동본당을 분당하고, 외국 교회와 미군의 도움과 목포 교우들의 노력 봉사로 성당도 지었다. 1955년에는 성 골롬반 병원을 개원해 목포뿐 아니라 전라남도 지역민, 특히 가난한 이들의 아픈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 또한 가난 때문에 진학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때 도움을 받았던 많은 학생이 착하고 훌륭한 인재로 성장해 이 나라와 민족에게 그때의 빚을 갚았다.

 

 

레지오 마리애, 사랑의 꽃을 피우다

 

현 신부가 이 땅에서 이룩한 업적 가운데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고 꽃을 피운 것은 결코 작은 공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신심 단체는 1921년에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파트리치오 성당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담당 사제인 토휘 신부, 공무원이었던 청년 프랭크 더프(Frank Duff)와 20대 여성 15명이 ‘자비의 모후’라는 이름으로 첫 모임을 개최함으로써 시작됐다. 이들은 매주 수요일 정기 회합을 하고 2명씩 짝을 지어 병원을 방문해 환자들을 위로했는데,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아일랜드뿐 아니라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창단한 지 얼마 안 돼 세계적인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 성장한 레지오 마리애는 이 땅에도 씨앗이 뿌려져 아일랜드에서 비롯된 지 32년째 되는 1953년 5월 31일 목포 산정동본당과 경동본당에서 첫 열매를 맺었다. 지목구장 현 신부와 산정동본당 주임 안(T. Moran) 신부가 산정동본당의 ‘치명자의 모후’,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단원들과 함께, 그리고 경동 본당에서는 ‘죄인의 의탁’라는 이름의 쁘레시디움 단원들이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와 함께 이 기도의 시작과 끝에 있는 다음과 같은 힘 있고 희망찬 노래로 첫 까떼나(Catena Regionis : 레지오 단원들이 회합을 하는 중에, 그리고 매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기도문. ‘사슬’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기도는 회합할 때 회의록에 서명하는 것과 폐회 시간 중간 정도에 전 단원들이 일어서서 바침)를 바친 것이다.

 

“먼동이 트이듯 나타나고,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며,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저 여인은 누구실까?” 

 

당시 현 신부는 레지오 마리애가 지향하는 “선교사의 도구”(교본 제4장 7 참조) 정신과 조직 원리를 따를 때 이 땅의 선교가 효과적으로 전개되고, 성모 마리아의 모성적 감화가 이 땅에 복음을 선포하는 데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또한 6·25전쟁의 참화로 많은 것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이 나라 백성이 성모 신심과 덕행을 바탕으로 불행을 딛고 일어설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레지오 마리애를 발족시키고 적극적으로 확산시킨 것이다. 김금룡은 이렇게 시작된 첫 쁘레시디움 가운데 하나인 ‘치명자의 모후’의 창단 단원이었다(그가 쁘레시디움 단장이 된 시기는 기록이나 증언마다 일정치 않아서 확정할 수 없다).

 

목포에서 시작된 한국 레지오 마리애는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954년 2월 15일에 청주, 1955년에는 원주ㆍ전주ㆍ서울ㆍ춘천ㆍ제주 등지로 확장되었다. 6·25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죽은 상황에서 환자 방문과 상가 돌봄은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중요한 활동이 되었다. 연령회가 없는 본당에서는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연령회가 있더라도 꼭 필요한 일들을 찾아 자기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은 선교와 냉담자 회두에도 큰 성과를 거뒀다. [평화신문, 2016년 11월 6일, 박명진 시몬(프리랜서 작가, 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강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 가이오(1914-1988)

 

(4) 삶의 방향을 바꾸어 버린 레지오 마리애

 

 

레지오 단원 선서식을 마치고(오른쪽 앞에 앉아 있는 이가 김금룡).

 

 

레지오 마리애라는 명칭과 기원을 시작으로 회합 순서, 활동 방법과 주의 사항, 관련 교회법과 가톨릭 교회 교리 등을 자세히 수록하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은 이 사도직 단체를 유지, 발전시키는 견고한 중심축이다. 그런데 한국 레지오 마리애는 처음부터 우리말로 완전하게 번역된 교본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전쟁 중이던 피폐한 상황에서 완벽하게 준비하고 시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 검토 부탁 받아

 

교본은 1955년 3월 15일 현 신부가 김익진에게 부탁하면서 본격적으로 번역되었다. 목포의 대단한 부자 아들로 태어난 김익진은 성 프란치스코처럼 살기로 결심하고 산정동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목포를 떠났다. 영어ㆍ일어ㆍ중국어 등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던 그는 경상도로 가서 교육자, 문필가로 활동하였다. 1년 동안 이 교본의 번역 작업에 매달린 그는 우리나라보다 먼저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한 일본과 타이완 교회의 레지오 마리애 교본을 참조하여 영어 원본을 거의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었다. 1956년 6월에 「레지오 마리애 직무 수첩」을 발간하여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숙원을 풀어 준 것이다<본지 2015년 2월 1일자 1300호 기사 참조>.

 

이 직무 수첩이 발간될 때까지 초창기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주요 기도문과 직무 등이 일부 번역된 불완전한 교본으로 기본 정신과 활동 방법 등을 익히면서 자신과 이웃을 성화해 나갔다. 그런데 현 하롤드 신부는 이 땅에서 레지오 마리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한국인 신자들이 제대로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사전 검토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김금룡을 조용히 불렀다.

 

“가이오씨, 나는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라는 신심 단체를 들여오려고 합니다. 처음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정신과 방법을 가지고 있어도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 있습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 단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안내서를 준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비밀로 하고 가이오씨 혼자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한국에서 이 사도직을 수행할 때 어떤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생각되는 점들을 제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현 신부가 김금룡에게 이런 임무를 맡길 수 있었던 것은 김금룡이 비록 세례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신문교우(新門敎友)이지만, 이미 전쟁 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성당 십자가를 자기 집에 감추고 수녀 한 명을 숨겨 줄 만큼 담력이 남다른 데다 짧은 시간에 비해 신앙심이 상상 이상으로 깊어졌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현 신부가 김금룡의 인간성을 더욱더 잘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 성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날 면화 공장들이 있었던 유달산과 바다가 맞닿은 지역.

 

 

삶의 전환점 된 레지오 마리애

 

현 신부는 지목구장 서리가 된 후 지목구청에 기거하면서 성옥에게 미사 복사를 시켰다. 성옥은 중학생 때부터 고려대학교로 진학할 때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이 되면 지목구청으로 달려갔다. 현 신부는 가까이는 압해도, 멀리는 흑산도 등 전라남도의 도서 지역에 있는 공소들을 순방할 때도 성옥을 데리고 다녔다. 그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마다 자기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성옥을 통해 그의 아버지 김금룡의 사람됨을 헤아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현 신부가 내려 준 과제에 대한 검토와 학습을 끝낸 김금룡은 현 신부에게 자기가 이해한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에 대해 자세히 보고하였다. 현 신부는 이를 꼼꼼히 메모한 다음에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해결책을 마련하였다. 문제점에 대한 파악과 이에 대한 보완책이 어느 정도 마련되자 현 신부는 김금룡에게 산정동본당 신자들 가운데 이 사도직 단체를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이들을 비밀리에 하나씩 접촉하게 하였다. 이렇게 모인 교우들이 현 신부의 지도를 받아 준비 작업을 거듭한 끝에 쁘레시디움을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이후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4시와 자기 전에 한두 시간씩 기도하고 주님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였지만, 그의 삶을 온통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삶으로 전환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레지오 마리애였다. 이전의 김금룡에게 헐벗고 굶주린 이들은 자기와 무관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는 내 형제자매로 다가왔다. 그는 기복신앙을 철저히 배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가족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고, 자기가 누리는 이상의 부를 탐하지도 않았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다 나누어주지는 못했지만, 레지오 단원이 되고 난 다음부터는 여러 부류의 어려운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묵묵히 실천에 옮겼다.

 

 

움막과 판잣집 찾아 나서

 

레지오 마리애는 환자 방문, 상가 봉사, 선교 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레지오 마리애는 빈첸시오회 아 바오로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영신적인 도움만 줄 뿐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활동은 금하고 있다(교본 제39장, 10. 참조). 비록 초기에는 교본 전부가 번역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김금룡이 이런 규칙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 죽이라도 먹지 못하면 곧 죽을 것 같은 이들과, 약만 먹으면 살아날 것으로 보이는 이들의 간절한 손길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결국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야 했지만, 이럴 때마다 레지오 단원이라는 사실을 결코 드러낸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였지만, 얼마 안 있어 거의 매일이다시피 유달산 자락의 움막이나 판잣집에서 기거하는 굶주리고 아픈 이들을 찾아 격려하고 신앙을 심어 주었다. 다치거나 많이 아픈 노인이나 어린이를 발견하면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 치료해 주고, 심하게 아플 때는 입원시키고 가족들과 교대로 간병까지 하였다. 이처럼 배고프고 아픈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 실천이 점점 잦아진 만큼 자연히 그의 씀씀이도 커져만 갔다.

 

아직 전쟁의 상흔이 짙게 남아 있어 누구나 살기 어려웠던 그 시절에 아무리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이 훌륭하다고는 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면 이미 가장과 남편, 아버지 역할을 내팽개친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된 1953년 고등학생이었던 외아들은 그가 본격적인 활동에 전적으로 투신하던 1954년 이미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당시에 지방 출신 사립 대학생은 거의 다 갑부 또는 그 지방의 유지 자녀들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 규모에서는 엄청난 돈이 들었기 때문에 가난한 학생들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쉽게 넘볼 수 없는 특권이었다.

 

그는 갑부도 아니었고, 목포 유지도 아닌 작은 가게 주인에 불과했다. 아들의 학비를 마련하려면 더 많은 노력과 절약이 필요했다. 그런데도 그는 지난날보다 더욱 열심히 장사하기는커녕 가게를 지키는 일을 점점 소홀히 하다가 결국은 장사에서 거의 손을 뗀 것과 다름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물건을 팔아 조금씩 모아두었던 돈을 다 쓰고 나자 장사 밑천마저 헐어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아버지의 전답까지 서서히 남의 손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평화신문, 2016년 11월 13일, 박명진 시몬(프리랜서 작가, 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강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 가이오(1914-1988)


(5) 주님의 더 큰 도구로 쓰일 재목이 되어

 

 

1953년의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주회 모습.

 

 

당시 김금룡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생각과 행동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장차 교회의 큰 일꾼으로 쓰시려는 주님의 특별할 안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금룡은 교리를 제대로 깊이 이해하고 교회 상식도 널리 알기 위해 성경과 교리서, 경향잡지 등을 열심히 읽고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본당에 파견되어 있던 사제, 수녀 그리고 선배 교우들에게 이해될 때까지 질문하고 해답을 얻고는 했다.

 

열심히 기도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몸과 마음을 던지던 그는 상가(喪家) 봉사에서도 눈에 띄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1950년대에는 오늘날처럼 본당마다 연령회가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같은 본당 교우라면 대개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서로 돕고 살던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 교우가 병들어 위태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집에서 청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기꺼이 방문하여 살펴본 다음에 세상을 떠나려는 이가 회개하여 주님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잘하도록 권고하여 선종할 수 있도록 예비하게 하여야지 그냥 죽도록 버려두지 말아야 한다”(「텬쥬셩교례규」, 상장규구, 선종을 돕는 공부)는 교회 가르침대로 교우가 선종하기 이전부터 방문하여 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선종하면 위령 기도(연도)를 바치고 형편과 능력에 따라 부조하고 봉사하였기 때문이다. 이 상가 봉사에도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누구보다 앞장섰고 헌신적이었다.

 

당시 도회지 사람 가운데 천주교 신자가 아닌 이가 죽으면 가족 외에는 시신을 보거나 만지는 일을 금기시하고 천하게 여기는 관습 때문에 장의사 또는 동네에서 온갖 궂은일을 맡아 하던 이들에게 시신을 맡겼다. 그러나 우리 교우들은 시신을 “우리 주 예수님의 팔다리와 몸이요 성령의 궁전이었음을 깊이 생각할 것”(「텬쥬셩교례규」)이라는 가르침대로 대개 교우의 손으로 염습하고 입관했다. 그러나 시신을 만지는 일은 아무리 착한 마음이 있더라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곱게 선종한 이도 있지만, 불행히도 화상이나 물에 빠져 죽거나 사고로 돌아간 시신들을 보고 만지는 일은 웬만한 비위나 담력이 없는 이는 감히 엄두도 못 낼 만큼 험난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신의 상태가 아무리 험악해도 절대 불편한 기색을 보이거나, 마지못해 한다는 식으로 대충하는 적이 없었다. 늘 정성을 다해 씻기고 수의를 입히고 묶은 다음에 관에 모셨다. 비록 신자가 아니더라도 조건 없이 열심히 염습하고 입관하는 이런 천주교 신자들에게 자기 가족의 시신을 부탁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나아가 기대 이상으로 진지하고 품위 있게 처리하고 기도까지 바치고 허드렛일도 망설이지 않고 도와주는 교우들의 이웃 사랑에 감복하여 천주교에 입교하는 이들도 많았다. 김금룡은 이 상가 봉사에도 가장 적극적이고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오늘날의 목포 북항(뒷개).

 

 

무리한 부탁에 응답하다

 

선교사들은 이처럼 점점 드러나는 김금룡의 특별한 모습을 유심히 눈여겨보고 있었다. 악착같이 돈 버는 일에만 매달리지 않을뿐더러, 이웃의 딱한 처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의협심과 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심,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한 신앙심을 지닌 그가 주님의 일꾼으로서 합당한 재목임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산정동본당 주임 둔(Dunne, 都) 신부가 어느날 김금룡을 사제관으로 조용히 불렀다.

 

“가이오씨, 제가 대단히 어려운 부탁을 하나 할까 하는데, 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지만 어려워하지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신부님!”

 

“지금 압해도에는 천주교 신자들도 많이 있고 앞으로 신자가 될 만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공소를 체계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유능한 일꾼이 없어서 참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가이오씨께서 이 압해도에 있는 공소의 회장으로 가실 수 있겠습니까?”

 

“……”

 

“아시다시피 써야 할 곳은 많은데 본당으로 들어오는 돈이 거의 없는 저희 형편에서 정기적인 보수를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공소 신자들이 교무금으로 내는 쌀과 공소에 딸린 밭에 농사를 짓고 지내시면 굶지는 않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렇게 어려운 부탁을 하는 제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고 많은 날을 고민해 봐도 주변 사람 중에 가이오씨밖에는 압해도로 갈 사람이 없습니다. 참으로 염치없는 말씀이지만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이오씨가 그곳으로 가지 않으셔도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니 며칠 깊이 생각하시고 결정되면 저에게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이들이라면 할 말도 못되고 들을 말도 못 되는 억지에 가까운 소리였다. 목포본당 초대 주임 데예(Albert Deshayes) 신부가 산정동성당을 건립한 1898년 이듬해부터 도서 지방 선교를 시작하여 안창도, 도초도, 비금도, 자은도, 압해도 등지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따라서 압해도는 긴 역사만큼 신앙생활을 오래 한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공소였다. 목포의 사목자들은 특별히 신경을 썼고, 산정동본당에서 회장을 파견하거나 압해도에 거주하면서 공소 회장으로 선임된 이들의 노력으로 신앙 공동체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교회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교우들을 본당 신부를 대신해 “예비신자 교육, 춘추 판공 준비, 공소 재산 관리, 공소 예절 주관, 공소에서 유아세례·대세·종부·혼인성사 집행 등”(가톨릭대사전)을 담당하는 공소 회장의 역할이 점점 더 전문화되고 체계화되어야 한다는 시대적인 요청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외적인 요소 말고도 회장은 “덕행이 있고 착한 표양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가르쳐 그가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는 기묘한 이치는 권력이나 재물을 통해서도 아니고 학문이나 언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덕행과 착한 표양으로만 가능한 것”(「회장 직분」)이라는 교회의 요구에 가장 부합한 교우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둔 신부가 김금룡을 불렀던 것이다.

 

김금룡은 장사를 거의 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목포와 고향인 무안에 집과 땅이 있어서 굶지 않고 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하숙하면서 사립 대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뒷바라지에 적지 않은 돈이 계속 들어갔고, 아직 한참 일해야 할 장년 가장이었다. 혼자 겨우 굶지 않을 정도의 식량만 확보되는 압해도 공소에 아내까지 데리고 가서 함께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보수 문제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김금룡이 압해도로 떠난다면 겨우 세 명뿐인 가족이 세 살림을 해야 하는 참으로 난감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문제에 김금룡이 대답하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신자가 된 이후에는 삼종기도에 있는 마리아의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 38)라는 고백을 언제고 기꺼이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부님, 저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제가 얼마나 잘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부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가겠습니다.”

 

오늘날의 압해도는 목포와 무안 양쪽으로 다리가 놓여 있기 때문에 몇 초만 달리면 갈 수 있는 육지와 다름없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목포 사람들이 예전부터 ‘뒷개’라고 부르던 북항에서 배를 타고 8분 정도 걸리는 섬이었다. 김금룡은 압해도에 대한 기초 조사라든가 도회지와는 달리 기초 생필품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궁벽한 섬인 압해도에서 꼭 필요할 것 같은 물품들도 구입하지 않았다. 그저 덮고 잘 이불과 간단한 옷가지 몇 벌, 그리고 현 하롤드 신부가 감사의 표시로 수여한 십자가와 성모상을 간직하고 1957년 10월에 뒷개에서 압해도행 연락선을 탔다. [평화신문, 2016년 11월 20일, 박명진 시몬(프리랜서 작가, 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강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 가이오(1914-1988)

 

(6) 압해도의 사도 김금룡

 

 

- 퇴임식 때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를 대신하여 본당 신부로부터 감사패를 받는 김금룡(왼쪽).

 

 

압해도는 둘레가 12㎞ 정도인 작은 섬이지만, 목포 북항에서 약 3.5㎞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나라 서남해의 다른 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 혜택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굴곡진 이 나라 역사의 사나운 풍랑에 휘말린 적도 많았다. 지금의 압해도는 인근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한 맛과 품질을 자랑하는 무화과, 포도, 배, 양파 등과 같은 특산물이 비싼 값에 팔리고 있고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제법 생겨났다.

 

 

벽 갈라지고 벌레 우굴거리는 공소

 

그러나 김금룡이 공소 회장으로 부임하던 1950년대까지만 해도 섬 주민 가운데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는 거의 없었고, 그저 반찬거리로 낙지나 조개를 채취하거나 낚시로 물고기 몇 마리를 잡는 정도에 불과했다. 압해도에는 논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밭농사에 종사하는 농민들이었지만, 당시는 농업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탓에 보리, 밀, 콩, 조, 수수 같은 잡곡과 고구마 등을 경작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압해도 신장리공소에 도착한 김금룡은 숙소에 작은 앉은뱅이책상을 들여놓고 하얀 책상보를 깐 다음에 십자가와 성모상을 모시고 공소 회장으로서의 앞날을 주님께 겸손하게 바쳤다. 그러고 나서 공소와 숙소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난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6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공소였지만, 1949년 11월에 신축한 이래 제대로 보수한 적 없는 낡은 건물이어서 기거하는 데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낡은 마룻바닥이나 왜돗자리(다다미) 사이로 벌레들이 기어다니고, 갈라진 벽 틈새로 서늘한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스며들었다. 그러나 워낙 타고난 성격이 낙천적인 데다 새로운 환경에 금세 적응할 수 있었던 김금룡은 실없이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한집에서 사이좋게 함께 살아야 할 친구들이 이처럼 많이 계시니 밤낮으로 심심할 일은 전혀 없겠고, 시원한 바닷바람도 아무 때고 원 없이 실컷 들이마실 수 있으니 이제 내 건강은 좋아질 일만 남았구나! 내가 사는 이곳이 바로 천주님의 집이니 하루빨리 낡은 이 집 대신 새 집을 지어 주님께 바쳐야겠지!”

 

- 김금룡이 공소 회장일 때 신축한 현재의 신장리공소.

 

 

16년 지나서야 꿈을 이루다

 

그러나 김금룡의 이와 같은 다짐은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실현될 수 있는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이 그랬듯이 목포의 천주교 신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바람에 신장리공소는 김금룡이 공소 회장으로 부임한 지 1년도 채 안 된 1958년 3월에 산정동본당에서 신설된 북교동본당 관할이 되었다. 북교동본당 관할이던 1965년에 공소 앞에 있는 부지 3395㎡(1024평)와 40㎡(12평)짜리 초가를 매입하였다. 그리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교체하는 등 비록 낡은 건물이었지만 그런대로 공소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잘 수리하고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몄다. 이어 1971년 3월에 본당으로부터 건축 자금을 지원받고, 공소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 봉사로 건평 30㎡(9평)짜리 아담한 공소를 신축하였다.

 

1971년 10월에는 산정동본당과 북교동본당에서 분할된 대성동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그러나 압해도에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신자들을 기존의 공소 건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72년 3월에 1484㎡(449평)의 부지를 새로 마련하였다. 김금룡이 공사를 총지휘하고 신자들은 모래와 자갈을 지게에 지어 나르는 등 열심히 봉사하였다. 그리고 목포에서 데려온 건축 기술자들과 주변으로부터 다소 지원받은 자금으로 139㎡(42평)의 공소 신축 공사를 마무리하고, 옛 공소 건물은 매각하였다. 이어 1973년 4월 23일에 낙성식을 거행함으로써 압해도의 첫날에 그렸던 김금룡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겸손하며 뛰어난 친화력으로 복음 전해

 

김금룡은 한 달에 한 번 본당 주임 신부나 보좌 신부인 아일랜드인 선교사가 그의 임지인 신장리공소를 방문할 때면 공소 성모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정성을 다해 이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대접했다. 압해도에는 공소 설립 때부터 대를 이어 신앙을 지켜온 오래된 교우들 가운데 대축일 때 배를 타고 산정동본당 미사에 참여하던 낯익은 이들이 있었다. 겸손하고 친화력이 뛰어난 그는 이들을 중심으로 친목계를 조직했다. 이어 이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공소 회장으로서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하나둘 실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금룡은 압해도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매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를 바쳤다. 그러고 나서 손수 아궁이에 나무를 넣고 불을 때서 아침밥을 지어 먹은 다음에 각종 잡곡과 채소를 심은 공소 부지의 밭을 돌보았다. 그리고 그날 특별히 공소에서 수행해야 할 공적인 업무가 없으면 해질녘까지 자전거를 타고 압해도 구석구석을 뒤지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후에 다시 만날 때는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친교를 다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환한 얼굴로 겸손하게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그의 친화력에 아무리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섬사람들일지라도 결국은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선교 활동을 요란하게 하지 않는 대신에 늘 열려 있는 그의 방으로 찾아오는 교우들과는 물론 외인들과도 안부 인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바쁜 틈을 타 틈틈이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안주로 이웃들과 술 한 잔 마시며 이들로부터 공소 운영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한 의견을 경청했다. 회장이란 말에 해당하는 라틴어 ‘Catechista’가 본래 교리교사를 의미하듯이 김금룡은 무엇보다 압해도 주민들에게 하루하루 복음을 증언하는 참된 삶을 통해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을 차츰차츰 늘려나갔다 그의 착한 표양을 보고 예비신자로 교회에 들어온 이들에게 천주교 교리문답과 기도문을 외우게 하고 그들의 수준에 맞게 교리를 쉽게 풀이해 주었다. 공소 회장으로서 보살펴야 할 압해도 교우들에 대한 사랑과 외교인들을 향한 친절은 결코 사그라질 줄 모르고 늘 활활 타는 불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개방적이고 조건 없는 이웃 사랑과 친절과 겸손은 압해도의 기존 신자들뿐 아니라 완고한 비신자들의 마음을 열고 주님 품으로 들어오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평소 몸은 빠르고 바쁘게 움직이지만, 말이 별로 없고 말을 하더라도 결코 많이 하지 않는 그의 가르침으로 압해도에는 주님의 자녀들이 점점 많아졌다.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는 공소 회장

 

공소 회장이 되기 전의 그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서 역할이 무엇보다 우선이었으나, 이제는 압해도공소 회장이라는 공인이 되었으므로 압해면 신장리에 살던 박인택(파트리치오)의 회고처럼 “그는 압해도에서 레지오 마리애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일은 없었다. 이곳 공소 회장으로서 자나 깨나 전교에 힘쓰고 이웃을 도왔다. 매주 금요일마다 그는 십자가의 길을 신자들과 함께 바쳤다. 또 그의 장기는 늘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자들의 집을 수시로 방문하여 신앙 상담을 하였다.” 이처럼 압해도에서 공소 회장으로서 자기 임무를 다하는 동안은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서 외적이고 공식적인 활동은 할 수 없었지만, 단원으로서 바쳐야 할 기도는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고 지난날 그의 장모처럼 손에는 묵주가 늘 쥐어져 있었다.

 

1991년에 평화신문의 이태호 기자는 천주교 신자를 비롯해서 많은 압해도 주민들을 만나 김금룡에 관한 생생한 증언을 다각도로 수집하였다. 그는 이때 수집한 증언들을 정리하여 김금룡의 약전을 평화신문에 연재했다. 그는 당시 공소 회장으로서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던 김금룡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김금룡은 이 섬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 전교를 열심히 하였고 다른 사람의 집안일까지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그에게 이곳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섬은 그가 공소 회장으로 부임해 있는 동안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청빈과 전교, 압해도에서 김금룡의 생활을 간결하게 상징하는 낱말이라 할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1월 27일, 박명진 시몬(프리랜서 작가, 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강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 가이오(1914-1988)

 

(7) 면장은 몰라도 가이오 회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퇴임식을 마치고 압해도 신자들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 가운데 점선 안이 김금룡 회장과 부인 박기남이 손녀를 안고 있는 모습.

 

 

김금룡이 압해도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섬사람들의 얼굴을 대략 익히고 나자, 목포에서 살 때처럼 가난하고 아픈 이들은 그의 차지가 되었다. 공소 교우 가운데 아픈 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득달같이 달려가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함께 나누고 그와 가족을 자상하게 위로해 주었다. 처음에는 아픈 교우들을 찾아다니던 것이 점차 병든 외인들까지 확대되었다. 1950년대 한국의 농어촌 지역에서 아무리 아파도 병원을 찾아가거나 약국에서 약을 사 먹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한약방에서 한약을 몇 첩 지어 먹거나 민간 처방으로 산이나 들에 있는 약초를 구해 달여 먹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자연적으로 그냥 치유될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로 매우 가난했다.

 

 

가난한 이들 위해 모든 것 내어줘

 

같은 동네에 거주하던 친목회원이자 친구였던 김수복(요한)씨가 “김금룡 회장은 가난한 교우들이 아프면 손수 약을 구해 오거나 약값을 마련해 도와주었다. 자신은 굶주리고 헐벗으면서도 가진 것을 마지막까지 나눈 그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회고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만나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기 주머니를 털었다.

 

환자 방문을 하다 보면 상가 봉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자기가 방문하던 아픈 이가 주님께 돌아가면 자연스럽게 상가 봉사로 이어가고, 갑자기 돌아간 이와 가족을 위한 봉사 활동도 정성을 다한다. 공소 회장인 김금룡은 매일이다시피 압해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보고 있었으므로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 가운데에도 누가 얼마나 아픈지 늘 파악하고 있었다.

 

“김금룡씨는 천성적으로 남을 돕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신자건 비신자건 사람이 선종하면 그 집에 가장 먼저 달려가 연도를 바치고 염과 입관 절차를 거쳐 출상까지의 일을 도맡아서 했다”라는 공소 신자 박인택(파트리치오)씨의 회고처럼 선종 소식을 들으면 즉시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 준비를 해 주었다. 신장리공소는 목포와 연결되는 선착장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섬의 반대편 끝에 있는 마을은 40여 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먼 곳이라도 선종 소식을 들으면 즉시 상가를 찾아갔다.

 

- 회갑 잔치를 마치고 아들 김성옥(배우)과 며느리 손숙(배우), 손녀들과 함께.

 

 

전문 장의사보다 야무진 손길로

 

그가 입관하는 전 과정은 밥벌이로 이 일을 하는 전문가 장의사보다 훨씬 군더더기가 없으면서도 야무졌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먼저 시신 앞에 겸손하게 꿇어앉아 성호를 긋고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 그러고 나서 시신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정성을 다해 씻기 시작하여 관에 모시기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끔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곧바로 처음 시작할 때처럼 경건하게 기도를 바치는 그의 모습에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의 이런 자세가 짧은 시간 안에 압해도 전역에 알려져 환자 방문과 함께 상가를 돌보는 일이 주업처럼 돼 버렸다. 비신자들까지도 자기 가족이 돌아가면 그가 염습과 입관을 맡아 주기를 바랐고, 그는 언제나 이런 섬사람들의 바람을 기꺼이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명절이거나 집안에 혼인이나 제사, 이사 등의 날짜가 정해지면 외인들은 부정 타는 것을 두려워하여 친척 상가도 찾아가지 않았지만,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그런 금기 사항이 없었다. 김금룡은 외인들의 초상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상가로 달려가서 먼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정성을 다해 도와주고 신자들에게도 알려 금기 사항 때문에 외인들이 찾아오지 않는 고인과 유족을 더욱 정성껏 돌보게 하였다.

 

그가 압해도에 들어온 1950년대는 물론이고 떠난 1970년대까지도 섬사람 가운데 외인이 죽으면 초하루와 보름마다 제사를 지냈다. 비록 대세를 받았더라도 대개 외인인 유족들은 위령 기도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김금룡은 상주의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장사를 다 지낸 후라도 자식이 효도를 다 한 줄로 생각지 말고, 마땅히 평생에 죽은 부모를 생각하며 정성으로 기도하여 항상 그 영혼 돕기를 힘쓸지니…”(「텬쥬셩교례규」, 상장규구)라는 교회 가르침을 따라 유족들이 돌아간 이를 위해 위령 기도를 바쳐야 하는 이유를 최대한 쉽게 설명하여 납득시켰다. 그러고 나서 가족끼리 위령 기도를 바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찾아가 기도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정성을 다해 함께 바쳤다.

 

이처럼 그는 늘 섬사람들의 궂은일에 매달리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신장리에 살던 신자 박인택(파트리치오)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김금룡 회장님은 빈 몸으로 오셔서 공소를 키우기 위해 열성적으로 노력했다. 회장님이 신장리공소에 머무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이웃 사람과 싸운 일이 없었으며 오로지 그리스도의 신앙을 전하는 일에 몰두했고, 외인들에게는 더욱 친절하셨다.” 

 

그러다 보니 압해도에서 면장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섬사람 가운데 교우가 아닌 외인들도 ‘가이오’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누구나 서슴없이 “가이오 회장님”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가 공소 회장으로서 선교 활동에 매진해서 얻은 아름다운 열매는 이렇게 말보다 몸으로 진실하게 실천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끼니도 거르며 이웃 사랑 실천

 

그러나 그가 공소 회장을 은퇴하기 직전 아내 박기남(칸디다)이 찾아왔을 때 남편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여건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는 공소 신자들의 교무금에서 쌀이 조금만 남아도 모두 관할 본당으로 보냈다. 오늘날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던 당시 섬의 취사시설에서 환갑에 가까운 나이 든 남자 혼자서 밥을 지어 먹고 세탁까지 손수 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 두 끼를 기본으로 먹었지만 일에 몰두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그의 습성 때문에 늘 끼니 때를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의 위를 비롯한 장기 곳곳이 심각하게 탈이 나고 만 것이었다.

 

남이 아플 때는 자기 주머니를 털어 병원으로 데려가고 약을 사 먹였으면서도 정작 자기 몸을 위해서는 곰처럼 버티고 지내는 남편이 참으로 한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돈벌이를 못 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먹을 약도 사 먹을 수 없을 만큼 궁색한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픈 몸을 제대로 건사하지도 못하면서도 그는 새벽과 깊은 밤이 되면 희미한 호롱불을 켜 놓고 성경과 신앙 서적을 하루도 빼지 않고 읽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읽어 본 책갈피마다 그의 손때가 새까맣게 절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 몸을 위해 약 한 첩도 제대로 사 먹지 못하는 남편을 쳐다보면 속상할 수밖에 없었지만, 공소 회장으로서, 아니 그 이전에 신앙인으로서 오직 주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기 한 몸 희생하여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그의 대단한 신앙심과 인내심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4년 4월 20일에 김금룡은 17년 6개월 동안 자기의 모든 정열과 사랑을 쏟았던 압해도 신장리공소 회장직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위의 사람은 1957년 압해면 공소 회장으로 재임 이래 현재까지 이 지방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온바, 교회 설립과 전교에 헌신한 공로가 크므로 이를 감사하고 그 공적을 높이 치하합니다”라는 감사패를 수여하며 그의 지난 삶을 기렸다.

 

그는 이날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깊은 정이 속속히 들었던 섬 주민들의 아쉬운 작별 인사를 받으며 압해도를 떠나 목포 용당동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들고 온 짐은 목포를 떠나 압해도로 들어올 때처럼 낡은 이불과 옷 몇 벌이 들어 있는 보따리 하나뿐이었다. 다만 압해도로 들어올 때 없었던 것이 생겼다면 그동안 공소 회장을 하면서 읽었던 책들과 바쁜 틈을 타서 정성껏 기록했던 전교일지 등이 담긴 낡은 궤짝일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4일, 박명진 시몬(프리랜서 작가, 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강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 가이오(1914-1988)

 

(8) 다시 레지오 단원으로

 

 

- 한 교우의 장지 운구 장면.

 

 

40대 한창 일할 나이에 목포를 떠나 인생 황혼기인 60대에 다시 목포로 돌아온 김금룡은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한 채 일만 하던 자신의 상한 몸을 서서히 치유해 나갔다. 아내 박기남은 오랫동안 바깥에서 홀아비 아닌 홀아비로 혼자 살다가 돌아온 늙은 남편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만들고 그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늘 조용히 행동하였다.

 

 

눈부신 발전 이룬 목포 교회

 

김금룡이 목포를 떠나 압해도에 가 있던 17년 동안 목포 교회는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그가 압해도로 떠날 때는 산정동본당과 경동본당 두 곳뿐이었으나, 목포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북교동ㆍ연동ㆍ대성동본당 등이 신설되어 다섯 군데나 되었다. 본당이 늘어났어도 본당마다 신자들은 여전히 많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1953년에 김금룡을 중심으로 세 개 쁘레시디움으로 시작된 한국 레지오 마리애는 2015년 8월 말 현재 광주, 서울, 대구 세 곳에 세나뚜스가 있고 행동단원 25만 1040명, 협조단원 27만 9280명 등 총 53만 1320명의 단원이 활동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의 약 10%에 해당할 만큼 한국 교회의 중추적인 신심 단체로 성장한 것이다.

 

김금룡이 용당동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지역은 경동본당 관할이었다. 그는 1979년 용당동본당이 설립될 때까지 경동본당 소속 레지오 단원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아직 몸이 온전치 못했지만 천성적으로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는 새벽에 아내와 함께 아침기도를 바치고 아내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나면 압해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가 해가 져야만 돌아왔다. 집을 나서면 우선 성당에 들러 미사를 드리고, 미사 봉헌이 없을 때는 오랫동안 성체조배를 하였다. 그러고 나서 압해도 공소 회장일 때와 다름없이 성당 주변에 사는 주민들부터 인사하면서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고 아픈 이는 없는지 살피며 돌아다녔다. 

 

김금룡이 목포로 돌아온 지 5년이 지난 1979년 10월 30일에 경동본당에서 용당동본당이 분가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부터 산업화가 본격화하여 도시 인구가 급증하였다. 이러한 사회 현상 때문에 도시로 이주하는 천주교 신자들도 많아졌다. 기존 본당들은 갑자기 늘어난 신자들을 감당할 수 없어 본당을 부득이 분할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분당된 신설 본당들에서는 교회 묘지 확보, 다른 지역에서 새로 유입되어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교우들의 장례 같은 문제들이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일정한 시기까지는 묘지가 있는 인근 본당들의 도움을 받거나 예전에 살던 본당 신세를 지기도 하고, 선산이나 공설 또는 사설 묘지로 가고, 이도 저도 안 될 때는 화장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해결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응급 처방도 한계를 드러냈다. 또한 선종하는 이들이 갑자기 많아지다 보니 본당의 기존 조직으로는 장례를 원활하게 거행하기 어려워졌다.

 

- 산정동본당의 옛 성전 모습.

 

 

연령회장으로 밤낮 없이 봉사

 

도시 본당들은 기존 연령회의 조직을 확장하고 활성화하거나, 없던 곳은 새로 조직하여 교우들이 선종했을 때 수행해야 할 갖가지 업무들을 맡기기 시작했다. 임종 전부터 하관 이후까지 바쳐야 할 기도, 예식 준비와 참여 같은 신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연령회가 앞장서서 감당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교우가 선종하면 염습은 물론이고 경황이 없는 유족을 대신하여 온갖 뒤치다꺼리까지 기꺼이 맡았다. 이러다 보니 장례 기간에 필요한 다양한 업무를 오늘날의 상조회사보다 훨씬 더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전문 조직으로 변모했다.

 

김금룡은 압해도 공소 회장에 임명되어 목포를 떠나기 전에 이미 레지오 마리애 활동으로 환자 방문과 상가 봉사를 누구보다 앞장서서 전개하였다. 압해도에서 공소 회장을 역임할 때는 환자 방문과 상가 봉사의 모든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특히 염습에 감동할 만한 정성과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이러한 그의 활약상은 이미 목포의 교우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레지오 마리애와 함께 연령회 활동은 당연히 그의 주요 일과가 된 것이다. 김금룡이 연령회장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용당동본당은 교우들이 5000명 이상으로 광주대교구에서 아홉 번째로 큰 본당이 되어 있었다.

 

김금룡은 이렇게 큰 본당의 신자들뿐 아니라 목포의 가난한 비신자들의 장례도 결코 외면하지 않았으므로 김금룡과 함께 활동하던 용당동본당 연령회원들은 다른 본당 연령회원들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김금룡은 죽어 가는 환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곳이 병원이건 자택이건 간병에서 장례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이 세상을 하직하려는 사람들이 비록 냉담자거나 비신자이더라도 열심히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이런 그의 집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를 찾는 전화가 걸려 왔다. 그처럼 성의 있고 깔끔하게 염습하고 입관하는 사람이 당대의 목포에는 없었기 때문에 상가 유족들은 으레 그를 부르고 환영했다. 

 

김금룡과 함께 활동하며 김금룡을 친아버지 이상을 따랐던 안현균(시몬)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는 집안에 급한 일이 있거나 개인적인 일이 밀려 있을 때 그런 전화를 받으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하기도 하는데, 가이오 단장님은 단 한 번도 이런 부탁을 물리친 적이 없으셨습니다.”

 

수의도 마련할 수 없고 관도 살 수 없는 지극히 가난한 가정에는 김금룡이 앞장서서 호주머니를 털어 부족한 장례 비용을 보조하기도 했다. 배우자나 자식은커녕 일가친척도 전혀 없이 혼자 쓸쓸히 죽어간 사람의 경우는 더욱 사정이 딱했다.

 

“단장님 같은 분들은 이제나저제나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어떤 상가든 비록 적은 돈일지라도 반드시 부의(賻儀)를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리 작은 본당이라도 일 년이면 열 분 이상 돌아가셨는데 그렇게 정성을 다 기울인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후배들이 아무리 구두쇠라도 그런 단장님을 따라 실천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이렇게 말보다 행동으로 후배들을 가르치는 신앙의 선배들이 많지 않은 것이 참으로 아쉽기만 합니다.”(안현균)

 

김금룡의 이런 태도는 “교우가 죽으면 각 곳에 있는 교우들이 다 인애하는 덕을 채우고, 또 성교회의 실(實)됨을 널리 펴기로 마땅히 많이 모일 것이요, 각각 형세(形勢)대로 상가에 긴히 쓸 것을 가지고 와 부조(扶助)함이 좋으니라”(「텬쥬셩교례규」, 상장규구)는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참된 신앙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11일, 박명진 시몬(프리랜서 작가, 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강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 가이오(1914-1988)

 

(9) 레지오 단원과 연령회원의 귀감

 

 

- 6·25 전쟁 때 인민군이 뽑아 산에 내다버린 산정동성당 십자가를 김금룡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벽장에 숨겨 지켜냈다. 오늘날까지 산정동성당을 지키고 있는 옛 십자가.

 

 

당시 김금룡의 충실한 후배들은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가이오 단장님께서 상장례에 참여한 사례는 아마 수백 건도 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장님은 당신 활동에 관해 이러저러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묵묵히 봉사하시기 때문에 매스컴에 단 한 번도 오르내린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입니다. 비록 돌아가셨지만 단장님은 저와 저희 모두에게 늘 살아 있는 착한 그리스도인이셨습니다.”(윤백현)

 

 

처참한 시신도 주님처럼 모셔

 

김금룡과 후배 연령회원들은 수시(收屍)부터 입관, 출관, 하관 등 상장례의 전 과정을 도맡아 했으며, 본당 묘지관리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외롭게 세상을 떠난 가난한 이들의 시신을 공동묘지에 안장하기도 했다. 아무리 험악한 경우를 만나더라도 절대로 흐트러지지 않고 정중하고 꼼꼼하게 시신을 다루는 김금룡은 후배들에게 염습의 교본(敎本)과 같은 존재였다. 그를 따라다니며 장례의 제반 업무를 익힌 후배들은 어느덧 작은 김금룡이 되어 있었다.

 

“삼복더위에 돌아가신 분들, 물에 빠져 돌아가신 분들, 이런 분들의 시신을 만져 보면 뭉글뭉글해서 살이 묻어날 만큼 참혹합니다. 어떤 분은 얼마나 오랫동안 심하게 앓다가 돌아가셨는지 시신을 움직일 때마다 피가 터져 나올 정도입니다. 이런 시신들도 다른 교우들과 다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성령의 궁전이었기 때문에 우리 연령회원들은 정성을 다해 수습하고 입관합니다. 레지오 단원과 연령회원은 밀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둘 다 가장 힘들고 괴로운 일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뛰어들었기 때문입니다.”(안현균)

 

김금룡은 이제 목포의 상가(喪家)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아직 건강하고 젊은 사람 못지않게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를 하느님께서 갑자기 부르셨다. 1988년 4월 20일 74세의 일기로 용당동의 허름한 자택에서 조용히 주님께 돌아간 것이다. 지금은 신부의 아버지가 된 안현균은 신학생 부모 모임 때문에 광주 대신학교에 갔다가 김금룡이 선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현균은 지금도 김금룡에게 무엇보다 가장 낮은 자세로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배웠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이오 단장님은 늘 가벼운 웃음을 입가에 지니고 모든 사람을 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말씀은 하셨지만 말보다는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언젠가 그분의 대자가 냉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단장님께서는 그를 찾아가 말없이 대자의 손을 잡고 그저 하염없이 오랫동안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그 대자도 결국은 울면서 대부님께 용서를 빌고 난 다음부터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분은 늘 말보다는 행동으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에 저도 그분의 참된 이웃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분을 아는 모든 사람은 모두 언제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따랐습니다.”(안현균)

 

레지오 마리애 광주 세나뚜스 전(前) 단장 김영대(루도비코)는 “제가 목포에서 있었던 레지오 마리애 행사 때 김금룡 단장님을 처음 만났는데 ‘선배님, 오늘날의 레지오 마리애가 어떻게 하면 제 갈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는지 한 말씀 해 달라’고 하자 때 빙그레 웃으시면서 ‘절대 레지오 회합에 빠지면 안 되고, 틈이 날 때마다 열심히 기도하고,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면 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이 그분은 늘 말보다 행동이 앞섰던 분이셨습니다. 특히 상가 봉사의 아름다운 전통을 우리 교회에 뿌리내리게 한 훌륭한 선배이셨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부호의 딸에서 신앙인의 아내로

 

김금룡의 아내 박기남의 일생에서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세 남자는 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었지만, 아버지 얼굴을 알만한 나이가 됐을 때는 이미 자기 곁에 없었다. 아버지 박내홍은 투옥만 된 것이 아니었다. 자기 가문뿐 아니라 하동 땅의 명문가요, 부호였던 처가인 신씨 가문마저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객지에서 쓸쓸하게 돌아갔다. 박기남은 평소 이런 아버지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자기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남편 김금룡이 밖에서는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집에서는 늘 손님 같은 존재였다. 젊어서는 풍류를 즐기느라, 주님을 안 다음부터는 불쌍한 이웃의 고통을 덜어 주느라 자연히 아내에게는 소홀했다. 경상도에서 시집온 그녀는 친구도 없었다. 다른 이들은 김장할 때나 장 담글 때 이웃이 서로 품앗이했지만 그녀는 늘 혼자 해치웠다.

 

-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 분도의 비석.

 

 

일제가 패망하기 전후에 박기남이 대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많이 아파 병원에 갔는데 자궁 외 임신으로 나팔관이 터졌던 것이다. 수술이 끝나자 의사는 높은 곳에 전깃줄로 연결한 얼음을 배 위에 얹어 놓고 흘러나온 피가 얼어 굳어 버리면 곧바로 제거하여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다. 지금도 이런 수술은 위험하지만 당시는 의약품이 아주 귀하고, 수술 도중에 정전이 되기도 할 만큼 어려운 시기였으므로 목숨을 잃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원시적인 조치로 목숨을 겨우 건진 박기남은 한 달이나 병원 신세를 졌다. 김금룡은 어머니와 장모를 모시고 있어서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몸소 아내 곁을 지키며 병수발을 다했다. 당시의 보통 남자들처럼 애정을 표시하는 데 미숙했지만 늘 자기 뜻을 거스르지 않고 조용히 따라 주던 아내를 마음 깊이 사랑했던 것이다.

 

 

막내 아들 잃는 아픔 겪어

 

성옥을 낳은 뒤로 아기가 잘 들어서지 않던 박기남이 늦둥이를 하나 낳았다. 김금룡은 구교우들처럼 세례명 분도(芬道, 베네딕토)를 이 늦둥이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아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어린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참척(慘慽)이라 하여 거의 버리다시피 했다. 그러나 “어떤 교우는 사회의 풍습을 따라 어린아이의 장례를 합당하고 성대하게 지내지 않는데, 이는 믿음이 적은 까닭이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들이 진정 영화롭게 부활할 것을 생각한다면 크게 공경해야 한다”(「회장직분」)는 가르침대로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 김금룡과 박기남의 묘지에 서 있는 아들 김성옥.

 

 

김금룡은 이미 명절이나 기일에 조상 제사를 지내지 않고 아내와 함께 위령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그는 박해 시절 우리나라 신앙의 선조들처럼 제사보다 위령 기도를 정성껏 바치는 것이 세상을 떠난 영혼들에 훨씬 더 유익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앙심이 투철하고 교회의 가르침 앞에서는 단호한 그였지만 이 아들의 묘소만큼은 자기가 죽고 난 뒤에 비록 고향을 떠난 형일지라도 잘 보살펴 주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래서 어린 아들을 먼저 보낸 아비의 심정을 남은 아들이자 분도의 형인 성옥에게 보라는 듯이 묘비에 이렇게 남겼다. “天主公敎信者 金芬道之墓(천주공교신자 김분도지묘)”, “墓主 서울 兄 金 도비아 聖玉(묘주 서울 형 김 도비아 성옥)” 

 

성옥은 늘 자랑스러운 외아들이었다. 자라면서 크게 말썽을 피운 적도 없고, 공부는 물론 성당 활동도 앞장서서 잘했다. 예전에는 대부분의 본당이 자정에 시작되는 성탄 성야 미사 전까지는 연극이나 노래, 장기자랑 등을 공연했다. 본당 신자들은 자기 집에서, 공소 신자들은 각각 배정된 회장들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모두 성당에 와서 이 공연을 보면서 대축일 미사를 기다렸다. 이때마다 성옥은 연극 대본을 쓰고 주인공을 맡았다. 이처럼 성옥의 연극 인생은 이미 십 대 청소년 시절부터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딱 고등학교 때까지였다.

 

“아들이기는 해도 1954년에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뒤부터는 부모님과 함께 한 적이 별로 없어서 그 이후로는 부모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잘 모릅니다. 학생 때는 방학에 겨우 하루나 이틀 부모님 곁에 머물다 간 정도이고, 학교를 졸업하고 국립극장 전속 단원이 된 이후부터는 명절 때도 공연했기 때문에 1년에 한두 번 찾아뵌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신에 어머니는 자주, 아버지는 어쩌다 한 번 아들을 보러 서울로 오시긴 했습니다. 참 불효막심한 외아들이었습니다.”(김성옥)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18일, 박명진 시몬(프리랜서 작가, 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강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 가이오(1914-1988)

 

(10 · 끝) 착하게 살았던 이승의 삶을 복되게 마무리하다(善生福終)

 

 

- 노년의 김금룡과 아내 박기남.

 

 

아들이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올라갈 때부터 김금룡은 자기 자식이 다시는 목포로 돌아와 살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아버지의 생각처럼 성옥이 젊어서는 서울의 연극 무대, 중동 사막 공사 현장, 한국 기업 유럽 지사, 대학 강단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그 아들은 어느덧 80이 되어 아버지 예측과는 달리 고향으로 돌아와 목포의 문화인들로 구성된 ‘소리 꽃 세상’(대표 이미란)과 함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 그리고 가난한 이웃의 삶과 죽음에 늘 함께 했던 김금룡을 주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지난날을 되새기며 살고 있다. 그는 틈만 나면 산정동성당을 찾아 미사에 참례하거나 성체조배를 한다. 비록 눈에 띄는 일을 앞장서서 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태어난 목포의 지역 사회 못지않게 자신의 영혼을 키워 준 목포 지역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색하고 있다.

 

 

손녀의 기억속 할아버지

 

성옥은 김금룡이 직접 세례명을 지어 준 실비아, 테클라, 마리아 등 세 딸을 방학 때마다 목포로 내려보냈다. 세 자매가 목포에 도착하면 유달산에 올라 목포 시내와 바다를 한 바퀴 둘러본 다음에 할아버지 댁으로 갔다. 할아버지 방에는 앉은뱅이책상 위에 초와 꽃, 십자고상과 성모상, 기도서와 성가집, 레지오 마리애 교본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만지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지만, 어린 손녀들이 볼 때 ‘이것은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손녀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할아버지는 오로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새벽에 조심스러운 인기척에 놀라 눈을 떠 보면 깨끗이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은 할아버지가 촛불을 켜고 할머니와 함께 조용한 어조로 기나긴 아침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밥상머리까지 계속되는 할아버지의 오랜 기도가 어린이들에게는 참으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김금룡은 늘 장궤(선 무릎 자세)하고 기도를 바쳤는데, 그의 입에서는 어린 손녀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기도문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손녀들은 늘 할아버지와 함께 산 것도 아니고 방학 때만 되면 잠깐씩 가서 본 것뿐이지만, 눈을 뜨면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잠자기 전에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할아버지의 이런 모습이 마치 부메랑처럼 돌아와 지금도 그녀들을 지배하고 있다.

 

목포에 오면 유달산 외에는 딱히 갈 데가 없던 손녀들은 만화나 동화책을 빌려다 보았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과자를 잔뜩 사다가 부엌 쪽문을 열고 “이거 맛있게 먹으면서 놀고 있어요”라는 말만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이처럼 그는 손녀들에게도 늘 존댓말로 이야기할 만큼 겸손한 태도로 다른 이들을 대했다. 서울 아들네 집에는 손녀들을 위한 동화책들이 많이 있었다. 김금룡이 서울에 올라오면 손녀들을 무릎에 앉혀 놓고 인어 공주를 읽어 줄 만큼 인자하고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그러나 손녀들은 할아버지와 어디를 함께 갈 때마다 할아버지가 늘 한 곳에 가만히 있지 않아서 불안하고 힘들었던 기억들을 안고 있다.

 

“학교에서 어디를 갈 때 제 보호자로 따라오신 적이 몇 번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 할아버지는 호기심이 많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셨어요. 제가 어릴 때는 창경궁이 아니라 창경원으로 불렸는데, 그곳으로 소풍을 갔던 적이 있었어요. 저희 아버지 어머니가 항상 바쁘셨으니까 할머니나 외할머니와 함께 갔는데, 그해에는 서울로 올라오신 할아버지가 대신 따라가신 것이었지요. 입장 시간 전까지 문에서 대기하다가 어린이들이 다 모이면 입장했어요. 그런데 다른 학부모들은 다 모였는데, 할아버지가 안 보였어요. 어린 저는 그때 너무 불안했어요. 그래서 그것을 신경 쓰느라 구경도 제대로 못 했지요. 그런데 다 끝날 때쯤이면 신기하게 할아버지께서 나타나셨어요. 이렇게 조금도 가만히 계시지 못하는 할아버지가 어떻게 사방이 물뿐인 섬에서 10년 이상 홀로 사실 수 있었을까요?”(손녀 테클라)

 

김금룡의 이런 모습은 이미 젊었을 때부터 있던 버릇이었다. 아들 성옥이 어릴 때 고향 무안을 가려면 당시의 육지 길은 멀리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목포항에서 배를 타는 것이 빨랐다. 그런데 김금룡은 출항 시간까지 여유가 있으면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린 아들이 가슴 졸이면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으면, 꼭 출발 직전에야 배로 뛰어올랐다. 평소 겸손하고 조용한 것과는 전혀 다른 그의 이런 이면을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희 손녀들이 목포에서 서울로 돌아갈 때는 꼭 기차 안까지 들어오셨어요.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도 할아버지는 태평하게 앉아 계셨어요. ‘할아버지는 표도 없는데, 그냥 가다가 붙잡혀 가시면 어떡하나?’ 그러나 할아버지는 꼭 기차가 움직여야만 부랴부랴 내리셨어요. 어떤 날은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못 내리고 송정리까지 가신 적도 있어요. 그때는 초조하고 불안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께서는 저희 손녀들을 보내기 싫으셨던 거지요. 그런 깊은 마음을 말씀으로 하시지 못하고 행동으로 표현하셨던 거예요.”(손녀 테클라)

 

- 아들 성옥이 외롭고 고달팠던 어머니의 삶을 추모하며 김춘수의 ‘가을 저녁의 시’를 묘비에 새겼다.

 

 

기도에 의지한 할머니

 

이런 할아버지에 비해 할머니는 늘 조용히 참고 견디는 여인이었다. “타고난 성향도 있겠지만 독립운동으로 쫓겨 다니기만 했던 아버지 때문에 항상 숨죽이고 사셔야 했던 지난 삶이 생활화됐던 것 같아요. 같은 여자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외로우신 분이셨어요. 저희 집에 오시면 늘 무릎에 저를 앉혀 놓고 종일 신앙과 교리 이야기만 해 주셨지요. 아니면 쉬지 않고 묵주기도를 바치셨어요. 할머니에게는 치유의 은사가 있었어요. 할머니 집에 가면 늘 기도를 받으려는 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 할머니는 의지하고 믿을 것이 기도뿐이었던 것 같아요. 기도를 안 하면 당신 아들이 잘못될 것 같은 강박 관념에 시달리셨지요. 늘 기도 속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셨어요. 그러다 보니 기도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신 것 같아요.”(손녀 테클라)

 

아들 성옥은 자기 어머니의 이런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 비석에 그녀의 외롭고 쓸쓸한 심정을 노래한 시를 새겨 넣었다. 남편이 공소회장을 할 때 그녀에게는 집이 네 군데였다. 서울 하숙집에서 맛없는 밥을 얻어먹던 아들도 못 미더웠고, 압해도에서 홀로 조석을 끓여 먹던 영감도 마음 안 놓이고, 늘 빈집과 다름없는 목포와 무안 집도 걱정이었다. 남편이 목포로 돌아올 때까지는 이 네 집을 전전하며 뒤치다꺼리하고, 아쉽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다른 집으로 갈 수밖에 없는 참으로 고달프고 외로운 인생이었다.

 

 

저녁에 갑자기 찾아온 이별

 

그날 저녁도 김금룡은 친구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 술을 즐기는 그였지만 일정량 이상으로 과음하지 않던 그가 그날만은 달랐다. “한 병 더 하고 가세. 한 병 더 마신다고 뭐 큰일이야 나겠는가?” 집으로 돌아온 김금룡은 저녁상을 깨끗이 비우고 아내가 깎아 준 배까지 달게 다 먹은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여보, 여보! 이리 좀 와 봐!” 사랑채에서 낮으면서도 다급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세요?” 안방에서 자고 있던 아내가 황급히 건너왔다. “조금 있으면 아이들이 올 테니 내 몸을 깨끗이 닦아 줘.” “……” 그녀는 남편의 몸을 다 닦은 다음에 설거지하면서 그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여보, 그동안 번잡한 나와 사느라고 참으로 고생 많았소. 미안하오. 용서해 주구려. 하느님 앞에서 다시 만납시다.” “……”

 

박기남은 「성교예규」를 펴고 침착하고 차분한 어조로 임종경, 임종도문, 축문, 임종하는 이에게 가장 유익한 경문 등을 차례대로 바치기 시작했다. 김금룡은 이미 줄줄 다 외우고 있는 이 기도문들을 처음에는 입으로 따라 하다가 나중에는 힘이 부치자 마음속으로 바치면서 착하게 살았던 이승의 삶을 복되게 마무리하고(善生福終)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갔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25일, 박명진 시몬(프리랜서 작가, 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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