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교육ㅣ심리ㅣ상담

[심리] 영성과 심리로 보는 칠죄종: 교만 치유하기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15 ㅣ No.808

[영성과 심리로 보는 칠죄종] 교만 치유하기

 

 

교만함의 자화상

 

익명의 한 사제가 인터넷에 올린 ‘교만한 사제의 고해성사’라는 글의 내용이 나의 모습 같아 소개한다.

 

“사제 생활을 하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자꾸만 작아지시고 저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고해실에서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갑니다. 존경했던 선배 신부님들이 지금은 비난의 대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목의 대상이 약하고 소외된 이들에게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로 옮겨 갑니다.

 

초대 받는 자리에 으레 가장 좋은 가운데 자리에 먼저 앉습니다. 어르신들이 무릎을 꿇고 술을 주셔도 이제는 앉아서 받습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뵈러 가정 방문을 갔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되어 가정 방문을 갑니다.

 

칭찬과 감사, 격려의 말보다 불평과 원망, 지시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타인의 말을 듣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집니다. 강론도 자꾸 길어집니다. 교우들과의 회합 때 무조건 나의 판단이 옳다고 우길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 줄 알았는데 안 해도 되는 이유가 자꾸 늘어납니다.”

 

가상의 내용이긴 하지만 마음에 긴 여운을 남긴다. 교만이 우리의 일상 안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퍼져 간다.

 

일반적으로 교만은 내가 누군가로부터 당연히 대우받아야 한다고 여기거나 남보다 자신이 위에 있다는 마음이 전제된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와 힘(육체, 재산, 지식, 신분 등)을 과장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느끼며 다른 이들에게 그런 대우를 요구한다.

 

이들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고 매력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이는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기 마련이기에 그 바람이 지나치거나 잘못된 방법 안에서 지속적으로 추구되는 경우로 교만의 의미를 좁힌다.

 

 

성경과 교부들이 말하는 교만

 

「성경」에서는 교만을 ‘모든 죄의 시작’(창세 3장 참조)이고 ‘뿌리’(집회 10,13)이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파괴’(예레 13,9-10)하는 일종의 ‘우상 숭배’로 여긴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를 외면하고 독립적으로 살고자 하는 이 욕망은 인류의 시작부터 함께한다.

 

아울러 「성경」은 개인적인 차원의 교만뿐만 아니라 ‘유다’나 ‘예루살렘’과 같은 지역 형태의 ‘공동체의 교만’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개인과 상호 유기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오늘날 재정과 군사력으로 부강한 나라들은 개인에게도 그 영향을 주어 다른 나라, 특별히 약소국의 국민을 얕보거나 그들의 권리를 무시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국가를 비롯해 지역과 종교들도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그러한 영향을 미친다.

 

한편 교부들은 교만을 ‘영적 전장에 나온 적군의 대장’으로 일컫는다. 이에 비하면 다른 죄는 ‘벼룩에 물린 자국’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실제로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교만을 다른 ‘죄들의 뿌리’라고 여겨 칠죄종 목록 안에 넣지 않으려고 했다.

 

특별히 교부들은 덕과 영적으로 출중한 사람들 가운데서 오히려 교만한 자가 많을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덕의 추구는 자기 안에 교만의 위험성을 자각하는 데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실제로 수도 전통 안에서 많은 수도자는 특별히 내가 더 하느님을 알고 가깝다고 여기는 것이나 영적으로 더 진보했다고 여기는 것조차 교만으로 여겼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교만 앞에서 자주 넘어졌음을 교회사는 보여 준다. 이는 비단 과거의 기록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습 안에서도 쉽게 관찰된다.

 

“저의 집은 몇 대째 내려온 구교 집안으로, 저 또한 몇 년 동안 사목 위원을 했고, 쁘레시디움의 창설 회원입니다. 매일 미사나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말에는 자신은 인정과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는 의식과 우월감이 깔려 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지닐 수 있는 종교 엘리트 의식도 마찬가지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우리가 지닐 수 있는 교만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형태로 소개한다.

 

첫째, 선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

 

둘째, 선의 공로가 자신의 덕분이라고 여기는 것.

 

셋째,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선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

 

넷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의 실제 가치보다 그 선을 과대평가하는 것.

 

이러한 네 가지 종류의 교만은 결국 모든 선에 대해서 하느님과 독립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결국 교만은 선의 진정한 출처를 왜곡하는 것이고, 피조물인 자신의 존재를 외면함으로써 하느님에게서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교만은 신앙을 거스르는 행동으로 평가된다.

 

 

교만의 특징들

 

본 글의 전체 맥락과 관련하여 성경과 교회의 전승이 전하는 교만의 특징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교만은 특정 대상 없이 매 순간 다가온다.

 

곧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기인했음을 잊고 그 원인을 자신에게 돌릴 수 있다. 예를 들면, 성경을 묵상하다가도 자신의 지식과 묵상 능력에 감탄하거나 기도 모임을 자신의 영적인 지식을 자랑하는 시간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

 

둘째, 교만은 완벽주의자의 전형적인 악습이다.

 

완벽주의자들은 어떤 행동 안에서 자기만족을 추구한다. 그들 스스로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거절하며 자기만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의 기도(루카 18,9-14)에 나타나듯 이들은 자신의 행위를 드러내며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기도가 자기 자랑의 시간이 된 것이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통해 구원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믿음이 바로 교만이라고 강조했다(에페 2,9; 로마 4,1-2). 종종 신앙을 규율을 열심히 지키는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볼 때가 있다. 이러한 과정에 사람은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말이다.

 

셋째, 외적으로 위장이 가능하다.

 

이들은 마치 덕과 영적으로 진보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누군가의 가르침이나 권위 아래 있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영적이고 덕스러운 삶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끝은 허영과 자만이다. 신앙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신앙이 없는 삶이다. 이러한 그들의 영적인 삶과 덕의 실천은 허영과 자만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일찍이 키르케고르는 이런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양 자처하고 그들이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삯꾼이 목자로서 행세하듯 말이다.

 

넷째, 교만한 자들은 신랄한 비판과 경멸의 모습을 띤다.

 

교만한 자들은 자신이 누군가보다 낫다는 것을 느끼려고 늘 경쟁 관계 속에서 살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분노라는 악습과 자주 연결된다. 특별히 자신보다 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이나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이들에 대한 비판에 익숙하다.

 

정부와 교회를 비판하는 데 흥미를 느끼고 지도자들을 비판하며 무시하는 것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저 자리에 설 사람은 나뿐이야.”라고 생각하지만 자기의 입으로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말해 줄 다른 이들을 찾을 뿐이다.

 

과연 이 교만함은 영적인 문제일까? 아니면 심리적인 문제일까? 다음 호에서 살펴보자.

 

* 김인호 루카 - 대전교구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대학원장 겸 교무처장을 맡고 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저서로는 「신앙도 레슨이 필요해」, 「거룩한 독서 쉽게 따라하기」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성찰」,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8년 2월호, 김인호 루카]



1,90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